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청년 세대론 진단서 : 정체성 실종과 그 모색을 위하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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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2월09일 18시07분
  • 최종수정 2016년12월26일 22시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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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공감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공감이 어떤 종류의 공감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공감이 취향 따라 선택하는 감정 소모적 공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즐거운 일에 공감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슬픈 일을 떠올려본다. 슬픈 사람이 슬픈 일을 마주할 때, 그 순간에 몰입하고 공감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슬픈 사람은 슬픈 영화를 본다. 가만히 앉아서 잘 본다. 슬픈 감정을 소모하며 어쭙잖게 웃기보단 즐겁게 울어버린다. 이런 경우의 공감은 대게 대부분 그 감정이 상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달래는 자기중심의 공감이다. 그렇다면 공감이란 것은 슬프지 않은 사람이 슬픈 일을 보고도, 기꺼이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즐거울 때나 행복할 때 굳이 그 슬픔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즐거운 사람은 즐거운 것만 보게 되고, 결국 그 순간에 슬픈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은 슬픈 사람이다. 그 자는 공감하며 함께 울지만 그 울음 속에서 간혹 승리자의 씁쓸한 미소 같은 것이 번지기도 한다. 공감은 슬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자와 함께 엉엉 울어버리는 일이지만, 그런 울음은 어디에서도 터져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철저한 개인 집단이다. 그만큼 그 고통도 철저하고 처절하게 혼자만의 것이다. 우리 세대는 그런 세상을 살아간다.

 

세대의 무기력증

 

 청년 세대는 모두가 중산층을 꿈꾸고 적당히 결혼해서 적당히 빚 갚으며 근근이 살아가길 꿈꾸는 개인무리들이다. 그들 사이의 집합을 하나로 묶을 세대적 결속력이라 할 법한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청년 세대의 우울한 비전을 제시하는 패배적인 수사들일 뿐이다.

 

 가령 N포라는 무기력하지만 강하고 또 굳건한 이름은 우리가 앞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을 암묵적으로 권유하거나 예언하며 세대의 무기력증을 은근하게 유도한다. N포 세대가 사는 세상은 심지어 ‘헬조선’이라는 연옥이고, 그 단어를 놀이처럼 즐기다가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은 N포 무리 그들 자신이다. 그 세상에서 그들은 속물이 되거나 잉여가 되거나 혹은 아무거나 되어버리고 그들이 만든 헬조선 담론에 있는 힘껏 몸을 던져 힘없이 표류한다.

 

 적어도 현재 20대를 살아가는 모두들이 힘을 합쳐 정치·경제적으로 성과를 이뤄낸 사례는 없다. 세대적 성공의 경험이 없다. 작게 흩뿌려진 개인들의 큰 성공만이 편재할 뿐, 세대적 결속과 당위로 말미암아 기성의 그것처럼 노도처럼 일궈낸 성공이랄 것은 단 한 차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청년 세대에게 돌아온 것은 그들 스스로 패배적이고 속물적인 구덩이에 빠진다는 오명들과 더불어 그 증거물로 제시되는 빈약한 청년 투표율 및 정치적 불감증일 따름이었다.

 

 혹자들은 청년 세대가 패배적이고 무기력하게 묘사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옹호한다. 그 원인을 개천에서 용 날까 말까, 날 둥 말 둥 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에서 찾는 것이 하나의 변명이다. 대게 그것은 교육 제도에서 비롯한 무한경쟁에 대한 피로누적의 말로다. 걸음마 가르쳐줬으니 이제 날아봐, 하고 선생님이 말할 때 옆에서 진짜로 누군가 날고 있는 것을 볼 때의 아뿔싸 싶은 낭패감. 

 

 우리는 그간 그런 식의 불공정한 경쟁과 허무함을 보며 ‘헬조선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신나는 가십들’에 대한 패배적인 내성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 과정은 우리에게 일종의 전의 상실을 선사하여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라고 투덜거리거나 과격한 그나마의 ‘인생…… x발……’ 이란 소폭의 길고 지루한 그래프 사이를 변주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던 그 옛날 옛적부터 어딘가 난장판이라는 것을 진작 눈치 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구린 냄새를 풍기는 무엇들의 정체가 현 시국으로 합체 진화하듯이 세상에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우리는 그것들의 이름과 형체를 몰랐고,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뿌연 허공에 카운터 원투 펀치를 날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편승지상주의와 가짜 싸움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진보하거나 혹은 급속도로 후퇴해버리기를 반복하면서 그 시대를 직격으로 맞닥뜨리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세대들은 그러므로 더욱 개인적으로 침전되어버리는 성격을 강하게 내비친다. 자본시장에서 대체로 그것은 자기 계발이란 체제 편입 방법론으로 통용되기도 하는데, 그것의 궁극적인 과제랄 것은 기승전결의 스토리가 있고 결국 갈등을 극복하는 스스로의 상품화·브랜드화라는 점이다.

 

 스스로의 상품화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면서, 또 그렇지 못하다. 현재 취업시장에 뛰어들어 있다는 20대들은 누가 더 매력적인 상품성을 갖추고 있느냐에 고군분투한다. 그 투쟁은 청년 세대 자기계발의 본래적 의미를 상품화의 수단적 의미로써 역전시켜버리고, 자본주의 상품경제 하에 누가 더 매력적으로 소비되느냐에 따라서 성공 여부를 반으로 쪼개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결국 그 사회를 이끄는 동력은 화폐나 인력이나 경제 기반을 언급하기에 앞서 불안함이고, 시대와 세대는 불안함을 동력으로 소비한다. 불안에 자아는 끊임없이 축소되지만, 본연의 그것을 되찾겠다고 나오는 방어기제는 결국 매력적인 상품이 되기 위해 누가 더 속물적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느냐의 가짜 싸움을 탄생시킨다. 

 

 그 소프트웨어로써 자기계발서는 하나의 경전이고, 청년 세대의 불안을 매개로 가짜 싸움을 가짜로 말릴 수밖에 없다. 세대의 내적 투쟁, 브랜드화를 위한 열망은 자기계발서 제1의 존재론으로 작용하기에 그렇다. 청년 세대의 가짜 싸움이 끝나는 날, 자기계발과 자기상품화의 입지는 흐려지겠지만,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다시 끊임없는 불안을 먹어서 소화시키거나 혹은 게워가며 체제로의 편입을 골몰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체제 편입을 골몰한다. 욕망을 거세하고 가짜 싸움판에 뛰어든다. 전대의 시스템이 축조한 구조가 임계점이 도래했음을 무시하여 암묵한다. 이러한 양상의 편승지상주의는 청년 세대로 하여금 기성의 아류거나 체제 편입을 꿈꾸는 패배주의자들이라는 비판을 대거 양산한다. 청년 세대가 신봉하는 가짜 싸움은 그 근거이며 그 세대의 모든 투쟁이 결국 체제 편입적 투쟁에서의 탈승화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을 수 있냐는 강한 의혹과 부끄러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가짜 싸움’의 도착 상태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결국 구조는 구성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라는 희망이 앞서되, 가짜 싸움에서 승리한 집단이 그렇지 못한 나머지의 서글픈 동기動機들을 대변하리라는 이상으로. 끝내 동기보다 결과가 훌륭한 자에게 발언권을 돌리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체제에 대한 편입, 성공, 브랜드화라는 집합들을 비난하는 일은 현재로선 무의미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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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모색

 

 만약 청년 세대가 자아와 세계의 갈등에서 나름의 욕망들을 거세해버리고 세계로의 편입 투쟁을 벌인다면, 그렇지 않은 상태를 이상적인 답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세대론을 싸움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싸워야하지만 싸울 대상이 없는 상황이다.

 

 전대의 그것들이 대게 유신독재나 불황 등의 경제적인 것에 반하여, 세대적 결속과 교집합이 흐릿한 우리 세대에게 그것은 낯선 대상일뿐더러 공감과 집단 실천 의지가 결여하는 철저한 개인무리에게 세대론적 담론에 박차를 가할만한 동력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한 사회학적 논의는 충분히 다뤄지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 공통되는 전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의 세대적 담론과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 그간의 그것처럼 물리적인 방식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세대론의 최전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대의 결속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을뿐더러 매체적으로, 비정형적으로 그것을 개진시키라는 짐작이다.

 

 그 상징적인 의미로 SNS를 예로 들자면, SNS 내부를 떠도는 유령 같은 혼잣말과 헛소리에는 포기와 성공의 흔적들이 혼재한다. 쓰면 즉시 사라지고, 사라지면 다시 쓰는 장난과 낭비가 무수히 반복되는 매체오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너비가 확장됨에 따라 놀랍게도 질적 상승을 자생적으로 도모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양질의 사회적 아카이빙 조성은 물론 세대의 정신적 동향을 밝히는 지표로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청년 세대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매체를 일상화시키고, 나아가 소멸한 정치의식을 자각하고, 그것을 일상으로 동기화하는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그리하여 오늘의 세대적 동향과 감수성을 형성하는 단계는 분권적으로, 어떤 위계도 없이 형성된다. 요컨대 그것은 리좀적이며 ‘물리적 대상이 어떤 외부와 만나 무수한 배치를 통해 무한한 다양체를 생산하는 과정의 메커니즘’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청년 세대가 싸우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기성의 잔흔이 아닌 우리 안에 기생하는 패배주의나 무기력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체제로 편입하는 가장 정력적이고 동적인 세대의 투쟁은 역설적이게도 무기력의 반증이기 때문에. 그 맹목성을 경계하며 함께 세대적 정체성을 모색하는 것은 분명 훗날을 위해서라도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세대의 공감을 매개로 한 무수한 잠재태의 방식으로 일상을 덮쳐오고 있다.

 

고해성사와 착시효과들

 

 한편 예외적으로 우리는 주말이면 ‘세대적 우리’를 체험한다. 그것은 현재의 흐름과 정반대로 동적인 투쟁이고, 우리 세대의 패배적 수사 고리를 끊기 위한 발로로써 일부 동력을 삼고 있다. 더불어 주말 사이마다 대학가에서 단속적으로 등장하는 시국에 대한 목소리는 현재의 세대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청년의 목소리가, 정치의식이 증발해버렸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퍼지며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닌 통합을 실현하고 있는 경험은 이례적이고 중요하다.

 

 다만 촛불을 태우는 일이 그간의 불감증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는 없으리라는 제언은 유효할 것이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집회의 성격이 후대를 위한 대승적 차원의 애국이 아닌 편승하여 죄를 씻고 뉘우치는 수준에서만 머문다면, 그 행위 자체로는 의미 있을 수 있겠으나, 분명 나은 미래에 대한 지향성 차원에서 의문은 제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대의 집회가 만약 고해성사적으로 편중해버린다면, 현 시국은 그 성격이 미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과거의 오욕들을 벗어버리는 일회적 ‘기회’로 소비되고 만다.

 

 그러므로 결속욕구로 말미암아 ‘세대론의 전선’ 같은 말로 스스로의 뜨거움에 도취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뜨거움은 그 어떤 정체성도 될 수 없다. ‘헬조선-지옥불반도’가 하나의 애칭으로 놀이화되는 기로에서 어떻게 감히 세대의 정체성을 말하며 뜨거운 온도를 운운하겠는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차라리 ‘아프니까 청춘이다’ → ‘청춘은 뜨겁고 뜨거울 때 꽃이 핀다’ → ‘나는 불꽃이다’라는 기차놀이나 해버리는 것이 유익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현 사태가 일단락되는 순간까지 외연으로 뜨겁되 그 속을 냉장하는 일이 물론 중요하다. 감히 예상하자면 패색은 더욱 짙게 청년 세대를 드리울 것이다. 몇 가지 착시들, 가령 막장가도 국정과 막가파식 불통이 주는 허탈함이 만든 착시, 현 시국이 진영 간의 정치게임이라는 착시, 그리고 그것들을 아우르는 비리 온상의 도착 상태가 주는 무기력함과 패배주의라는 착시가 그것들의 거친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초보적인 전략적 착시에 빠져 세대의 패배주의를 깨려다 더 큰 패색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그 맞대응으로 온도를 도리어 낮춰버릴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좌절과 불안함을 놀이화하는 것이(헬조선, 수저론, 그리고 현 시국의 그것처럼) 실로 해학이나 풍자의 본질과 맞닿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조금 더 진중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하여는 분명 생각해볼 일이다. 결과적으로 불행을 유희적으로 가지고 노는 ‘경지’가 만든 것은 그것의 위력을 축소시켰다는 성과라기보다, 그 세력과 무기력을 대폭 증폭시켜버렸으므로. 

 

 우리는 자칫 청년 세대 패배주의를 부수고 긍정적인 미래를 도모하는 과정에 실패하고 더 큰 패배주의에 안착하는 ‘메타적 노답’,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불행의 가능성을 늘 염두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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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2월09일 18시07분
  • 최종수정 2016년12월26일 22시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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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jatang7님의 댓글

Gamjatang7

PC버전에서 마지막 문단에 타적 노답' 이라고 보이는 것은 '메타적 노답'인데 몇 단어가 누락되어 보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