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6> 법 앞에 평등한 로마법 정신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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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생활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이는 법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TV 사극을 보면 죄를 문초할 때 “네가 네 죄를 알렸다!”라며 고문한다. 죄를 짓지 않았어도 고문을 견디지 못해 대부분 없는 죄도 있다고 자백할 수밖에 없다. 

 

고대 사회에서 법을 만든다는 것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정하는 일이다. “그리스는 철학과 예술, 로마는 법”이라고 할 정도로 로마는 법을 만들고 법치주의를 실천한 좋은 모델이다. 로마의 법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발전되었을까? 

 

로마 최초의 성문법은 기원전 449년에 제정된 ‘12표법’이다. 필립 마티작은 『로마 공화정』에서 “기원전 5세기 중반에 로마의 법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성문화하기로 귀족 계급과 평민 계급이 합의했다”며 법이 제정되기까지의 과정과 내용을 소개한다. 법이 불문율로 되어 있으면 법을 말로 전하는 역할을 독점하고 있는 귀족 계급이 유리하다. 평민들의 힘이 강화되면서 평민들은 성문법의 제정을 요구했다. 법을 글로 표현하면 누구나 읽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평민의 권리가 신장되는 것은 흔히 법의 성문화를 요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당시에 로마의 지도층은 법치국가 선진국인 아테네에 시찰단을 1년간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했다. 시찰단의 보고를 토대로 ‘10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12표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을 동판에 새겨 포로 로마노 광장 한쪽에 발표했다. 이 법은 모두 12조였기 때문에 12표법이라고 불렀는데, 돈과 재산권, 가족과 상속, 공중의 행동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이 발표되었을 때 평민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귀족과 평민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법을 개정할 때 현행법을 고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법조문을 새로 제정하는 방법을 택했다. 신법은 구법에 우선하므로 신법에 어긋나는 구법은 자동적으로 효력을 상실했다. 예를 들면 12표법이 발표된 지 4년 후에 귀족과 평민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후 로마는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로마는 필요한 법을 제정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설명한 기원전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 법이다. 이 법을 통해 평민도 공화국 정부의 모든 요직에 진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이 갈등을 해소하고 구성원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법 제정은 필수적이었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법은 계속해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법을 통해 귀족과 평민은 로마 시민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겼고, 이를 기반으로 도시국가를 벗어나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로 나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귀족과 평민이 혼연일체가 되었기에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떠오를 수 있었다.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로 등장하자 이해관계가 다른 주변 동맹시와의 갈등이 생겼다. 로마 시민권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대다수의 동맹시 사람들이 로마 시민권을 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동맹시와 로마 사이에 시민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이 기원전 91년에 터진 동맹시전쟁이다. 전쟁의 의미를 수용하여 로마는 기원전 90년 법을 제정하여 이탈리아반도의 동맹시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반도는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취득하여 명실공히 통일국가가 되었다. 이탈리아반도의 모든 자유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시민법과 만민법이 융합되었다. 시민법은 민족 내의 시민 상호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이고, 만민법은 민족과 민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법이기 때문이다. 

 

프리츠 하이켈하임은 『로마사』에서 시민법과 만민법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로마법이라는 것은 로마 건국 초기에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었던 시민법과 로마가 지배했던 이민족에 적용되었던 만민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성문화된 법은 국가에 대한 신뢰를 높여 로마 시민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함으로써 세계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가 제국을 건설했더라도 법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주를 관리할 때 로마법이 공통항이 되어 소통할 수 있었기에 로마가 제국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가 기원전에 법을 제정하고, 법의 이름은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고, 변호사가 있어서 법정에서 변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 법을 존중하는 사회가 형성되었기에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고 문화가 다른 나라에도 전파될 수 있었다. 

 

로마가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전환한 뒤에는 로마법은 더욱 발전했다. 세계법이 되었다. 3세기 무렵까지 로마에는 위대한 법학자가 많이 탄생하여 법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서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동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2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로마법대전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그 후 로마법은 중세 유럽으로 계승되어 각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 시민법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법은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법학자인 예링은 “중세는 로마법의 계승에 의해 법을 통일했다”며 로마법이 후세에 미친 영향력을 평가했다. 

 

로마법 역시 로마인의 개방성의 산물이다. 법이 없으면 민족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공통의 잣대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마인은 감정에만 치우치지 않고 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민의식이 체화될 수 있었다. 로마의 법체계는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어 공통의 언어로서 다양성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몸젠은 『몸젠의 로마사』에서 로마 공동체를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 시민은 자유를 누리는 한 법에 복종할 줄 알았으며, 모든 미신을 단호히 거부했다. 법 앞에서, 그리고 그들 상호간에 무조건 평등이 보장되었으며, 외국에 대해서도 관대하고 개방적이었다. 이런 국가 체계는 만들어지거나 차용된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 가운데 그들과 함께 성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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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2-01 17: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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