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I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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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2) 고구려 토벌 준비(AD610)

 

 

당시 고구려 영양왕은 돌궐(동돌궐) 계민가한에게 사신을 보내며 통교하면서도 수나라에 대한 조공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황문시랑 배구가 양광에게 계민가한에게 압력을 넣어서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한 조공을 더 잘하도록 위협하고 재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양광도 그렇게 생각해서 고구려에 칙서를 보내도록 했다.(AD607년) 그러나 영양왕은 칙서를 받고도 수나라에 조공을 바쳐오지 않았다. AD610년 양광은 고구려 정벌을 결심했다. 양광의 전쟁 명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는 보잘것없는 나라이면서 공손하지 않고, 둘째, 수나라에 조회나 조공에 참가하지도 않으며, 셋째,  수나라 역도들을 받아들였고 변경을 괴롭혔으며, 넷째, 요서를 공격하면서, 다섯째, 다른 나라들이 수나라에 조공 드는 것을 방해하고 여섯째, 고구려의 법령이 가혹하고 지도자는 부패하다는 것이었다. 양광은 전국 부자들에게 부담을 지워 군마를 사들이고 병기를 준비했다. 정밀하게 만들지 않는 자는 목을 베었다. 약 일 년여 준비를 거쳐 AD611년 2월 11일 양광은 고구려 정벌의 조서를 내렸다. 실패한 제1차 고구려 정벌(AD598)이후 12년 만의 재침이었다. 직접 출정한 양광은 4월 전군은 물론 모든 군량을 탁군(북경)에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강남에서 북으로 곡식을 운반하는 사람만 6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고구려 정벌군의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43) 도적떼들의 창궐(AD611)

 

양광의 제2차 고구려정벌계획은 안으로부터 무너졌다. 길이 멀고 험한데다가 장마로 질병까지 발생하면서 병사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게다가 과도한 세금과 요역부담으로 절반 이상의 군인들이 도망쳐버렸다. 이들은 전국각지에서 도적으로 활개 치면서 나라를 망가뜨렸다. 산동 추평지역 왕박, 산동 능현의 유패도, 하북지역의 두건덕, 하북 임서지역의 장금칭, 하북 청하지역의 고사달이 대표적인 산적들이다. 

 

 

(44) 제2차 수의 고구려 정벌(AD612) 실패 

 

전국의 군사들이 탁군(북경)으로 집결했다. 약 113만 3천 8백 명이었지만 불려서 200만 대군이라고 불렀다. 군량 수송에는 그 두 배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했다. 좌익으로 12군, 우익으로 12군, 전체 24개 군으로 구성된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해 들어왔다. 매 군은 기병 40대(4천명), 보병 80대(8천명)으로 구성되었다. AD612년 1월3일 1군이 제일 먼저 탁군을 출발했다. 하루 한 군씩 40일에 걸쳐 전군이 차례로 탁군을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 군과 군 사이의 거리는 40리(16KM)를 유지했다. 전군의 행렬길이가 960리(380KM)였다고 했다.

 

불길한 것은 내사령 원수, 관덕왕 양웅이 죽었고 병부상서 단문진은 중병에 걸렸다는 점이다. 단문진은 급히 표문을 써서 양광에게 말했다.

 

“ 생각지도 못한 곳(평양 같음)을 신속하게 공격하여 

  평양을 깨뜨리십시오. 나머지 성들을 저절로 넘어오게 됩니다.   

  만약 늦어져 깊이 들어가게 되면

  말갈이 배후를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지연하고 의심하며 소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단문진은 얼마 있지 않아서 그 해 3월 죽었다. 양광의 대군은 요하에서 고구려 방어군과 마주쳤다. 고구려군은 요하 주변의 여러 성들에 나뉘어 전력으로 방어했으므로 함락이 쉽지 않았다. 수나라 대군은 요동성(요녕성 요양시)을 포위했다. 우익위장군 내호아는 장강과 회수 지역의 수천 척 배와 수군을 이끌고 평양까지 진격했으나 매복에 걸려 대패했다. 

 

좌익 12군의 하나인 부여도 사령관 우문술은 다른 8개도 사령관과 함께 수십만 대군으로 금주와 요중을 출발하여 평양을 향해 진격했다.(6월 중순) 병사 한 사람에게 필요한 군장과 함께 100일 분 양식 지우니 부피가 3석(약 50리터)이나 되니 군사들이 절반 이상을 버리고 행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양곡을 버리면 목을 벤다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우문술의 9개 군이 압록수에 도달했다. 을지문덕은 우문술 군영에 직접 가서 항복한다고 말했다. 양광은 우중문에게 밀지를 내려 반드시 영양왕과 을지문덕을 반드시 생포하라고 했었다. 낙랑군 사령관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체포하려하자 상서우승 위무사 유사룡이 굳게 말려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곧 후회하고 따라 잡으려 했으나 이미 을지문덕은 강을 건너고 말았다.   

 

우문술은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올 생각이었고 우중문은 돌격대를 선발하여 을지문덕을 추격하자고 했다. 당시 모든 전쟁전략은 양광이 우중문에게서 나오도록 지시했었다. 우문술이 우중문의 계획을 거부할 명분도 권위도 없었다. 우문술이 마지못해 압록수를 건너 을지문덕을 쫓았다. 을지문덕은 계속 퇴각하며 피로한 수군을 유인했다. 살수(청천강)를 건넌 뒤 진지를 쌓고는 우문술에게 항복하고 곧 영양왕과 함께 조현하겠으니 군사를 뒤로 물리라고 했다. 이 때 유명한 편지를 썼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與隋將于仲文詩>‘다. 

 

     신비로운 계책은 하늘의 흐름을 꿰뚫고           神策究天文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통달했소.               妙算窮地理

     싸움에서 이긴 공 이미 높으니                   戰勝功旣高

     그만 만족하고 그치는 게 어떠하시오.             知足願云止

 

우문술은 군사들이 지치고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가 없음을 알았다. 을지문덕의 항복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전력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살수에서 압록수 까지 450리를 왔다고 하니 얼마나 절박하게 도망갔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수나라 군사를 쫓아가며 공격했다. 수나라 아홉 개 군 30만 5천 명이 압록수를 건넜으나 7월 24일 요동까지 돌아 왔을 때에는 2천 7백 명뿐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7월 25일 양광은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회군해서 9월 13일에 낙양에 당도했다.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나중에 반란을 일으킴)이 양광의 딸 남양공주의 남편이므로 차마 우문술을 죽이지는 못했다. 우문술, 우중문 등 여러 참전 장수들을 모두 폐서인시키고 다만 을지문덕을 놓아 준 유사룡의 목만 베었다. 제장들이 우중문의 전략 실패를 문책해야한다고 강력 요구하므로 그를 가두었으나 근심과 화병으로 건강이 나빠지자 풀어주었고 곧 집에서 죽었다.

 

 

(45) 제3차 고구려정벌과 양현감의 반란(AD613)  

 

가을에 낙양으로 돌아온 양광은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12년 전 아버지 양견도 실패한 것을 보면 고구려 정벌이 녹녹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AD613년 정월부터 다시 용맹한 군사와 군량미를 탁군에 모으기 시작했다. 요동의 성들도 다시 수축했다. 양광의 이런 전쟁준비에 대해 좌광록대부 곽영은 반대하고 나섰다. 융적의 오만함은 신하들이 해결할 일이고 천균의 강한 화살을 쥐를 잡기위해 쏘지 않으니 황제가 나설 일은 아니라는 예기였다. 양광이 들을 리가 만무했다. 양광은 3월 4일 직접 요동에 행차했다. 4월 27일에는 요하를 건넜다. 우문술과 양의신을 평양으로 보냈다. 왕인공은 부여(길림성 사평)로 향했다. 

 

이미 전국은 도적들이 구름처럼 발호하고 있었다. 대부분 도적은 수 천, 수 만의 무리였지만 많은 곳은 도적의 수가 10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 양현감은 당시 예부상서였다. 날쌔고 용맹하였으며 글 또한 깊이 익혔으므로 문무 모두 출중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여러 사람과 교류가 돈독했고 특히 양광에게 견제를 받아 쉬고 있는 이밀과 교분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수 문제 때부터 조정의 실력자 양소(素)다. 양소가 양견 때부터 공과 지위로 드러났으므로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며 황제를 무시함이 심했지만 양광 또한 속으로만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양소가 죽게 되자 양광은 드러내고 말했다.

 

“ 죽든 말든 그의 집안 족속들은 족멸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양현감은 중대한 각오를 한다. 양광의 증오가 가볍지 않은 데다가 조정대신들은 모두 아버지 양소가 임명한 사람들이어서 한 편 일테고 또 양광의 무분별한 전쟁으로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으니 반란을 일으켜도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양현감은 일단 형제들의 동의를 얻고 나서 양광의 정벌군에 자원했다. 정벌군을 가지고서 전장에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양현감의 동생들은 전방에 배치되었고 양현감은 하남 준현의 군량 운송을 맡았다. 양현감은 고의로 군량 운반을 지연시켰다. 양광이 늦어짐을 꾸짖자 도적의 방해 때문이라고 둘러대면서 전장에 나가있는 동생을 하남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나호아가 반란을 일으켜 토벌해야 한다는 핑계로 군사를 하남에서 돌려 동도(낙양)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이밀을 모사로 중용했다. 이밀은 먼저 양광의 목을 조인 다음, 관중(장안지역)을 공략하고 나서 낙양을 치라고 권했다. 그러나 양현감은 이밀의 말을 듣지 않고가까운 낙양을 먼저 공격했다(6월14일). 그러나 수나라 장수 번자개는 훌륭히 양현감을 방어했다. 양광도 반란 소식을 듣고 고구려 정벌을 중단하고 귀환을 결정했다.(6월28일) 모든 물자를 다 버리고 돌아왔다. 양현감에게는 위복사라는 측근이 있었다. 위복사는 양현감과 양광의 사이에서 양다리작전을 펴고 있었다. 이밀이 그런 위복사를 처단하라고 권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동도가 떨어지지 않자 양현감은 군사를 서쪽으로 몰아 장안을 향했다. 동도를 수비하던 수나라 군사들이 양현감의 배후를 습격했다. 삼문협에서 양현감 군사는 대패했다. 양현감은 동생 양적선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양적선은 형 양현감을 죽인 뒤 스스로 자결하려 했으나 자신은 죽지 못해 포로가 되었다. 이밀, 위복사 이 때 모두 번자개에게 잡햐 압송되었다. 이밀은 금은으로 관리를 매수해 도망가는데 성공했고 위복사는 도주를 거절했다. 결국 양적선과 위복사는 참혹하게 처형 효수되었다. 양광은 이 때 관중 홍화(감숙성 경양)를 지키는 원홍사를 위위소경 이연으로 교체하였다. 자치통감에 이연의 기록이 여기서 처음 나왔다. 이연의 모습이 기이하고 또 이름이 도참설과 관련이 있었으므로 양광은 이연은 장안으로 소환했으나 이연은 거의 미친척하거나 아픈척하며 경계를 푸는데 주력했다. 

 

 

(46) 4차 고구려 정벌(AD614)

 

AD614년 2월부터 양광은 세 번째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다. 양견의 고구려정벌까지 합해서 네 번째 정벌이다. 며칠 동안 아무도 전쟁반대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양광의 성질로 볼 때 반대의 간언을 올렸다가는 살아남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양광은 곧바로 100만 대군을 징집했다.(2월 29일) 내호아의 수군이 대련에서 고구려 군을 크게 이겼다. 고구려 영양왕은 재빨리 항복한다고 하면서 전에 귀순해 온 곡사정을 압송하여 요동으로 송환했다. 양광은 기쁜 나머지 내호아에게 회군하라고 명령했다. 내호아는 발끈했다.

 

“ 하루만 있으면 대승을 하는데

  어찌 전진하지 말라고 하는가?“ 

 

소환을 거부하고 진격해 나갔다. 말리고 붙드는 장사 최군숙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원(영양왕)을 사로잡고 처벌 받는 것이 차라리 낫다.

  이번의 성공을 놓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장사 최군숙은 자칫 잘못하면 양광에게 목이 달아날 것이 두려웠다. 군사들에게 나호아 말대로 앞으로 나아가면 목을 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야 내호아는 단념하고 회군했다. 양광은 8월4일 군사를 돌려 10월 25일 동도에 도착했다.

 

 

(47) 곳곳의 반란(AD615-AD616)과 소위 축출(AD616)

 

10여 년 전만해도 부강하던 수나라는 네 번에 걸친 무리한 고구려 정벌과 끊임없는 중신의 숙청과 혼란한 정치로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졌다. 전국 곳곳에서 도적 혹은 반란군들이 일어나 셀 수조차 없었다. 적양, 조사걸, 임사홍, 두건덕, 왕수발, 나예, 노명월, 무단아, 좌효우, 맹양, 장금칭, 이자통, 팽효재 등 이루 셀 수도 없는 크고 작은 적도들이 날뛰었다. 수나라의 영토도 쪼그라들어서 동도(낙양)과 서도(장안) 주변만 통제가 가능할 뿐 다른 지역은 이미 통제 불가능 상태였다. 양광은 서북국경을 순회하다가 돌궐 시필가한에게 포위되어 죽을 뻔도 했다(AD615년 겨울). 운정홍과 이세민이 구원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당연히 양광은 그런 지역을 피해 왕세충이 지키고 있는 안전한강도(남경)로 옮겨가고 싶었다.

 

조정으로 돌아온 양광은 AD616년 초 우문술에게 도적의 출몰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 우문술은 점차 줄고 있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황제가 의아해서 얼마나 줄었냐고 물었다. 우문술은 1/10도 안 된다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고 느낀 양광은 기둥 뒤에 숨어있던 납언 소위에게 물었다. 소위는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다만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기는 하다고 말했다. 황제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지적하자 그제야 소위가 말했다.

 

“ 예전에는 산동 추평에만 도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수에 까지 내려왔습니다.

  가까이서 농사짓고 부역하던 장정들이 다들 어디로 갔겠습니까?

  산적이 된 것입니다.

  지금 상주문을 보면 하나같이 거짓말투성이고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대책이 제대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 요동에서 철수 한 것이 바로 직전인 데 

  또다시 요동을 정벌하신다고 하시니

  도적이 어떻게 잠잠해 지겠습니까? “

 

양광이 몹시 불쾌했다. 다른 신하들이 황제에게 모두 선물을 올릴 때 소위는 <상서(尙書)>를 써서 과거 하나라 사태강의 역사상 반란사례(五子之歌)를 들어 경고하였다. 소위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징발 대신 도적을 일시에 사면하여 그 군사로 고구려를 정벌하자고 했다. 어사대부 배온이 소위에게 어디에 도적이 있냐고 힐난했다. 황제도 소위를 노혁(老革, 늙은 가죽)이라고 폄하하면서 불손함을 꾸짖었다. 배온이 사람을 시켜 소위를 탄핵하게 했고 그에 따라 양광을 소위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폐서인 시켰다.(AD616)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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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30 1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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