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8> 드디어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다(기원전 270)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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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개혁으로 귀족과 평민의 단합을 이룬 로마는 타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내치의 안정을 이루었으니 다음 순서로 외치의 안정을 목표로 삼았다. 이 역시 켈트족의 침입에서 뼈저리게 느낀 교훈을 현실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로마는 이미 왕정시대부터 이웃 부족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라틴동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의 문제점은 로마의 힘이 강할 때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로마의 힘이 약해지면 동맹국의 이탈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켈트족의 침입이 좋은 사례다. 

 

라틴동맹은 로마가 강할 때는 괜찮았지만 약할 때는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흔히 외교 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성립된 개념이 ‘로마연합’이다. 라틴동맹과 로마연합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라틴동맹은 동맹국끼리도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로마연합’은 로마와 가맹국 사이에만 외교적 협정을 맺고, 가맹국과 가맹국 사이에는 어떤 협정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가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로마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연합한 동맹국들의 안전과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이다. 로마연합에 참여한 국가들은 로마와의 전쟁에 패배했거나 로마의 힘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로마는 패자를 대하는 방식이 달랐다. 패자를 지배하여 군림하는 대신에 패자를 파트너로 인식하고 공동 경영자의 자세를 취했다. 당시에는 전쟁에 지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파격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패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신 로마에 대한 강력한 충성을 요구했고, 로마가 요청할 때 동맹군을 파병해야 했다. 이는 나중에 로마가 제국을 건설할 때 큰 자산이 된다. 로마 시민과 동맹군을 한없이 끌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연합은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었다. 로마가 영토를 넓혀가면서 로마의 지령이나 파병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 시절에는 통신 시설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는 고속도로인 로마가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로마가도는 기원전 312년에 개설된 ‘아피아 가도’다. 감찰관 아피우스의 명령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후 로마가도는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로명을 지었다. 로마가도는 단순히 행정 도로였던 것은 아니다. 정치, 군사, 행정을 비롯한 다목적용으로 건설되어 로마제국 통치의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먼저 가도부터 만들어 속주국들을 신속하게 지배했다. 

 

로마가 이탈리아 중남부를 제패하는 데 소요된 기간은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26년까지 14년이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으로 제국을 건설하는 데 걸린 세월이 기원전 334년부터 기원전 323년까지 11년이다. 

 

리비우스는 “만약 로마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전쟁을 벌였다면 로마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로마와 싸웠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군대에는 지휘관이 대왕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로마군에는 적어도 11명의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에는 지휘관 자리가 비어도 항상 대체할 지도자가 있었다. 로마군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에 따라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개인의 전략과 전술이 뛰어나 개인의 리더십으로 움직였으니, 대왕의 유고 시에 그를 대신할 지도자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의 대결은 개인과 조직의 대결인 까닭에 최종 승리는 조직의 승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도자의 ‘승계 시스템의 차이’가 알렉산드로스와 로마의 운명을 갈라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의 차이 때문에 로마군은 전투에 지더라도 다른 지도자가 대신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군은 전투에서 지면 전쟁에서도 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로마가 반도를 통일할 때 가장 어려움을 겪은 민족이 삼니움족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산악지대에 거주한 민족으로, 조직력이 강하고 게릴라 전술에 뛰어났다. 이 민족을 상대로 로마군은 기원전 343년부터 290년까지 3차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고, 정복하는 데 무려 50여 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로마군을 괴롭힌 적은 이탈리아반도의 발뒤꿈치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식민시 타렌툼과의 대결이었다. 타렌툼의 그리스인들은 북부 그리스의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로스는 한니발 장군이 병법의 스승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였다. 기원전 280년 전쟁이 시작되자 피로스는 이탈리아로 쳐들어와 로마군을 두 차례나 크게 패배시켜 로마군을 긴장시켰다.

 

사이먼 베이커는 『로마의 역사』에서 ‘피로스의 승리’를 소개했다. 피로스는 그리스제국을 이룩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승리를 위해 너무 많은 군사가 희생되어 피로스 왕은 “이런 식으로 한 번만 더 승리한다면 우리가 끝장나겠군!”이라고 말했다. 이후 겉으로 이기고 속으로 치명상을 입는 허울뿐인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비유하게 되었다. 

 

피로스는 초반에는 승리하여 로마인들을 긴장시켰지만, 기원전 275년 로마군과 로마연합군의 협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로마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주목받기 시작했고, 드디어 기원전 270년에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는 꿈을 이루었다. 이제 로마는 지중해로 힘차게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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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30 17: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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