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2J(끝) : 정통의 길을 걸어간 전량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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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0) 왕맹과 등강(AD370)

 

업성에 주둔하는 전연 황제 모용위는 30만 대군을 모아 방어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 전진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싸울 만한가? ”

 

산기시랑 이봉은 전진의 6만 군사력을 형편없이 폄하하면서 대수롭지 않다고 평가했다. 황문시라 양침과 중서시랑 악숭은 군사의 수가 아니라 지략이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것이므로 전쟁의 승산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 사이에 왕맹과 양안이 각각 호뢰관과 상당을 함락시키자 전연은 크게 술렁거렸다. 전진의 왕맹이 동진하여 낙양과 호뢰관을 정벌하는 사이 양안은 북로를 향하여 상당을 접수하고 진양(산서성 태원)을 함락시켰다.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이 전진 군사가 도착하는 순간 전연 군사는 무너졌다.  

 

진양을 함락시킨 양안의 군사는 다시 남동진하여 왕맹의 군대와 합류한 뒤 모용평의 30만 대군이 주둔한 노천(산서성 여성)으로 향했다. 이 때 왕맹의 척후병 서성이 기한을 어겨 늦게 도착하는 잘못을 범했다. 왕맹이 군법을 위반한 서성을 죽이려하자 등강이 말리고 나섰다. 왕맹이 등강의 용서를 듣지 않자 등강은 왕맹을 공격하려 했다. 왕맹이 왜 그렇게 흥분하냐고 묻자 등강이 이렇게 대답했다.

 

  “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먼 곳 까지 와서 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가까운 곳에 적을 두고

    서로 죽이려고만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내가 그대를 공격하려 한 것이요.“

 

왕맹은 그런 등강의 용기를 높이 치하하면서 서성을 사면했다. 서성이 사면되자 등강 또한 왕맹을 몸소 찾아가 사죄했다. 왕맹이 등강의 손을 잡고 말했다.

 

  “ 내가 장군을 시험해보려고 한 것일 뿐이오.

    장군이 한낱 군장 서성에게도 그리 충성을 보이신

    나라에 대한 충성이야 어떻겠소.

    나는 다시는 전연 도적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51) 전연의 멸망(AD370년 11월)

 

전연은 망할 징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황제 모용위는 무능하고 정치는 가족혼태후가 농단하고 있었다. 군사를 장악한 대사마 모용평은 겁 많고 용렬하며 허풍에만 익숙해 있었다. 모용위가 전쟁을 독촉하자 노천(산서성 여성현) 방어에만 힘쓰던 모용평이 사신을 왕맹에게 보내 한 판 전쟁을 벌이자고 독촉해 왔다. 왕맹은 등강에 전투를 부탁했다. 등강은 전쟁 조건으로 사예교위를 달라고 했다. 사예교위란 황실과 대신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책임자 자리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공직자 비리수사처 같은 자리인 셈이다. 왕맹은 자기 능력 밖의 일이기는 하나 안정태수에 만호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시큰둥해진 등강은 물러나 자리에 눕고 일어나지 않았다. 왕맹이 마침내 사예교위를 허락하자 등강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전연을 대파시키고 약 5만군사의 목을 베었고 10만 군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모용평은 노천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업성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전진 군사는 노천에서 동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수도 업성을 포위했다. 부견은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함락을 미루고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AD370년 11월 10만 전진의 대군이 업을 둘러싸고 포진했다. 이미 황제 모용위, 태부 모용평, 모용장, 모용연 등 전연의 최고 지도부는 업성을 빠져 나간 뒤였다. 업성을 지키던 전연 산기시랑 여울은 업의 북문을 몰래 열고 전진의 군사를 받아들였다. 11월10일 부견은 전연의 궁궐로 무혈 입성했다. 부견을 수행한 모용수가 남아있는 전연의 공경대부를 심하게 질책했다.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했던 측근 고필이 다가가 화를 내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나라를 시작하는 계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몰래 귀띔했다. 십여 년 뒤 전진이 쇠약해지자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는 사람이 된다.

 

전진의 유격장군 곽경은 번개처럼 말을 몰아 도망가던 전연 황제 모용위를 체포해서 업성으로 압송했다. 모용위가 모든 전연의 관속을 대동하고 전진 부견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전연의 157개 군과 246만호, 그리고 인구 999만이 전진에 항복했다. 북중국의 절반 이상이 전진의 영토가 된 것이다. 장천석의 전량이 고장(감숙성 무위)에 있기는 했으나 칭번국이었으므로 사실상의 북중국 통일이나 마찬가지다. 왕맹에게는 사지절, 도독관중육주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기주목으로 삼아 업에 주둔시키고 모용평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었다. 등강에게는 사지절, 정로대장군,진정군후 및 안정태수, 양안에게는 박평현후, 그리고 곽경에게는 도독유주제군사를 주었다. 

 

부견은 전연의 관료들을 후히 중용했다. 황제 모용위에게 신흥후라는 작위를 주었고 황보진은 봉거도위, 이홍은 부마도위라는 직책을 주어 등용했다. 모용위는 전연이 멸망하고도 한참 뒤인 AD385년 동생 모용충의 반란에 연루되어 부견에게 죽었다. 전연 지도부를 추격하던 곽경이 용성에 다다랐을 때 모용평은 고구려로 달아났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평을 업성으로 압송시켜 버렸다. 업성에서 장안으로 끌려 온 모용평에게 부견은 급사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전연 조정에서 간첩으로 오인되어 갇혔던 양침에게는 중서저작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52) 부견이 장천석에게 보낸 편지(AD371)

 

왕맹이 5년 전 장천석을 물리칠 때(AD367년) 장천석의 장수 음거와 갑병 5천을 얻었었다. 전진의 군사가 AD371년 감숙성 남서부 취협(감숙성 서화)의 5만여 동진군사를 격파했는데 부견은 이 때 큰 공을 세운 음거와 그의 군사를 고향 돈황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는 왕맹에게 지시하여 양수와 염부를 또 다시 전량에 보내 설득시키게 하였다.

 

  “ 옛날 귀국의 선조께서 

    전조 유씨와 후조 석씨를 의지하고 번방이라고 자칭한 것은

    오로지 강하고 약함을 잘 알았기 때문이요.

    지금 전량의 영토는 그때보다 더 적고 힘도 약합니다.   

    반면 전진의 덕과 무력은 두 조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장군이 우리와의 관계를 스스로 끊은 것은 

    종묘에 복이 안 되는 일입니다.

    길흉은 자기 몸에 달려있고

    바른 점을 치는 것은 먼 곳에 있지 않으니

    의당 깊이 묘하게 계산하시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시소 6세 동안 이어온 기업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지 마시기를 바라오. “

 

장천석이 두려워 떨며 사자를 보내 사죄하고 번방을 자칭했다. 부견은 장천석을 사지절, 도독하우제군사, 표기대장군, 양주자사 및 서평공으로 인정했다.(AD371) 

 

 

 

(53) 장천석의 전진 배반(AD371)과 환온의 사망(AD373)

 

부견은 하주자사 이변을 흥진태수로 임명하고 부한에 진수시켰고 양주의 치소를 부한에서 금성(난주)로 옮겼다. 이런 조치는 장천석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장천석은 전진이 전량을 겸병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도 고장 서쪽에 단을 세우고 세 종류 짐승을 잡아서 희생제를 올렸다. 관속들을 데리고 동진의 삼공과 맹약을 하면서 종사중랑 한박을 건강에 보내 표문을 받들고 대사마 환온에게 내년 상규(천수)에서 만나자고 요청했다. 전량이 전진에게 등을 돌리고 동진과 다시 우호관계를 맺고 함께 전진을 공격하자는 것이다. 당시 AD372년 동진 조정은 간문제 사마욱이 붕어하고 후계문제로 갈등을 벌이던 참이었다. 10살 짜리 태자 사마창명이 계승할 것인가 대사마 환온이 선양을 받을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조정의 의논결과 사마요(창명)이 등극하게 되었다. 실망한 환온은 그 배후에 왕탄지와 사안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갈았지만 AD373년 7월 61세로 병사하고 말았다.  

 

 

(54) 부견의 장천석 소환명령(AD376)

 

장천석이 장옹을 살해할 때(AD361) 유숙과 양경이 큰 공훈을 세워 장천석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 장씨라는 성까지 내려주고 자신보다 몇 살 위였지만 마치 자기가 난 아들처럼 생각하며 정치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술과 여자에 빠져 전혀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게다가 세자 장대회를 내쫓고 귀첩 초씨를 좌부인으로 올리는 한편 초씨 소생의 어린 장대예를 태자로 교체했다. 백성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장천석의 사촌동생 장헌이 관을 상여위에 올려놓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런 소문을 들은 부견이 장천석에게 조서를 내렸다.

 

  “ 장천석이 번신이라고 지칭하면서도 

    신하의 도리를 순수하게 지키지 않았으니 

    사지절 무위장군 구장과 좌장군 모성과 중서령 양희와 

    보병교위 요장이 병사를 거느리고 서하에 가라. 

    상서랑 염부와 양수는 조서를 받들고 가서 

    장천석에게 가서 조정으로 들어오라고 명하라.

    명을 거역하는 즉시 군대를 보내어 토벌한다. “

 

전진의 군사는 13만 명이었다. 부견은 진주자사 구지, 하주자사 이변, 양주자사 왕통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요장의 뒤를 잇도록 했다. 7월 염부와 양수가 고장에 도착했다.

장천석은 모든 관속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 지금 입조하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만약 거역하면 전진 병사가 반드시 공격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금중녹사 석륵(후조 창업자 석륵이 아님)은 이렇게 안을 내 놓았다.

 

   “ 사랑하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시고 

     소중한 보물로 답례하시어 군사를 물리게 하신 뒤 

     천천히 계책을 세우는 것이 

     몸을 굽히고 펴는 술책(屈伸之术)아니겠습니까? ”

 

여러 사람들이 화를 냈다.

 

  “  나는 대대로 동진 조정을 섬겨왔다.

     우리의 충절이 높다는 것을 해내외가 모두 알고 존경했다.

     그런데 지금 몸을 전진에게 굽히고 복종한다면 

     수치가 조종에 닿을 것 아닌가.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게다가 하서는 천연 요새로 험준하고 지키기 쉬워 

     지난 백 여년 근심이 없이 살아오지 않았는가?.

     경계 안쪽에다 병사를 채우고 오른쪽으로 서역과 북쪽 사람을 불러 모으면

     어찌 이기지 못한다고 장담하겠는가?

 

장천석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소리쳤다.

 

  “ 고의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다.

    항복을 말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염부와 양수에게는 이렇게 물었다. 

 

  “ 그대들은 죽어서 돌아가고 싶은가,

    살아서 돌아가고 싶은가? ”

 

양수와 염부가 기개가 꺾이지 않은 채 당당하게 장천석을 꾸짖자 장천석은 그 두 사람을 기둥에 묶고 군사들로 활을 쏘게 하면서 말했다.

 

  “활을 맞추지 못하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장천석의 생모 엄씨가 나서서 울면서 말렸다.

 

  “ 전진의 주군은 한 주의 땅을 가지고 천하를 가로질러 제압하면서 

    동으로 선비(전연), 남으로 파촉, 북으로 대나라를 정복했는데

    네가 그들에게 저항한다면 몇 년이나 목숨을 연장하겠느냐?

    지금 작은 모퉁이를 가지고서 커다란 나라에 대항하면서 

    그 사신들마저 죽인다면 나라가 망하는 날은 하루도 남지 않을 것이다.“

 

장천석은 생모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염부와 양수를 죽였다. 장천석이 염부와 양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진 군대는 대대적으로 전량 영토를 침공헤 들어갔다.(AD376년8월) 양희, 요장, 왕통, 이변이 청석진(감숙성 난주시 황하서쪽 건널목)에서 황하를 건넜다. 양주를 지키던 효열장군 양제는 전진군에게 항복했다.

 

전진군 총사령관 구장은 석성진(감숙성 난주 북쪽 황하건널목)에서 천축성(감숙성 고장 아래영등 북쪽)을 뽑았고 전량장수 마건은 양비(감숙성 서북)에서 뒤로 물러나 청새(무위 동남)에 주둔하면서 사태 추이를 살펴보았다. 전량 주군 장천석은 정동장군 장거를 3만군사와 함께 보내 홍지(감숙성 천축)방어를 맡기고 스스로는 5만 군사로 금창성(감숙성 홍지령 북쪽)에 주둔했다.

 

전량의 안서장군 송호가 말했다.

 

  “ 낮에는 사람들의 일과 행동을 보고 

    밤에는 별을 보았는데

    아무리해도 전진의 군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장천석이 화가 나서 송호의 지위를 깎아 내렸다. 구장은 요장을 3천 갑병과 함께 선봉에 세웠다. 8월 23일 청새에 주둔했던 마건이 성문을 열고 전진의 요장군사를 영입하고 투항했다. 24일에는 구장과 장거가 홍지에서 전투를 벌여 장거군대가 참패했다. 장거가 말을 잃어버리자 속관 동유가 자신의 말을 건네주자 장거가 거절하면서 말했다.

 

   “ 나는 세 차례나 군대를 총괄 지휘하였고

     두 차례나 부절과 황월을 잡았으며

     여덟 차례나 금군을 거느렸고 

     열 차례나 금병을 지휘하였으니 

     총애와 신임은 극에 달하였다.

     지금 이곳이 어렵게 되었으니 내가 죽을 곳이 여긴데

     도망간다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

 

이내 장막으로 들어가 갑옷을 벗고 서쪽을 향해 머리를 땅에 여러 번 조아린 뒤 칼 위에 엎어져 자결했다.

 

8월 26일 전진 병사가 청새를 들어갔으며 장천석의 방위군 조충철을 적안(금창성=홍지령)에서 격파하고 3만8천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조충철은 여기서 전사했다. 장천석이 스스로 성 밖으로 나아가 전투를 벌였는데 그 사이 성안에서 반란 일어났다. 장천석은 수천 기병과 함께 고장으로 도주했지만 하루 뒤인 27일 전진 병사가 고장에 도착했다. 같은 날 장천석은 흰 수레와 흰 말에 면박여친하며 전진의 군영 문 밖에서 항복을 했다. 구장은 면박을 풀어주고 관을 불태웠다. 장천석을 장안으로 호송하자 전량의 모든 주, 군, 현이 전진에 항복했다. AD301년 장궤에 의해 세워진 전량이 75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AD376년8월27일) 

 

9월 전진 부견은 양희를 양주자사로 고장에 주둔시키고 장안에 붙잡혀 온 장천석을 귀의후에 봉하였으며 출병할 때 장천석을 위해 지은 장안 집에 거주시켰다. 부견은 전량의 많은 충신들을 등용시켜 활용했는데 양회 또한 전량에서 선정을 베풀어 황하 이서지역이 크게 번영하고 안정되었다. 동진의 환충(환온 동생)은 전량을 구원할 생각이었으나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철회하였다.

 

(55) 전량이 멸망한 이유

 

전량은 5호16국 중에서 가장 먼저 건국(AD301년)되기도 했지만 가장 오래(75년) 존속되기도 했다. 가장 전통 유가적 통치이념에 충실했고 가장 동진 조정에 충성을 바친 국가였다. 창업자 장궤나 그 두 아들 장식과 장무도 훌륭했지만 장궤의 손자 장준은 전량 75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군주였다. 강력한 후조가 중원을 아우르는 동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준이 통치한 22년(AD324-AD346) 동안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기반을 든든히 한 것은 확실히 장준의 지도력이었다.        

 

그러나 장준이 사망한 AD346년부터 AD376년 멸망하기까지 30년 동안 전량 조정에서는 망하는 나라가 가지고 있을 모든 조건을 갖추어 나타내게 된다.   

 

첫째는 장준의 왕위 계승자 장중화의 갑작스런 죽음이다. 장준도 비교적 단명(39세) 였지만 그의 뒤를 이은 장중화는 AD353년 11월 스물세 살에 죽었다. 열일곱 살에 즉위하여 6년 재위한 셈이다. 이 때 세자 장요령은 열 살이었으니 조정을 다스릴 나이는 아니었다.

 

둘째로는 어린 장요령을 뒤에 놓고 종실의 국정 농단이 횡행했다는 점이다. 장중화가 죽은 다음해(AD354년) 장중화의 서형 장조가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했고, 그 다음해에는 장관이 쿠테타로 장조를 몰아냈다. 장조와 장관 모두 정권을 잡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정치를 바로 잡을 능력은 전혀 없는 무뢰한들이었다. 결국 장준의 아들 장천석이 또 다시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AD363) 그 사이에 10년이 흐르면서 귀중한 시간은 허비되었고 국토는 주변의 강국들에게 뜯겨나갔다.  

 

셋째로는 전량의 주변에 강국들이 너무 많이 출몰했다. 후조(AD319-AD351)과 전연(AD337-AD370)도 강국들이었지만 전진(AD351-AD394)은 전량이 상대하기에 너무 버거운 초강대국이었다. 반면에 전량이 줄곧 충성을 바쳐온 동진 조정은 끝없는 황실알력과 권력 다툼으로 위기에 빠진 전량을 도와줄 형편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 같은 종주국일 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량의 멸망을 재촉한 것은 지도자 장천석의 판단착오였다. AD371년 부견의 편지를 받고 전진에게 귀속하기로 했던 장천석은 곧바로 생각을 바꾸어 전진을 배반하고 동진에게 귀부하기로 결정했다.(AD371) 화가 난 부견은 AD376년 장천석을 소환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장천석은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결국 이 공격으로 전량은 멸망하게 되는데 장천석은 이 때 전진에 대해 배반하면 안 되었다. 그것이 첫째 실수였고 또 부견의 소환을 거부한 것이 두 번째 치명적인 실수였다. 만약 이 때 소환에 응하였다고 하면 부견의 통치 스타일로 볼 때 장천석이 죽지도 않았고 또 전량이 망하지도 않았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부견이 비수대전(AD383)까지 6년 만 참았다면 후유증으로 전진이 멸망(AD394)하기까지 전량이 잘 버티었을 뿐만 아니라 중원에서 거의 독보적인 강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물론 배후의 전량 때문에 부견이 비수대전에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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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15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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