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과 한국문학의 단상 : 밥 딜런이 남긴 숙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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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10월14일 20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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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년 역사상 처음으로 뮤지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주인공은 미국의 밥 딜런이다. 사실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의 노래 제목 ‘Knocking on heaven's door’를 딴 술이 하나 있는데, 몇 년 전 언젠가 선배 하나가 그 술을 마시고 술집 벽과 싸워 이겼다는 전설을 들었을 뿐이다. 내가 아는 밥 딜런은 그 정도였다. ‘노크가 조금 과했네…….’ 혹은 ‘전설적인 노래에 대한 예의가 이 정도는 돼야지…….’ 정도로.

 

‘문학’과 ‘문학적인 것’, ‘시’와 ‘시적인 것’

 

 노벨 문학상을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훌륭한 미국 음악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낸 딜런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다.” 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문학의 종말, 문학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딜런이 문학상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 등장한다. 딜런의 수상이 문학계로서 슬픈 소식일까. 그 사고는 혹시 문학이 권위라는 사고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학은 권위와의 투쟁은 혹 아닐까. 그렇다면 문학과 권위가 함께 쓰이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엄밀히 딜런의 음악은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것’이다. 범위를 좁혀 스웨덴 한림원이 말한 ‘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주로 감상적인, 철학적인 것을 보며 ‘너무 시적이야!’라고 대응한다. 그렇다면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 가령 자신을 ‘시팔이’라고 자칭하는 하상욱이란 청년의 시를 시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논쟁도 이 질문에서 파생한다 할 수 있다.

 

 이를 말하기 위해 우선 ‘시’와 ‘시적인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들은 ‘시편’이다. ‘시’라는 것은 통상 어떤 이데아적인 것, 도달할 수 없는 것, 절대적인 것이자 모든 시인이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그것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는 딜레마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에 도달하기 위해 ‘시적인’ 표현을 모색하고 한 편의 ‘시편’을 만든다. 그것은 ‘시적인’ 것을 통해 ‘시’를 역추적하는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아는 모든 시편들은 성공적인 실패 사례임 셈이다. 그 어디에도 완전한 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라는 사람은 그런 점에서 낭만이나 노스탤지어에 젖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내성을 깨부수고 끊임없이 실패하는 자다.

 

 혹자들은 밥 딜런의 수상이 ‘장르의 벽을 부쉈다’라고 말하지만,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그것은 ‘문학’과 ‘문학적인 것’의 벽을 부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과감히 뮤지션에게 상을 수여한 한림원의 결단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유력수상자였던 하루키 역시 이를 두고 문학의 해석 범주가 넓어졌다는 찬사를 보낸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학적인 것’을 사유하여 ‘문학’에 점차 다가가는 것. 그 시각 우리는 시시콜콜한 논쟁을 다루고 있었다.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 오에 겐자부로(1994)가 일찍이 수상했고, 중국은 최근 모옌(2012)이 수상했지만 한국은 아직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노벨상을 동아시아 문학 경쟁구도에서의 승리 차원에서 해석하며 장래 수상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그러나 매해 10월이면 그러하듯 ‘한국문학의 승리’나 ‘우리는 왜, 아직도 왜?’, ‘고은 vs 하루키’ 따위의 글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문학으로 하여금 시대를 엿보고 인간 내면의 단초나 모순을 찾고 또 우상을 허무는 것은 문학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모든 쓰는 행위에 내재한 것이며 결코 쓰지 말아야 할 것들을 결단코 써버리며 약자의 편에 서 함께 운다. 그 소음은 우리를 둘러싼 일말의 부조리라도 그것이 혹여 인간에 내재한 모순, 그러나 필연적인 어떤 것이 아닐까 고민하게끔 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혹자들은 기성의 답습이나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흐릿해지는 개인의 목소리를 전위적으로 흩뿌려놓는 21세기 문학의 풍경을 보며 ‘이게 무슨 헛소리야’라곤 하지만, 한편에선 그것을 응시하며 무의미해 보이는 그것이 담은 의미를 환기하고, 그 분위기를 차츰 저변으로 끌고나온다. 그리하여 시인 김수영의 말을 빌려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 도래하고 그 순간에 우리는 문학을 만나게 된다.

 

 삶을 증명하려 죽음을 전제하고, 사랑을 말하려 증오를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말하기 위해선 무엇부터 말해야할까. 이 변증의 과정에 도전하고 변주하고, 또 인내하여 자그마한 소우주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노벨 문학상은 그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 헤아릴 때 노벨문학상을 일본과 중국에 빗댄 경쟁으로 바라보고 ‘승리’나 ‘실패’, ‘거듭 실패’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스포츠 뉴스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다. 행여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이 나올까봐 겁이 나기도한다. ‘한국이 받는다, 받아야한다’, ‘아니다, 일본이 유리하다’라는 소소한 논쟁이 등장하는 것은 그 명예와 찬사를 생각할 때 당연히 등장할 수밖에 없기는 하나, 그것으로만 침전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 논쟁은 결국 스스로의 결론을 재확인하는 폐쇄회로를 만듦으로써 끝나는 소비고 문학을 서열화하는 무의미한 일이다.

 

 문학에 실패는 없고, 성공도 없다. 어떤 시대고 보편타당할 수 있는 문학은 존재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나름의 재해석이 거듭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경쟁의 구도로 바라보지 말고 함께 공존하는 자체적인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 두 세계관을 반추하고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내는 일은 문학으로서나 역사의 관점으로서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 과정은 경쟁구도의 정반대에 서있는 것이고 그동안 소홀히 했던 것의 하나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관점으로의 이행을 위해 우선 한국문학과 노벨문학상에 대해 오래 당착한 논쟁들을 들춰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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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번역 문제

 

 한국은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열에 아홉은 번역의 문제를 지적한다. 우리에게는 발랄한 의성어나 생동하는 의태어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번역하는 것이 고역이라는 지적이다. 예컨대 ‘퐁당퐁당’이나 ‘콜록콜록’ 등을 번역하면 언어가 지닌 생명력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론 민족정서 恨에 대한 세계의 공감형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선 미 조지타운대 교수 모린 코리건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두고 ‘김치 냄새 나는 싸구려 신파(cheap consolations of kimchee-scented Kleenex fiction)’라고 언급한 혹평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중고교 시절 방학숙제로 눈물 뚝뚝 흘리며 이 책을 읽었을 한국 독자에게는 꽤나 난처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인종차별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그녀의 언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불행한 것은 남편과 자녀들의 잘못이라는 이 소설의 메시지는 미국의 문화와는 철저히 떨어져 있는 것’이란 지적에 생각하게끔 하는 단초를 제공하긴 한다.   

 

 신파인데 싸구려고, 심지어 거기에서 김치 냄새까지 난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물론 듣기에 거북하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선 우선 질 떨어지는 비아냥거림 ‘김치’는 제외하고, 번역으로 생긴 언어의 간격과, 그 간격에 빠져 사라진 각국의 문화와 정서에 대해 생각해볼 순 있을 것이다. 즉 번역의 중간언어적 특성으로 비롯하여 우리가 느끼는 것을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노벨문학상과 번역의 문제’를 말하는데 있어 가장 초보적 단계의 질문이자 과제인 셈이다.

 

 

노벨 문학상 :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앞서 언급한 우리말의 생동감, 역동성에 대하여는 노벨 문학상의 취지와 목적을 고려해야 한다. ‘기여’는 작가의 전반적 작품 세계다. 노벨 문학상은 단일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한 작가적 세계관에 수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일성과의 찬미가 아닌 인간의 단면을 통찰하는 작가의 시선에 수여됨으로서 그 의의를 발한다. 이를 고려할 때 앞서 말한 생동과 역동의 수사적 문체는 작가의 세계를 구현하는 국소적 방법론일 터, 그나마도 번역의 과정에서 거세된다.

 

 노벨문학상의 평균 수상 연령이 64.7세다. 최연소 수상자는 1907년 수상자 루디아드 키플링으로 당시 나이 42세로 ‘파격적’이다. 이 상은 몇 십 년을 지그시 쓰며 창조한 나름의 세계와 내공에 치하된다. 그 소설적 세계가 천천히 확장되고 마침내 그 세력이 현실에 접속을 시도하는 거시의 과정에서, ‘퐁당퐁당’이나 ‘콜록콜록’ 이하 동등한 기교는 점차 잠식한다. 수상의 취지인 ‘이상적 방향으로의 기여’는 인간을 얼마나 면밀히 관찰하고 첨예하게 투사했는지가 중요하고, 이것은 번역의 탓을 운운하는 것이 혹여 독서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변론하는 초보적 질문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번역의 한계를 최소화하는 작업이며, 비록 우리말의 역동적이고 첨예한 그것이 사라질지라도 그것을 대체할 가장 훌륭한 번역가와 외국어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확신하는 존중에서 시작한다. 또한 그것은 한강이 수상한 맨부커상 국제부문이 작가와 번역가의 공동수상으로 이뤄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말은 우월하지 않다.

 

 툭하면 소환되는 번역과 관련된 논의를 일단락하고, 이 사고가 기인한 우리말을 ‘우월하다’, 라고 오해하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번역되면서 소위 우리말의 우월함이 파괴되고 한 단계 아래 수준인 영어로 격하된다는 식의 사고는 옳지 못하다. 우리말은 우수하다. 하지만 영어도 우수하고, 불어도 우수하고, 스페인어도, 그리스어도, 하다못해 몽골 어딘가의 전통부족의 언어도 그 나름대로 우수하다. 언어는 자기 충족적인 수단이며 한 단어가 무수하게 분화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검다’가 ‘거무튀튀하다’, ‘까맣다’, ‘거무스름하다’로 나뉘는 것은 어떤 이유든지, 자생적으로 그렇게 분화되었거나 혹은 새로운 필요에 의하여 재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이 다른 언어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말과 한글을 찬양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것을 오해하기란 쉬운 일이다. 한글은 물론 모든 표기수단을 통틀어 창제원리나 효율성이 단연 독보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말의 우월성에서 근거한다는 오해에 빠진다면 이는 앞서 언급한 폐쇄회로에 갇히는 위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반성으로 문학의 성과주의를 내몰다.

 

 지금은 한국소설 제2의 전성기라 부르는 시간이 서서히 태동하는 시간이라 한다. 한강의 소설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것이 이에 한몫했으며 출판, 문학계의 동향도 심상찮다. 가령 문학과 지성사 계간지 <문학과 사회> 4세대 평론 동인은 현재의 문학계를 성찰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를 모색하는 발군의 토의를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로 얼마 전 이례적인, 또 기념비적인 <문학과 사회 : 혁신호>가 탄생했다. 그들은 문학계에 남아있는 쓴 공기를 호흡하고 다시 게우며 ‘문학의 신비화’, 그러니까 일종의 엘리트주의를 차폐하고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 ‘혁신’의 화두에는 페미니즘을 필두로 우리가 담담하게 반성하고 직면해야할 미래를 환기한다. 문학계의 새로운 향방을 정하는 기로에 서서, 그들은 새 시대의 과제를 용감하게 마주한 첫 세대인 셈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이를 바라보노라면 권위와 기성의 상징인 노벨 문학상의 향방이 다소 무관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시인 고은이 노벨 문학상과 함께 거론되며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는 것은 <문학과 사회> 혁신호를 비롯한 새로운 평론이 지향하는 바와 궤를 함께 한다. 이 시기가 맞물리는 것은 둘 모두에게 서로가 순풍의 존재이며 대중에겐 섬 같았던 문학을 접하게 되리라는 긍정적 징후다. 우리는 수상의 여부보다 이 새로운 논의를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실 노벨 문학상은 작가보다 독자가, 아니 독자보다 대중이 원하는 상이 아니었는가.

 

 이런 점들을 미뤄보아 뮤지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잘 된 일이다. 그의 수상으로 하여금 우리는 일상에서 ‘문학적인 것’, ‘시적인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중이 그토록 원하던 섬 같은 ‘문학’에서 일상의 ‘문학적인 것’으로의 이행. 긍정적이다.  이것은 밥 딜런을 모르는 필자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신비화되는 흐름을 포착하고 나아가 그것을 허문 스웨덴 한림원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까닭이다.

 

 매년 가을이면 그러하듯, 고은 시인의 인자한 표정이 인터넷 화면 한 편에 애처로이 떠있다. 새내기 작가를 지망하는 누구들은 심드렁하게 원고를 다듬어 신춘문예를 마무리하고. 연례적 풍경이다. 다만 올 해가 특별한 것은 한강의 소설로 하여금 한국소설의 수요가 눈에 띄게 급증했다는 점, 시집이 SNS나 방송에 등장하며 젊은 층에서 패션적인 어떤 것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 그리고 문학계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비평 동인들의 성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 결정적으로 이를 증명하는 듯한 갑작스런 뮤지션의 노벨문학상 수상.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유는 흘러넘친다. 실체가 되지 못한 그것들을 상像으로 정박시키는 문학가의 작업과, 그 실체를 다시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나머지 비평의 작업은 문학으로 하여금 건강한 논의를 발생시킨다. 그 연장선에서 고은 시인 역시 언제라도 수상하면 겹경사고, 아니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리는 그 여부를 떠나 환호성을 내지르기보단 담담히 축하해야 할 뿐이다. 그가 만든 세계는 어떠한 것인가 슬쩍 서점이나 들러 ‘문학적 쾌거’가 한국식 성과주의와 똑 닮아버리지 않도록 주시하며, 그리하여 상賞에 대한 상像없는 집착을 내몰아 버리고. 이것은 우상이나 낭만을 게우고 형상을 응시하는 일이며 위액 보고 끝이 나는 우리 세대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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