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병신년丙申年 표류기 : 과잉현실에서 살아남기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2월30일 15시06분

작성자

메타정보

  • 50

본문

 독자에게 어떤 정보를 주고, 어떤 정보를 주지 말 것인가. 그것은 작가의 과제다. 작가가 던진 정보에 따라 독자는 그것을 소화하며 나아가서 앞으로의 전개를 가늠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소화가 가능한 수준의 정보를 독자에게 전달할 것을 염두 해야 할 것이다. 혹여 독자가 작가의 세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체해버린다면, 그것은 어쩌면 무분별한 정보를 남발한 작가의 한계로 오래 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앞으로의 글을 쓰며 정보를 양껏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계는 작가의 펜 끝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가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상이 아닌 현실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정보들이 쉼 없이 단속적으로 우리 삶을 덮쳐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특종들 사이에서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걸러야 할 것인가. 다 먹어서 소화해버리거나, 토해버리거나, 혹은 입맛에 맞게 양껏 섭취하거나. 우리에게 선택지는 충분하다. 픽션이 아닌 현실이기에 그것은 순전히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2016년은 그런 해였다. 허구보다 더 허구적이고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쉬지 않고 우리를 공격했고, 우리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상을 견뎌내며 가까스로 한 해를 견뎌냈다.

 

 허구보다 낯선 현실

 

 서사예술에서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은 퍼즐 조각처럼 서사 흐름의 빈틈을 메꿔 이음새 역할을 해준다. 소설이나 영화를 비롯한 예술의 서사에서 흩뿌려져있는 스토리의 단서를 찾아 나름의 줄거리로 맥락화하는 작업은 우리에게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처럼 개별 사례를 도출하여 전체를 조립해나가는 과정은 작가가 축조한 플롯을 추적하는 일이며, 아무리 복잡할 플롯일지라도 그 구상의 시작은 분명 선형적 시간 아래 놓여있었을 것이다. 다만 작가의 의도에 따라 복잡하게 재구성된 것일 뿐. 그 이유로는 감상자에게 낯선 경험을 제공하게 하거나, 메시지 피력의 효율성과 정당성을 높이거나, 혹은 작가적 예술관의 스타일이나 기교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2016 병신년의 흐름, 특히 하반기에 이르러 급격히 극화된 시국을 보자면 이와 아주 유사한 공통점들이 적지 않다. 우선 현실의 의혹들이 합리적 의심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개별 사건들, 즉 대중이 모르던 미싱링크를 특종의 이름을 보도한 것에 있다. 그들 비리의 온상은 분명 긴 시간동안 차곡차곡 쌓아왔을 터,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두 알지 못하며 다만 보도되는 특종에 따라 의심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고 사건의 서본결을 나름대로 재구성할 뿐이다. 이는 소설로 치자면 서사의 원형을 역추적하는 일이며, 대중의 갈증을 해소하는 호기심을 넘어선 ‘알 권리’로의 당위다. 또한 사건 사이의 인과를 정립하고 명료히 하는 일은 분명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일이다. 실제로 그것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통쾌함, 시원함, 비로소 긍정적 변화가 선도되리라는 희망. 불안정한 시국의 인과들을 정립한 뒤 우리는 분명 일말의 쾌락을 느꼈다.

 

 현실의 플롯을 조립하는 일은 나름 순조로웠다. 특종이 연일 터졌고, 몰랐던 것들, 알 수 없었던 것들이 간신히 감당되는 수준 아래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창조한 비겁한 세계를 개별 사건으로 엿보며 재조립하는 일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하고 있다. 특종의 보도도, 특종 사이의 재조립도, 시위도, 또 그 어떤 목소리도 의지적이지만 한편으론 패색이랄 것이 종종 엿보이며 미궁으로 빠져드는 착시효과를 선사한다. 그러나 그것의 원인이 우리의 무기력이나 근성의 문제는 절대 아닐 것이다. 어떤 것도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명의 의지를 잃어가는 것은, 현실이 현실을 한층 넘어선 과잉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팩트가 범람하는 까닭에 있다.

 

과잉현실과 벤야민의 지적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그것을 상기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죽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 삶에서 종종 제거되곤 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동시에 죽어가지만, 아무도 죽어간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살아갈’ 뿐이다. 삶에서 죽음을 재차 강조하는 것은 그러므로 과잉현실일 따름이고 삭제된 사실이다. 마찬가지의 예들은 우리 일상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실패나 이별 또한 마찬가지며 그것들을 굳이 재현하여 복습하는 일은 스스로 트라우마를 만들어버리는 꼴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테두리 너머로 불편한 진실이 끊임없이 습격해오는 일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결단코 막아서야할 일이다. 그러나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만 받는 정보의 편식이 때론 병든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뜻한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뉴스에서도 따뜻한 뉴스를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세상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잿빛이고, 우울한 뉴스는 ‘특종’의 이름으로 전시戰時의 그것처럼 연일 보도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특종들은 모두 그 자체로 중대한 미싱링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꽃놀이의 그것처럼 동시다발로 뻥뻥 터지는 과잉현실이라면 전개는 다르다. 정보들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소화되지 않은 우리에게 쏟아진다면 할 말을 잃고 분노하기보단 많은 사람들의 입에선 실소가 터져버린다. 특종의 과잉이 오히려 특종의 중대성을 흐려버리고, 축소된 특종은 더 이상 특종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교착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문제적 상태다. 인터넷이 퍼지기 시작하던 시대부터 이러한 논쟁은 이어졌다. 정보가 범람하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가름하는 것은 인터넷 시대의 문제점이라며 늘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늘날, 현실은 온통 사실투성이가 되었으나 꼭 거짓말투성이처럼 우리에게 관심 끄라는 식의 유혹을 시도한다. 즉, 정보가 범람하여 사실도 범람했고, 정보에 휩쓸리는 시대에서 사실에 휩쓸리는 과잉현실에 봉착한 것이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예술의 현재를 관철하고 그 잠재태를 지적한 바 있다. 그 시대의 예술은 끊임없는 복제와 지기분열을 거쳐 원작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원작과 복제품 사이의 간극이 무한히 좁아진다. 이러한 사실-허구의 동반 추락 현상이 오늘날의 그것과 닮아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우리가 놓쳤던 중요한 사실들을 알아가는 것은 반겨야할 일이지만, 웬일인지 전혀 반갑지 않고 피해버리고 싶은 것은 벤야민이 언급한 아우라 상실과의 접합점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과잉현실 안에 존재하며 참과 거짓을 선별하는 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2016년을 살아갔다기보다는 가까스로 견뎌냈고, 벤야민의 지적은 과거의 그것과는 새로운 방식으로 불길하게 재현되고 있다.

 

81bbf1b956ba5d09a75ae1740c827214_1483077
 

2016년의 그림자를 떨치고

 

 2016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필리버스터와 총선부터 시작해서 시국과 촛불시위, 그리고 탄핵안 가결까지 흐름이 이어졌다. 사드 배치가 확정됐고 한일군사협정이 통과하기도 했다. 기록적인 무더위가 끝나자 지진은 우리의 불감증을 덮쳤고 이제는 AI 조류인플루엔자 독감이 식물정부의 과제로 기승을 부린다. 그러는 동안 소중한 생명들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고, 강남역과 스크린도어에는 포스트잇이 붙었다. 정치, 세대, 젠더 문제를 막론하고 완전히 새로운 질감의 것들이 우리의 일상으로 편승했으며, 성숙한 대중은 견디기 힘든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아픔을 공유하며 대처했다.

 

 대외 정세도 다를 바가 없었다. 영국은 브렉시트를 탈퇴했고 미국에선 트럼프가 당선됐다. 중국과 일본의 강경한 애국주의는 흔들림 없으며, 필리핀의 두테르테는 공포정치에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다. 러시아와 동유럽 사이의 군사적 긴장감, 특히 터키를 필두로 하는 전쟁의 위협은 앞으로 가중될 전망이다. 잊을만하면 IS는 다시 테러를 자행하고, 더 이상 테러가 남의 일이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이 모든 일들이 2016년에 일어났다. 세계적으로 자국민화와 폐쇄적 외교의 바람이 불었으며, 그것은 물론 흔들리는 정세와 과잉현실에 대한 방어기제의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전 시대, 기껏해야 탈냉전 이후 3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만든 문법들은 순식간에 쓸모를 잃어가고 있다. 정반대 속성의 거친 국수주의적 외교로, 세계는 자국의 정체성을 새로이 탈바꿈해가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이에 대하여 큰 신경을 쓸 겨를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2017년의 국내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과도기적 시간이 힘겹게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는 2016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는 2016년의 그것보다 더욱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불편한 진실들이 우리를 덮쳐올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분명 데자뷰처럼 우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며 그 때마다 매번 외면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는 유치한 수사처럼 우리는 다시 모진 일들을 당할 테지만, 세상이 실로 그렇다고 인정하는 태도가 한편으론 필요한 시기다. 비록 비극이 쏟아지는 현실일지라도 그 사이에 조각처럼 박혀있는 기쁨들을 위해서라도 어찌 다시 살아볼 일은 아닌가. 소화하거나 토해버리거나, 그것은 결국 먹어본 뒤 비로소 알 수 있는 용기 낸 자의 특권이다.​ 

50
  • 기사입력 2016년12월30일 15시06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