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변 경제학자’의 정책 체험기 <5> 개혁개방 초기의 중국을 가다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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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변 경제학자의 정책체험기’는 공직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해외유학과 산업연구원 부원장,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국제무역연구원 원장, 그리고 주OECD대사를 역임한 이경태 박사가 겪은 주요 경제정책 결정과 집행과정의 뒷얘기들을 담은 연재물이다. 주로 정부 경제정책의 수단과 방법을 연구해 제공한 탓에 본인 스스로 ‘관변 경제학자’라는 수식어를 사용했지만, 그만큼 정책 이면사(裏面史)를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정책당국자들에게도 많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앞으로 20여회에 걸쳐 우리 경제발전의 주요 분수령이 된 정책과 사건의 자초지종은 물론 시사하는 바를 엮어나가고자 한다.<편집자> ​

 

 

 한·중수교 7년 전인 1985년 UNIDO 주최 베이징(北京)세미나에 처음 중국방문

 

산업연구원에 근무하던 1985년에 중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한중수교가 1992년에 이루어 졌으니 그보다 7년 전에 미수교국에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주최로 북경에서 중국의 산업발전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는데 거기에 초청된 것이다. 

당시 우리 머리 속의 중국은 아직도 중공이었고 죽의 장막이었다.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중국에 대한 고정관념은 전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가족들은 가지 말라고 했다. 중국영토에 들어가는 즉시 한국과의 모든 통신은 깜깜이가 되고 더욱이 북한사람들이 북경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불안해했다. 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욕망이 훨씬 더 강했다.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가서 이틀 정도 기다려서 중국비자를 받았다. 여권에 기재하여 주는 것이 아니고 종이쪽지에 ‘중화인민공화국 입국허가증’이라고 적어서 주었다. 그 쪽지를 찢어 버리면 중국에 갔다 왔다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 출입국기록에는 홍콩에 갔다 온 기록만 남는 것이었다.

 

북경에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남한사람들 어떻게 살아가느냐?”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중국 국적항공기에 탑승하였다. 비행기는 낡았고 좌석이 단단히 고정이 안 되고 흔들렸으며 안전벨트도 견고하게 고정이 안 되었다. 중국영토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내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꼬리를 물고 따라 다녔다.

북경공항은 영낙없이 낡고 초라한 시골공항이었다. 입국도장도 여권에 찍지 않고 비자종이쪽지에 찍어 주었다. 마중 나온 중국 사람을 대하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긴장이 되었는데 차 속에서 그는 남한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대해서 질문을 계속하였다. 아파트는 몇 평에 사느냐, 자가용은 있느냐, 한 달 월급은 얼마나 되느냐 등등. 

 

나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사회에서 물질적 욕망을 억제당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지만 욕망이라는 인간본성은 건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경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역시 남한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햇수로는 30년 동안 공산주의치하에 있었지만 물질적 욕망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중국 사람들을 보면서 자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문호를 개방했는데 왜 외국인투자가 들어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푸념

 

시내로 들어가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리를 가득 메운 자전거행렬이었다. 칙칙한 색깔의 인민복을 입은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건물들 역시 칙칙한 회색 빛깔의 낡은 아파트가 대부분이었다. 사무실빌딩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간판역시 거의 없었다.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않다는 징표이었다. 

호텔은 외국인이 투자해서 지은 호텔이어서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음식역시 생소하지 않았다. 하기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중국음식과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던가.

 

회의에는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대부분 정부기관이나 연구소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청중들 중에는 중국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기업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 발표자들은 개혁개방정책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외국인투자자들에게 문호를 열었고 조세감면 등의 인센티브혜택도 충분히 준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문호를 활짝 열어 놓았는데 어인 연고로 외국인투자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일본기업인,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공직자 태도 문제”

 

해답의 실마리는 청중석에 있던 일본기업인으로부터 나왔다. 그 기업은 개혁개방초기에 중국에 투자하였는데 그의 불만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돈을 들여오고 공장을 짓고 종업원을 고용하고 임금을 결정하고 원자재를 구입하는 등 회사경영의 모든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청에 가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분명하고 예측 가능한 기준이 없어서 일선공무원들이 재량껏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즉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고 하는데 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니 어떻게 경영을 할 수 있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중국 측 참석자들은 열심히 듣고 메모하면서 나중에 개별적으로 찾아오면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 주겠다는 답변을 했다. 

 

중국은 사회주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한 최초의 체제이행국가

 

중국은 사회주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한 최초의 체제이행국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76년 모택동사후에 권력투쟁과정을 거쳐서 등소평이 집권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시작한데 반해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은 1991년 소련붕괴 이후에 개혁개방을 시작하였다. 러시아와 동유럽국가들의 체제이행에 대해서는 서방 경제학자들과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에서 풍부한 정책권유를 쏟아 내었다. 급진개혁(빅뱅)과 점진개혁, 개혁의 순서, 가격과 무역 및 금융자유화의 방향, 거시경제 안정화 방안 등에 대한 연구와 정책권고가 다양하게 이루어져서 어찌 보면 중구난방의 혼란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상당한 기간 동안에 중국인들이 스스로 개혁개방노선을 암중모색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갈 길을 찾아나갔다. 그러니 내가 갔던 회의에서 그러한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회의에서 받은 인상은 중국은 대외개방을 해 놓으면 외국기업들이 몰려 올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문을 열어 놓으면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기쁜 표정으로 들어온다고 잔뜩 기대하였는데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고 또 투자승인을 해 주어도 공장 짓고 물건 만들어 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실에도 좌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개혁·개방은 동전의 양면, 기업 이익 남게 해줘야 투자 들어와” 조언

 

저녁 식사 때 나는 중국의 공무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과 개방은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두 바퀴이다. 수미일관(首尾一貫)으로 같이 가야 하는 공동운명체이다. 개방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해서 이익을 남기게 해 주는 개혁이 되어야 투자가 들어온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는데 사회주의적이라는 수식어의 뜻이 무엇인가? 사유재산을 제한하는 것인가? 이익이 나도 해외송금을 제한하는 것인가? 노동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 준다는 것인가? 

 

그들의 답변인즉 중국은 공산당이 다스리는 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기업들은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때에는 그 구체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중국경제가 걸어온 길을 보면 그 뜻이 보다 분명해 진다. 중국의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에 위협이 되는 일체의 기업행위는 제한되고, 중국이 현대적 사회주의국가로 부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정부가 개입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는 “공산당 지배이념과 국가목표 달성 위한 기업활동”

 

기업이 독자적인 이윤기구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지배이념과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종속적 수단으로만 인정된다. 지금도 중국기업, 외국기업을 불문하고 정부의 눈 밖에 나면 기업의 존폐마저 위기에 처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그때 내가 가졌던 중국에 대한 선입견은 온통 부정적이었다. 우선 중국이 아니라 중공이 더욱 익숙한 이름이었다. 한국전쟁 때 압록강을 넘어서 쳐들어 왔고, 숱한 양민들을 학살했고, 문화혁명으로 역사를 파괴했고, 죽의 장막에 갇힌 어둠의 나라이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중국 사람들을 대해보니 나와 똑 같은 사람이었다. 남한사람들이 잘 산다면서 부러워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었고 ,북한에 대한 쓴 소리를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모택동체제에서 벗어난 것을 홀가분하게 여기고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회의 참석자들에게 만리장성, 자금성 등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말로만 듣던 거대한 건축물들을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만리장성에 있는 화장실이 완전 재래식이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칭화대 “1960년대에 반도체연구소 설립”…중국 반도체 굴기(崛起) 시발?

 

칭화대학교(淸華大學校)를 견학시켜 주기도 했다. 북경대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 대학인데 특히 공대(工大)가 유명하다고 했다. 공대 안에 있는 반도체연구소를 보여 주었는데 아마도 군사용으로 활용되지 않나 싶었다. 그 연구소가 1960년대에 세워 졌다는 설명을 들으니까 기초기술의 축적이 상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러한 기술들이 상업적으로 응용되면 첨단기술산업 발전도 가능하지 싶었다. 지금 중국이 반도체 굴기(崛起)에 막대한 돈을 쓰고 있다고 하는데 그 기술적 원천이 30년 전에 보았던 반도체연구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주의시절의 사회문화적인 편린(片鱗)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회의기간 중에 저녁모임에 가면 회의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젊은이들이 전부 같이 와서 식사를 하였다. 그 숫자가 회의참석자들과 비슷하게 보였다. 신분과 지위의 구별 없이 평등하게 같이 식사하러 다니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또 회의비용으로 모든 사람들이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한 이유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회의비용은 전액 외국돈이었으니까 이 설명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칭화대학의 경제학 교수와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 그는 문화대혁명 때 시골로 쫓겨 가는 하방(下放)을 당했는데 그때 겪었던 고초를 이야기하면서 진저리를 치곤했다. 한 번은 그와 같이 승용차를 타고 경제연구소에 가는데 정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당연히 기사가 내려서 얘기를 하고 문이 열리게 할 줄 알았는데 기사는 가만히 앉아 있고 교수가 내려서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이것도 사회주의의 평등인가 싶었다.

 

개혁개방 후에도 마르크스 경제학 강좌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본주의경제학 강좌 신설

 

그에게 모택동시절에는 대학에서 주로 무얼 가르쳤느냐고 물었더니 마르크스 경제학만 가르쳤다고 했다. 그러면 개혁개방이후에는 자본주의경제학을 가르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고 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북경대학의 경우에는 이전의 경제학과는 그대로 두고, 과(科)를 신설해서 자본주의경제학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학생유치와 연구비유치를 두고 두 과가 경쟁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정원을 조정하려고 해도 정원이 줄어드는 과의 저항 때문에 여의치가 않은데 중국은 현명하게 대처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용적인 해결책으로 보였다.

 

일주일간에 걸친 일정을 무사히 끝내고 다시 홍콩으로 나와서 서울로 돌아오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내 여권에는 중국을 갔다 왔다는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미수교국인 중국을 방문했다는 공식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 후 중국경제의 눈부신 발전상을 보면서 그때 개방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인투자가 미흡하다는 실망감을 표시하던 관리들이 경제특구의 운영 등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경제 노선 “대외개방과 대내개혁 함께 추진해야 성공 가능성”

 

앞으로 만약에 북한이 진정으로 경제제일주의를 채택한다면 중국의 경험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대외개방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대내개혁이 같이 가주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남한이 북한을 도와주는데 있어서도 대내개혁이 실천되어야만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수술이 없는 상태에서 남북경제공동체의 미명하에 북한을 지원해 보았자 그 혜택은 북한집권층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갈 뿐이고 오직 북한정권의 환심을 사기위한 퍼주기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ifs POST>

 

 

 <시리즈 순서>

1. 관치금융과 금융자율화

2. 중화학공업의 돈줄, 국민투자기금

3. 급진적 대외개방이냐?, 점진적 대외개방이냐?

4. 반도체산업은 민간주도로 꽃피웠다

5. 개혁·개방초기의 중국을 가다 

6. 대우조선을 파산시킬 것인가? 구제할 것인가?

7. 재벌의 업종전문화: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가 되었다 

8. 삼성에게 상용차생산을 허용할 것인가?

9. 첨단산업발전법 제정의 무산

10. 연구원노조는 과연 필요한가?

11. 한국의 에너지과소비의 원인을 규명하다

12. IMF 금융위기징후를 무시한 오만 

13. IMF 금융위기와 고금리정책

14. IMF 금융위기와 노동유연성

15. IMF 금융위기와 수출금융문제

16. IMF 금융위기와 구조조정 시시비비

17. 한국은 개발도상국인가? OECD 논의

18. 미국과 유럽에 대한 OECD 경험

19. 한국을 둘로 쪼갠 한미 FTA 협상

20. 동아시아 경제통합은 공염불인가?

21. 서울 G-20 정상회의

22. 한국의 개발경험 전수: 에티오피아

23. 좋은 일자리 만들기:  

 

※이 시리즈의 목차는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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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14 18:00:00 최종수정 2018-11-14 16: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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