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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마음이다”

  유물론은 우리 시대의 상식이지만 그 대칭선상에 있는 ‘유심론’의 세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유심론은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마음뿐’이라는 주장이다. 물질 또는 물질적인 것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 자체로 정신적인 것이거나 ‘마음’에 의존해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책상, 스텐드, 컴퓨터 모니터 등이 내게 보인다. 그 보이는 것들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그것들은 물론 물질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 생각은 상식에 기초한다. 

 

  철학은 상식을 의심하는데서 시작한다고 했다. 그렇다. 상식에 물음표를 찍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보이는 대상이 정말 물질인가? 그것이 물질임을 어찌 아는가? 물질임을 아는 것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그렇다면 정신에 포착되지 않는 물질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물질이 물질일 수 있는 까닭은 정신에 포착되기 때문 아닌가? 결국 물질인 대상들 모두 정신의 대상이고 정신에 의존한다는 철학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는 유심론의 대표적이며 가장 단순한 논변 중 하나이다. 유심론은 이보다 더 세련된 논리로 무장하고 다양한 논변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모두들 이 시대를 사는 상식인으로서 이런 비상식적인 생각에 반박하고 싶어 목구멍이 간질간질 하리라. 하지만 논리를 정연히 갖춰 대응하기란 결코 녹록치 않다. 우리가 비상식으로 여기는 이런 생각들이 상식의 주류를 이루던 때가 그리 오랜 과거가 아니다.

 

  이런 사상들의 역사는 유구하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는 믿음이었다. 다시 말해 유심론은 동서고금에 가장 기본적 믿음의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철학의 역사에서도 커다란 줄기를 형성해왔다.

  가장 최근에는 우리가 ‘독일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피테, 쉘링, 헤겔의 철학이 두드러진다. ‘관념론’은 인식론적 개념이지만, 형이상학의 ‘유심론’과 거의 대체 가능한 말이다. 서양철학의 거대한 한 줄기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도 관념론에 속하며 부분적으로 유심론적 경향을 보인다. 정신을 중시하는 철학의 기본적 성향이다.

 

  “뭐시 중헌 디?”

  플라톤은 보이는 세계를 가짜라고 하고, 진짜는 정신까지를 초월한 다른 세계에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가짜라고까지 할 순 없어도 세계가 세계인 까닭은 세계의 질료에 생명 원리인 형상이 더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적어도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 두 경향은 이후 철학사를 형성하는 두 줄기가 된다. 백두선생, 화이트헤드가 그랬던가?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적인가, 정신적인가? 라는 질문은 어쩌면 지나치게 단순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플라톤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다뤄온 존재의 문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정신은 무엇이며 어떤 구조를 가졌는가?

  둘째, 정신 바깥의 세계, 즉 물체는 무엇인가? (이 외부세계에는 내 몸과 남의 몸까지 포함된다.)

  셋째, 정신과 외부세계는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철학의 효시가 된 자연철학은 두 번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세계가 무엇으로 돼 있는지를 물었다. 소크라테스의 등장으로 철학은 첫 번째 물음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물었다. “우들이 사는 시상에 뭐시 중헌 디?” (영화 ‘곡성’ 모드로) 그렇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고, 진리란 사람이 정하는 것이거나,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것 따위는 사람이 알 수 없다고 외치는 소피스트들이 우글거리는 아테네에서, 소트라테스는 우리의 삶을 삶답게 하는 가치의 존재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그의 이런 생각을 존재 그 자체를 해명하는데까지 확장했다.

  본격적 의미에서 세 번째 질문은 물론 근대 이후 인식론의 것이다. 인식론은 개념의 문제를 세심하게 다룬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에 있는 것인지, 정신을 넘어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만 있는 것인지, 등등을. 

 

 

  마음 밖의 세상

  마음은 대상은 인식한다. 상식은 그 대상을 존재라고 여긴다. 존재? 있는 것, 있음? 인간은 수천 년 전부터 그것에 관심을 가져왔다. 도대체 있는 건 뭐고 없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밖에 ‘무엇’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서양철학 철학 최초의 물음은, “만물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였다. 자연철학은 그렇게 있는 것의 근원을 물었다. 최초의 물음은 아직도 계속된다. 자연철학자 중 한 분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 즉 아톰이라고 답변했는데, 이 답은 매우 근대적이다. 자연과학자들의 결론이 이와 근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가 더욱 사변적이고 추상적이 되면서 답은 논리성을 갖추게 된다. 

  드디어 형이상학이 시작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는 ‘있음 그 자체’이다. ‘유’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라는 말 자체가 ‘있다’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는 변하지 않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있음 자체’란 ‘말장난’이라고 일축하고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라고 말한다. 그대로 있는 무엇이란 사람이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강’은 정신 속에만 있어서 변하지 않는 무엇일지 모르지만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 (그가 모든 것이 변화하고, 그 변화에는 법칙인 로고스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주역의 사고 비슷하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그에게 존재란 우리에게 인식되는 그대로이다. 그런 철학적 입장을 (존재에 대한) ‘현상론’이라고 하고 그에 대비되는 입장을 ‘실제론’이라고 한다. 테라바다 불교는 어떤 입장일까? 파르메니데스보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가깝다. 존재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며, 그 너머에 변하지 않는 무엇은 없다. 그래서 존재는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이 점에서 헤라 씨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안, 이, 비, 설, 신, 의가 그 여섯이다. 외부세계란 감각기관이 그것에 주어지는 여섯 가지 조건과 만나 이루어질 뿐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 여섯 조건은 색, 성, 향, 미, 촉, 법이다. 전자를 안의 감각장소, 후자를 밖의 감각장소라고 한다. 합해서 12개의 감각장소라고 한다. 세상은 딱 그것, 12개의 감각장소이다. 그 밖의 세상이란 없다.

  왜 ‘장소’(ayatana)인가? 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을 염두에 두면 설명이 쉬워질 듯하다. 만남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아야따나는 ‘곳’을 뜻하는 ‘處’로, 또는 ‘들어온다’는 뜻의 ‘入’으로 번역되었다. (12연기 중 ‘6입’은 장소의 뜻과 같다.)

  테라바다의 ‘존재’는 그래서 사람의 감각기관과 그것에 주어지는 것, 12처 딱 그것이다. ‘세상’이라는 개념을 해체하면 이렇게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이다.

 

 

  “Esse ist Percipi"

  제목은 “존재란 지각되는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이면서 유심론자였던 버클리의 유명한 명제다. 버클리는 외부세계란 마음에 들어온 지각의 묶음일 뿐이다. 상식과 매우 동떨어진 주장이다.

  상식론자들의 비판이 바로 이어졌다. “뜰 앞 나무가 내가 안 볼 땐 존재하지 않는가?” 버클리는 대답한다. “다른 사람의 지각 속에 있지 않냐?” “그럼,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곳엔 나무도 자라지 않나?” “그건 신의 지각 속에 있다.” 어딘가 좀 옹색해 보인다. 하지만 버클리의 철학은 논리적으로는 매우 설득력 있어서 후대 철학자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버클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주관적 관점을 진지하게 취급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주관성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반박할 수 없게 논증했다. 그는 유심론의 아버지이다.”

  상식은 자주 사람을 속인다. 상식 자체가 시대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속성이 무상, 고, 무아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상식적인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이처럼 살 맛 나는 세상’이 고통스럽다니?”

  “세상 모든 것이 흘러가도 사랑은 영원하지 않은가?”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를 없다는 가르침은 이해할 수 없다!”

  상식인들은 그렇게 말한다. 뭔가 ‘과학적’으로 보여줘야 믿는다. 그런데, ‘과학’이 보여주는 많은 것이 상식과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아는가?

  다시 버클리로 돌아가 보자. 테라바다는 안의 6처와 밖의 6처가 만나 12처가 형성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알음알이(識)가 생겨난다. 눈과 형색이 만나면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귀와 소리가 만나면 귀의 알음알이(耳識)가 (나머지 넷은 생략),... 생겨난다. 六識이 그것이다.  12처와 6식을 합해서 18界라고 한다. ‘계(dhatu)’는 ‘요소’라는 뜻이다. 상식인들이 말하는 ‘존재’의 18가지 요소이다.

  이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이 ‘識’이 바로 테라바다에서 말하는 ‘마음’이다. 붓다는 12처에 덧붙여 왜 식을 얘기했을까? ‘마음’이란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마음은 12처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결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마음 역시 붓다의 기본적 가르침인 연기의 일부일 뿐이다. 연기는 조건이 되면 발생하는 법칙이다.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은 연기의 법칙이 보여주는 현상이다. 마음도 그런 세상의 요소라는 가르침이다. 

 

 

  지각의 묶음(Bundle of Perception)

  세계에 대한 버클리의 견해는 테라바다의 외부존재에 대한 그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버클리는 정신을 실체화했고 정신의 절대성을 신에게서 찾으려했다.(그는 성공회 주교였다.) 

  버클리의 논리를 더 철저하게 밀고나간 경험주의자가 데이비드 흄이다. 스코틀란드 사람 흄은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12살에 에든버러 대학에 조기 입학해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십대 시절을 온통 읽고 쓰는데 보냈던 흄은 신경쇠약을 앓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약관 26의 나이에 낸 첫 철학 저서,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철학사에서 매우 주목받는 저술이다. 이 책에서 흄은 인간의 심리현상을 경험주의에 입각해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인간의 심리현상은 ‘관념’에 대한 해명에서 시작되는데, 관념은 정신에 주어지는 ‘인상’에서 비롯된다. 인상과 관념의 관계는 지각인데, 이는 필연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습관에 의한 우연적 관계이다.

 

  흄은 매우 지성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모든 이론이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형이상학에 대한 경험주의의 불신은 흄에 와서 극에 이른다. 이런 흄의 정신은 20세기 영미철학으로 이어진다. ‘논리실증주의’, ‘논리적 원자주의’ 등의 영미 분석철학은 흄에서 본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 과학철학의 난제인 이른바 ‘귀납의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인물도 바로 흄이다. 칸트는 흄의 회의주의적 철학에서 과학과 형이상학을 건져내기 위해 두 개의 비판서를 썼지만, 경험주의적 전통에서는 아직도 칸트보다는 흄의 철학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로크나 버클리가 실체로 인정한 정신은 흄에게는 이렇게 우연적으로 형성된 ‘지각의 묶음(bundle of perception)'일 뿐이다. 마음 또는 정신은 실체가 아니라 그런 지각묶음을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마음에 대한 테라바다 부디즘의 견해는 흄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마음은 세상을 형성하는 18가지 요소의 일부일 뿐이다. 18계는 ‘모든 법들이 중생이니 영혼이니 하는 실체가 없고 공함을 드러내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18계의 가르침은 마음, 혹은 알음알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안의 감각장소와 밖의 감각장소가 만나서 생기는 조건발생이요, 찰나적인 흐름일 뿐임을 보여준다.’ (각묵, ‘초기불교입문’에 인용된 샹윳따 니까야 주석서) 이런 테라바다 부디즘의 견해에 따른다면, 대상은 마음 밖에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마음 그것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찰나적 흐름일 테니까.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마치 지속하는 실체인 것처럼 보인다. 불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심상속(心相續)’으로 개념화해서 설명한다. 마음이 흐르는 강물의 물방울 하나하나라면 심상속은 ‘강’에 비유된다. 어제의 강은 오늘의 강이지만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강물이 아니다. 강은 늘 흐른다. 개념도 아니고 실체도 아니다. 불교가 유심론이 아닌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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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09 17: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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