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망가뜨리는 힘, 내관(#2) : 촉한을 망하게 한 황호(黃皓) > 칼럼

사이트 내 전체검색
많이 본 자료

칼럼

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칼럼
[인기순]
인쇄 본문 텍스트 한단계 확대 + 본문 텍스트 한단계 축소 -
 

칼럼

본문

 나라가 망하는 이유가 어찌 단순하겠는가마는 그 중에서도 황제의 최측근에 붙어서 정치와 재정과 인사와 군사권을 마음대로 주무른 내관, 즉 환관만큼 국가존망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따로 없음을 중국역사는 환한 거울처럼 보여 준다. 수천 년 중국 역사를 통해 나쁜 이름을 남긴 수많은 내관들의 면면을 깊이 살펴보면 나라를 망가뜨리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관통하는 몇 가지 중요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첫째로,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위엄과 복록이다. 그들에게서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든가 효도라든가 우애와 같은 전통가치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내관이 대개 극빈층 출신이라서 축재에 매우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나라에 대한 충성이나 백성에 대한 어짐(仁)이나 혹은 부모형제에 대한 효제와 같은 고상한 유가적 가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별로 없거나 알아야 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도 않았다.

 

둘째로, 내관들이 모색하는 최고의 절실함은 오로지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눈에 들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식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총애가 그들 권력의 원천적 뿌리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즐기는 오락이라든지 황제가 즐겨 찾는 여자를 찾아서 공급함으로써 끊임없이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가 된다. 어떤 황제는 특히 오래 살고 싶어서 장생술 혹은 방생술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탁월한 도술을 가졌다는 사람을 찾아 소개하는 일이 내관의 주된 일이 되기도 했고 또 내관 스스로가 중독성이 큰 독약을 황제에게 불로장생약이라고 속여 먹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나 입에서 황제의 뜻과 다른 생각과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셋째, 황제의 눈과 귀와 성총(聖聰)을 가림으로써 의도적으로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렇게 황제의 판단을 흐리게 해야만 황제가 내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권력이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넷째, 권력을 오로지하기 위해서는 쓴 소리를 마다않는 충신들이나 황제와 가까운 종친 혹은 인척 등 경쟁자를 지방으로 내치고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정적이라면 황제의 친인척은 물론 사대부세력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고 제거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황제마저도 제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다섯째, 내관들은 무리를 이루어 세력을 이루었지 절대로 홀로 따로 놀지 않았다. 배경이나 실력이나 모든 면에서 황제의 친인척 혹은 사대부에 비해 떨어졌으므로 그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관들끼리 똘똘 뭉칠 필요가 있었다. 전한 원제 시절의 석현 3인방이나 후한 환제 쿠테타의 주역 오후(五候)나 영제시절의 10상시가 모두 내관의 집단세력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여섯째, 내관들은 권력영역을 무한정 넓혀 나갔다. 처음에는 황제의 옷과 치장, 목욕, 음식제공 및 심부름 등과 같은 허드렛일이 그들의 주된 업무였으나 점차 조정의 재정 인사와 같은 국내정치는 물론 외교군사 방면으로 권력영역을 넓혀 나갔다.  황궁수비의 군사권은 전통적으로 내관들이 장악하고 통제했으며 뿐 만 아니라 지방의 군사권(예를 들면 당나라 시대의 절도사)을 통제하기 위해 내관에게 감군(監軍)이라는 직책을 부여하여 모든 절도사의 군권을 일일이 통제지휘감독하게 하였다.

 

일곱 번째, 내관들의 세력을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 양자를 입양하여 권력을 세습하기도 하였다. 정상적인 가정의 자녀를 내관의 양아들로 입양하여 권력을 세습하기도 했다.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은 후한 환제 때 내관 실력자였던 조등에게 입양된 대표적인 예였다.

위와 같은 내관들의 몇 가지 기본 행동원칙으로 인하여 중국 역사에 나타난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망해갔는지 자치통감에서 몇 가지 예를 찾아 옮겨본다. ​

 

(1) 촉한의 충신 동윤(董允)의 억울한 죽음(AD245) 

 

동윤은 삼국 시대 촉나라 남군(南郡) 지강(枝江) 사람으로 자는 휴소(休昭)이고 제갈량의 절친한 친구 동화의 아들이다. 등윤은 제갈량(諸葛亮), 장완(蔣琬), 비의(費禕)와 함께 촉한의 ‘4재상’으로 불릴 만큼 촉한의 충신 중의 충신으로 손꼽히고 있다. 유선(劉禪)가 촉한의 태자가 되었을 때 등윤은 태자의 가정교사인 태자사인(太子舍人)이 되었다. 유비가 죽고 유선(劉禪)이 17세로 황제에 즉위(AD223)하자 등윤은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옮겼는데 특히 제갈량(諸葛亮)의 신임을 받았다. AD227년 3월 제갈량이 북쪽으로 한중을 공격할 때(1차 북벌) 제갈량은 황제 유선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시중 곽유지와 비의, 그리고 황문시랑 동윤이 모두 훌륭하고 뜻과 생각하는 것이 충성스럽고 순수하니 궁중의 일 가운데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이들에게 물어 본 후에 시행하면 반드시 모자라거나 빠진 것을 보충하여 두루 이익이 될 것입니다.” 제갈량이 죽고(AD234)나서 비의에 의해 상서령으로 승진한 동윤의 성품은 공정하고 밝아서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올려서 황제가 하도록 하였고 하기 힘든 것은 스스로 맡아서 대신 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특히 정색으로 하고 바른 말로 자주 유선황제를 엄하게 규제하였으므로 황제가 매우 거북해 했다. 특히 등윤은 황제가 아끼는 교활한 내관 황호를 경계하고 감시하였으므로 등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황호는 황문승이라는 낮은 직책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시 촉한의 대장군이었고 병든 대사마 장완의 역할을 대신 떠맡아 하던 최고 권력자이며 4대 재상 중의 한 명인 비의(費禕)는 시중 동윤을 상서령으로 승진임명하면서 진지(陳祗)를 동윤 대신 시중으로 임명했었다.(AD 244년) 진지란 인물은 자존심이 매우 강했고 용모와 풍채도 뛰어났으며 지혜나 여러 가지 잡다한 기술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모술수가 매우 능한 사람이었으므로 비의가 그의 재능을 보고 순서를 뛰어넘어 등용시킨 것이다. 동윤 때문에 승진을 못하고 있던 교활한 황호는 시중 진지와 연대하고서 동윤을 몰아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황제는 평소 직언을 서슴지 않는 동윤을 매우 꺼려했으므로 황호는 진지에게 지속적으로 동윤을 깎아 내리도록 했다. 진지는 황호의 환심을 사서 한편으로는 황제의 총애를 사는 한편 다른 한 편으로 초고속 승진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황호와 진지가 상호 협력하여 두 사람 모두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참소와 모함에 억울하고 참담함을 느낀 동윤은 결국 화병에 걸려 그 다음 해에 죽었다.(AD245) 얼마 있지 않아 비의마저 사망하자(AD253) 천하는 황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관행동원칙 ①②③④) 

 

 

(2) 황호에게 벌벌 떠는 촉 최고장수 강유 (AD262)

  

황호는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모두 제거했다. 자신을 꺼리며 거리를 두는 나헌은 황호의 미움을 사서 파동태수로 좌천되었고 황호에게 굽히지 않은 진수도 수차례 강등되었다. 유선황제의 이복동생인 감릉왕(甘陵王) 유영(劉永)이 황호를 미워하자 유영을 모함하여 10여 년 동안 조정출입을 금지 시켰다. 황호의 사랑도 미움도 받지 않은 극정은 수십 년 간 승진을 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참언도 받지 않아 오래 자리를 지킬 수가 있었다. 

 

승상 제갈량(AD234)을 이어받은 장완(AD246)과 대장군 비의(AD253)가 죽은 뒤 촉한의 대장군 강유가 촉한의 군사를 총괄했지만 뚜렷한 전적을 올리지 못해 매우 초조했다. 원래 위나라 천수태수 마준(馬遵) 밑에 있었던 그는 제갈량의 1차 북벌 때에 침입에 겁을 먹고 천수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마준 대신 제갈량에게 항복하여 상장군에 봉해졌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후 강유는 촉한의 최고 권력자 상서령 장완(蔣琬)의 지원으로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거듭 북벌을 일으켜 위를 치려했지만 장완이 사망하자(AD246) 전쟁에 소극적인 비의(費禕) 때문에 군사적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가 없었다. 비의조차 세상을 떠나고(AD253) 모든 군권은 강유에게 넘어 왔으나 이미 북쪽의 위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남하해왔다. 강유는 공격전술을 채택해서 아홉 번이나 북벌을 단행했지만 번번이 위의 장수 등애, 곽회, 종회, 진태 등에게 막혀 전과를 올릴 수가 없었다.

 

궁중권력을 잡고 있던 황호는 강유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친하게 지내고 있던 우대장군 염우를 세우려고 하였다.(내관행동원칙 ④) 그 사실을 알아차린 강유가 황제에게 말했다. “황호는 간교하고 전횡과 방자함을 일삼아 장차 국가를 패망시킬 사람이니 지금 죽여야 합니다.” 유선이 말했다. “ 황호는 궁중 내에서 잡다한 일을 이리저리 처리하는 낮은 신하일 뿐이고 또 과거에 동윤 또한 매번 그를 질책하고 꾸짖어서 내가 오히려 늘 민망해 하던 사람인데 어찌 그대와 같이 높은 고관이 개의할만한 존재라도 되겠소?” 

481d152d966ef26962bedf76cf4e17c4_1476347
 

강유는 황호의 곁에 수도 없이 많은 무리들이 ‘나뭇잎처럼 붙어 있음(枝附叶连)’을 알고 나서 자신의 말이 큰 실수였을 깨닫고 겸손히 황제에게서 물러나왔다.(내관행동원칙 ⑤) 촉한 황제 유선은 황호에게 칙서를 내려서 강유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지시했으나 강유는 이 일 이후로 언제 황호에게 당할지 몰라 두려워하게 되었고 주둔지 답중(감숙성 임담현)으로 돌아 온 후에는 감히 성도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3) 무당의 말을 믿고 촉한 군사를 묶어둔 황호(AD262)

 

위나라 실권자 사마소가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 수춘을 평정한 뒤(AD258년)로 4년이 되는 동안 우리가 무기를 준비하고 갑옷을 수리한 것은 오로지 두 호로(즉 촉한과 오)들 때문이었소. 지금 오나라는 땅이 넓고 습지도 많아서 공격하기 쉽지 않으니 파촉지방을 머저 공격하는 것이 낫겠소. 3년 정도 뒤에 장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수륙양면으로 공격하면 간단히 오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 촉한에는 9만 병력이 있을 것이나 지방수비병력 4만을 감안하면 수도 성도를 지키는 병력은 5만을 넘지 않을 것이오. 서쪽에 있는 답중의 강유를 묶어 둔 다음에 바로 낙곡(주지, 장안 남쪽)으로 바로 나아가 한중을 공격하면 유선같이 아둔한 인간이 망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소?” 결국 종회를 진서장군으로 삼고 관중지역을 관할하며 준비하게 하였다. 정서장군 등애는 촉한 공격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여러 번 반대했으나 사마소의 강력한 명령에 따라 자기 고집을 꺾었다. 다급한 강유가 유선에게 편지를 올렸다. “지금 종회가 관중지역을 다스리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나 마땅히 장익과 요화를 보내어 양안(섬서성 면현)과 양평관과 음평(감숙성 문현)의 다리를 지켜서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강유의 편지를 받아 든 유선은 조정 대신보다 먼저 중상시 황호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물었다. 황호는 비밀리에 무당과 점쟁이들을 불러 점을 쳐보도록 시켰는데 그들의 답은 한결같이 ‘적들이 내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황호는 그대로 황제에게 보고하면서 침입이 없을 것이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고 강유의 편지 사실을 묵살시켜 버렸다.(AD262) (내관행동원칙 ③)

  

(4) 촉한을 공격하는 위(AD263)

 

위나라 사마소는 강유를 묶어 놓기 위해 등애와 3만 군사를 적도(감숙성 임조현)로부터 서쪽으로 보내 답중(감숙성 임담현)으로 진격시켰다. 옹주자사 제갈서는 3만 명 군사와 함께 기산(감숙성 서화현)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무가(감숙성 성현)로 나아가서 강유의 군사의 후미를 끊어버리도록 조치했다. 종회는 10만 군사를 동원하여 낙양을 출발하여 자오곡, 야곡, 낙곡을 넘어 바로 남진하여 한중으로 진격하게 하였다.(AD263년8월) 위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촉한에서는 요화를 답중으로 지원군을 보내고, 장익과 동궐은 양안과 양평구로 나아가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촉한의 군사들은 곳곳에서 위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어서 모든 촉한 군사들이 후방의 검각(사천성 검각현)에 집결하여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급한 촉한은 오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AD263년10월) 오나라에서는 대장군 정봉과 손이를 서둘러 보내 촉한을 돕도록 하였다. 강유는 험준한 곳을 지키고 있으면서 위나라 대군을 잘 방어해냈다. 

등애는 강유가 지키고 있는 지금의 검각전선에서 총력수비를 하고 있는 촉한의 수도 성도는 방비가 매우 허술할 것으로 생각하고 검각을 돌아 우회도로를 돌아서 성도로 진격했다. 부현(사천성 면양시)을 지키던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면죽(산천성 덕양시)로 물러났다. 등애가 사자를 보내 제갈첨을 유혹하였다. “만약 항복하면 낭아왕으로 삼겠소.” 제갈첨은 사자의목을 베고 진을 치고 등애를 기다렸다. 등애의 아들 등충과 사찬이 선봉으로 나아가 제갈첨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와 말했다.“ 저들이 매우 강하므로 아직은 이길 수가 없습니다.”  등애가 화가 나서 목을 치려고 달려들자 등충과 사찬이 다시 칼을 잡고 나서서 제갈첨과 그의 부하 장수들의 목을 들고 들어왔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이 한탄하며 말했다. “ 일찍이 황호의 목을 베지 못하여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죽게 되었는데 살아본들 무엇에 쓰겠는가.” 말을 몰아 전장으로 뛰어나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5) 촉한의 멸망(AD263)

        

위나라 군사가 빠른 속도로 공격해오자 유선이 회의를 열어 대책을 물었다. 어떤 자들은 오로 도망가자고 했고 어떤 이들은 남쪽의 운남 지역으로 도망가자고 했다. 광록대부 초주가 말했다. “ 다른 나라에 기생하는 천자란 없습니다. 오로 가면 오의신하가 되는 것이고 위로 가면 위의 신하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병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을 볼 때 위나라가 오나라를 병합하면 했지 오나라가 위나라를 병합하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똑같이 신하를 지칭한다면 위에게 한 번하는 것이 오에게 했다가 다시 위에게 두 번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남쪽으로 도망가는 것도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어찌 황졸하게 내려간다고 도망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했다. ‘등애가 항복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초주가 말했다. ” 지금 오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니 형세로 보아 항복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위나라가 땅을 찢어서 폐하께 봉지를 내리지 않는다면 저 초주가 낙양에 가서 옛 일을 직접 따져서라도 다투겠습니다.“  그러나 유선은 남쪽으로 도망가고 싶어서 결정을 못 내렸다. 초주가 디시 설득했다. ”옛 날 제갈량도 군사력으로 위압하여서야 겨우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같이 형편없는 상황에서 그 쪽으로 가시면 그들이 환영하고 공손히 대해 주겠습니까? 어림 한품도 없는 예기입니다.“ 유선이 드디어 항복을 결정하고 강유에게도 항복하라는 지시를 내려 보냈다. 등애가 성도성 북쪽에 다다르자 유선은 손을 뒤로 묶고 관을 끌고서(면박여친, 面縛輿櫬) 나와 항복했다.(AD263) 유비가 AD214년 촉한을 세운지 49년, 유선이 황제에 오른 지 40년 만에 망했다. 만약 황호가 무당의 권유를 믿고서 위나라 침공가능성을 묵살시키지 않았더라면 촉나라는 충분히 위나라 공격을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호는 점령군 등애의 부하에게 뇌물을 주어 일단 목숨은 건졌으나 유선을 따라 낙양으로 온 뒤에 처형되었다. 촉한이 멸망하기 직전(AD261) 오나라 황제 손휴가 중랑장 설후를 촉한에 보내어 정치를 염탐하게 하였다. 돌아온 설휴는 이렇게 보고했다. “ 군주는 아둔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고, 신하들은 자기 몸만 생각하며 죄를 면하려고만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곧은 말을 들을 수가 없었고 백성들은 파리하기가 들판의 채소와 같았습니다. 신이 듣기에 제비와 참새는 어미와 새끼들이 화목하게 짖어대는 화목의 상징이라고들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에 촉한은 썩어 문드러져 곧 무너질 줄 모르는 굴뚝과 기둥 위의 제비와 참새 같았습니다.”         

 

(6) 촉한 멸망에 대한 다른 견해

 

<삼국지>의 진수와 호삼성은 촉한의 멸망 원인을 강유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즉, 위가 촉을 정벌할 때 위나라 사마소가 말한 것처럼 촉은 작은 나라로, 영토가 좁고 백성 수가 적음에도 강유는 군대를 혹사하여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고 강유가 전쟁에서 진 뒤, 답중에서 둔전을 하며 수많은 강인(羌人)을 핍박하고 끊임없이 일을 시켜 백성이 명령을 견디지 못해 패배했다고 해석했다. 강유의 무리한 전쟁과 가혹한 착취를 패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점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실제로 촉한은 전쟁에서 패해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의논 결과 항복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항복 당시 강유는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촉한 조정의 항복 이후에도 강유의 주도로 종회 등과 함께 여러 번 쿠테타를 시도한 것을 보면 군사적 패전으로 촉한의 멸망을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황호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황호의 배후 조종하에 초주가 항복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군사적으로 점술을 믿고서 위나라의 침입을 방비하지 것과 내부적으로 위나라에 대한 항복을 재촉한 점에서 황호는 촉한 멸망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셈이다.   

 

좋아요23
퍼가기
기사입력 2016-10-13 17:39:41 최종수정 2016-11-04 10:26:10
검색어ta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명칭(회사명) : (사)국가미래연구원등록번호 : 서울, 아03286등록일자 : 2014년 8월 7일제호(신문명) : ifsPOST

발행인 : 김도훈편집인 : 이계민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마포대로 15, 현대빌딩 201호

발행연월일 : 2014년 8월 7일청소년보호책임자 : 박간

TEL. 02-715-2669 FAX. 02-706-2669 E-MAIL. ifs2010@ifs.or.kr
사업자등록번호:105-82-19095 대표(원장):김도훈 모바일 버전

Copyright ©2016 IFS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전완식 Produced by 웹스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