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J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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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8) 구사일생한 이밀의 재기(AD616)

 

뇌물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이밀은 산동성 능현 도적 학효덕에게 갔지만 대접을 못 받자 다시 산동성 제남시 수령 왕박에게로 갔다가 박대를 당하였다. 이밀은 나무뿌리로 연명하며 하남 회양에 이르러 이름을 바꾸고 몸을 숨기면서 아동들을 가르쳤지만 금방 신분이 탄로나 다시 도망 길에 올라 한마성 기현에 있는 매부 구군명에게로 갔다. 구군명 또한 위험을 느껴 이밀을 협객 왕수재에게 맡겼는데 왕수재는 이밀의 재주를 보고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구군명의 당질 구회의는 이밀의 존재를 신고했고 체포령이 내려졌는데 이밀은 피했지만 구군명과 왕수재는 모두 잡혀 죽었다.

 

당시 적양이라는 자는 동군(하남 활현) 법조를 하다가 참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리 황군한은 모습이나 재주가 출중한 것을 보고 적양을 풀어 주었다. 적양이 고마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황군한은 큰 소리로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  본래 공이 백성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풀어준 것이요.

   어찌 아녀자 같이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고 있소.

   얼른 피하여 장차 큰일을 하시고 나는 걱정할 것이 못 되오.“    

  

이렇게 해서 빠져 나온 적양은 할현 부근에서 무리를 모아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의리더십에 감동받은 선웅신, 서세적이 동참하면서 만 명이 넘는 강력한 집단이 되었다. 당시  왕당인, 왕백당, 주문거, 이공일 등도 나름대로 세력을 규합하여 각기 도적이 되었는데 이밀은 이들 사이를 오가며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수나라 양씨는 몰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후계는 적양이 분명하다고 설파했다. 이밀의 추천에 따라 다들 적양 밑으로 들어갔다. 적양도 이밀의 능력을 중시하여 가까이 하면서 중요한 자문을 받았다. 이밀은 속으로 이씨가 수씨를 이어받는다는 당시의 참설을 믿었다. 자신이 이씨가 아닌가. 그러나 현재로는 적양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밀의 계획은 이렇다. 무엇보다 먼저 형양(낙양 서북쪽)을 점령한 뒤 거기에 곡식을 충분히 비축하고 군대를 기른 다음에 동서남북 팔방으로 나아가 정주, 개봉 등지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양은 그러나 형양태수 장수타에게 여러 번 패전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이밀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장수타를 패사시켰다. 적양은 고마운 마음에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절반을 이밀에게 주면서 자신은 동쪽 활현, 그리고 이밀은 서쪽을 맡게 하였다. 물론 적양이 후회하고 다시 군대를 합치긴 했어도 적양과 이밀은 황하강 유역 핵심 하남지역인 형양과 활현 일대를 장악하면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발돋움하였다.(AD616) 

 

 

(49) 곳곳의 반란과 간신 우세기의 은폐(AD616-AD617)

 

강서성 파양호 부근에서는 도적 조사걸이 일어났다. 그는 임사홍을 대장군을 썼는데 관군과의 싸움에서 조사걸이 전사하자 임사홍이 두목이 되어 관군을 철저히 괴멸하면서 10만여 군사로 남창지역을 장악하고서 초나라를 세워 황제를 자칭했다. 두건덕은 장금침과 양선회 잔당무리를 규합하여 하북성 남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했고 수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속속 두건덕 밑으로 들어왔다. 

 

내사시랑 우세기는 양광이 도적출현이나 패전소식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그런 소식을 모두 차단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 쥐가 훔치고

  개가 도적질하는 것을

  군현에서 마땅히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개의하실 것 없습니다.“

 

도적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수나라 영토를 갉아 먹었으나 양광은 전혀 알지 못했다. 태복경 양의신이 장금침 도적무리를 수십만 격파하고 나서 양광에게 전공을 설명하자 양광이 깜짝 놀라면서 도적 숫자가 어찌 그리 많으냐고 물었다. 우세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  잔챙이 도적입니다.

   수적으로는 많아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는 무리들입니다.

   양의신 장군이 이겼으나 거느리는 병사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당장 해체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혹시 무슨 불궤한 일을 일으킬까봐 양의신 부대를 즉시 해체해 버렸다. 도적들은 다시 번창하였다. 다치도 않은 조정의 처분에 격분한 치서시어사 위운기가 상소문을 올렸다.

 

 

 

“ 우세기와 배온은 가장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방의 변고를 눌러 묵살하고 상주하지 않았습니다. 

  도적의 수를 깎고 군사발동을 줄이거나 막았습니다.

  그러니 전쟁마다 패하였고 도적의 숫자는 날로 늘어났습니다.

  청컨대 서둘러 유사에게 넘겨 단죄해야 합니다.“ 

 

위운기는 대신을 꾸짖고 조정을 헐뜯었다는 죄목으로 오히려 강등되었다.

 

안휘성 역양에서는 두복위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산동성 동평(운성)과 낭야(임기)에는 서원랑, 삭방에는 양사도, 삭주에는 유무주, 유림에는 곽자화, 강도에는 이자통, 오지역은 심법흥, 강릉에는 소선, 창오에는 녕장진, 천수에는 설거, 업에는 우문화급 등이 웅거하고 있었다. 이 때 이연과 이세민은 장안과 태원 등 관중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50) 이밀의 하남지역 장악(AD617)

 

이밀은 주군 적양에게 낙양을 선제공격하여 장악하자고 제안했다. 적양은 이밀의 당돌함에 놀랐다. 자신은 노복에 불과하여 도저히 꿈도 못 꿀 일을 이밀은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적양은 군사주도권을 이밀에게 주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이밀과 적양의 군대는 하남성 등봉(개봉)을 나와 서쪽으로 진군하여 형양, 공현 낙구창 등을 함락시키고 뺏은 재물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양견과 양광이 등용하지 않은 조군언을 영입했다.(AD617년 2월9일) 적양은 이밀의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이밀을 주군으로 모시고 다른 도적들과 같이 황제를 칭하지 않고 위(魏)공으로 불렀다.  이 때 이밀의 수하에는 서세적(나중에 당에서 이세적이란 이름으로 크게 떨침), 선웅신, 방언초, 병원진, 양덕방, 정덕도, 조군언 같은 인재를 영입했다. 황제라고 참칭하지 않은데다가 유능한 인재를 속속 영입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밀에게 투항하는 군사들이 속속 늘어났다. 

 

반면에 수나라 조정에서는 국토가 찢겨 나감에 따라 세수입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당연히 관직과 형벌을 팔아서 재정에 충당할 지경까지 되었다. 무능하고 아첨하는 간신 우세기와 그에게 붙은 교활한 봉덕이 같은 권신들 때문에 조정정치는 더욱 타락하고 부패해졌다. 사마광은 수의 정치가 무너진 것은 봉덕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51) 이세민의 의병봉기와 돌궐 연대(AD617년6월)

 

이세민(AD599-AD649)은 수나라가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을 보고 천하를 안정시킬 생각을 품었다. 원래 총명하고 결단력이 있는데다가 판단능력이 뛰어났고 또 끈질기게 포섬하고 설득하면서 인재를 영입했다. 특히 두종과 같이 자신을 좋지 않게 평가하는 사람조차 마음을 터 진심으로 대함으로써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세민의 아버지 이연은 AD615년 하동지역을 방어하는 총사령관인 하동토포사가 되어 진양(태원)에 진주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을 피해 진양으로 피난해 오면서 이연, 이세민부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세민의 동지 진양현령 유문정, 장손순덕, 배적, 유홍기 등은 줄기차게 이세민에게 의병을 일으키기를 권하면서 군사를 모았지만 이연은 내키지 않아 몇 번씩이나 망서렸다. 이세민의 거듭된 설득에 이연도 결국 동의하고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바로 세우기로 결심하였다.(AD617) 유문정은 돌궐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정확한 정세판단이었다. 당시이연-이세민 세력은 적대세력에게 온통 사방으로 포위된 셈이었다. 동으로는 두건덕과 고개도, 남으로 이밀, 북으로는 유무주, 서로는 양사도가 독자세력으로 활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후를 튼튼히 받쳐주는 후원세력이 있어야했다.

이연은 몸을 낮추는 말과 후한 예물을 바쳐서(卑辭厚禮) 환심을 사는 편지를 돌궐의 시필가한에게 보냈다.

 

“ 크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돌궐과 화친하기를 바랍니다.“ 

 

시필가한은 기쁜 마음으로 화답해 왔다.

 

“ 당공이 천자가 된다면

  더 큰 더위가 있더라도 군사와 말을 보내 응원하겠소.“

 

이연의 오른팔 배적은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을 처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쓰러지는 수나라를 바로 잡는 것으로 해야 온 나라가 호응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배적의 건의에 따라 실덕하고 포악한 천자 양광을 태상황으로 물러 앉히고 그 아들 양유를 황제로 모심으로써 수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병사를 모두 ‘의사(義士)’ 라고 칭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연이 대장군이 되고, 배적은 장사, 유문정은 사마, 이건성(이연의 장자)은 좌영군대도독, 이세민은 우영군대도독, 시소는 우영군부장사로 임명했다.(AD617년 6월) 이연-이세민의 의군 3만 명은 AD617년 7월 4일 태원을 출발, 남쪽 동관으로 향했다. 유문정은 돌궐로 들어가 장안이 함락되면 모든 보물을 준다는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허락받았다. 

 

 

(52) 이연-이세민과 이밀의 맹약(AD617년)

 

이석(산서성 여양)에 도달한 이연(AD566-AD626)은 이밀(AD582–AD619)에게 편지를 보내 수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동참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이밀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낙양을 장악한 뒤 서쪽으로 장안을 공략하려고 하고 있었다. 군사력만으로 보면 이밀이 훨씬 강했다. 당연히 이밀은 이연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하남 심양에서 만나 서로 맹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연은 관중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오른쪽 이밀과 친분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수적이었다. 그래야 오른쪽으로부터의 협공위험을 차단하면서 오로지 관중경략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또한 강도에 있는 수나라 양제의 군사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잘 하면 이밀과 수나라 군대가 서로 싸우면서 휼방지세(鷸蚌之勢,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싸우다가 어부에게 잡히는 형국)를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이가 열여섯이나 위였지만 이연은 돌궐에게 했던 것처럼 몰을 매우 낮추는 편지를 이밀에게 보냈다. 이밀을 위대한 아우이자 용이라고 비유하면서 자신은 용의 비늘과 날개에 올라붙은 사람으로 낮추었다. 세상을 편안하게 다스릴 사람은 이밀이니 그저 당공(唐公) 정도의 봉록만 주면 충분하다고 안심시켰다. 이밀은 흡족했다. 

 

“ 당공의 추대를 받았으니

  이제 천하평정은 말할 거리도 되지 않소.“  

 

배적은 이연에게 태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오래 비가 내려 군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데다가 돌궐과 유무자 연합하여 태원을 습격할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온 것이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이세민이 강력하게 반대하며 나섰다.

 

“ 대의명분을 내세워 출병하였고,  

  몸을 돌보지 않고 억조창생을 구하자고 했으니

  응당 함양(장안 서쪽)으로 들어가 천하를 호령해야 합니다.

  작은 적을 만났다고 군사를 돌려 버리면

  의리를 좇던 무리들이 하루아침에 흩어지고 말 것 아닙니까.

  돌아가서 태원을 지킨 들 작은 도적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자신과 가문을 보전하겟습니까?“

 

큰 형 이건성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군사를 돌리기로 결정하고 잠을 청했다. 이세민은 이연의 군영 밖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자다가 깨어난 이연이 연유를 물었다. 이세민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 지금까지 군사는 대의를 세우고 나왔습니다. 

  나가면 이기고 물러나면 흩어지는 것입니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이연이 물었다.

 

“ 군대가 떠나지 않았느냐?”

 

이세민이 대답했다.

 

 “ 제가 지휘하는 우군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좌군도 떠나긴 했지만 멀리가지 못했을 겁니다.“

 

이연이 이렇게 말했다.

 

“ 모든 것의 성패는 너에게 달려 있으니 네가 알아서 시행하도록 하라.“(AD617년 7월)

 

이연-이세연의 군대는 이석을 떠나 남쪽 곽주를 거쳐 임분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분하를 따라 서쪽으로 꺾어 황하포구 하진까지 내려왔다. 황하를 건너 바로 동관으로 내려 갈 것인가 아니면 더 남쪽으로 내려와 하동(산서성 영제)을 장악할 것인가 고민되었다. 갑론을박 끝에 하동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 내렸다. 그러나 하동 호조 임괴의 간곡한 제안에 따라 이연의 당군은 양산(섬서 한성)에서 황하를 건넜다. 한성은 하진보다 조금 남쪽에 있다. 그리고 당시 관중 최대 도적 손화를 설득하여 투항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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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07 1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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