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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밥바라기는 샛별이다.”

  이제 스피노자를 떠나 논의의 주제였던 유물론으로 돌아가 보자. 하지만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한 심신관계 이론인 동일론이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한 변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터.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스피노자-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대륙의 합리주의를 ‘실체의 개수를 수정하는 철학’으로 규정한다. 데카르트의 두 개의 실체는 스피노자에서 하나로, 라이프니츠에서 무한한 여럿으로 수정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을 데카르트 철학의 아류나 변종으로 보는 시각은 이미 구시대의 것이다. 

 

  스피노자 형이상학에서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은 하나인 실체인 자연의 두 측면이다. 심신동일론은 심리적 프로세스와 물리적 프로세스는 속성이 서로 다르지만 사실상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잘 표현하고 있는 명제를 하나 들어보자.

 

  “개밥바라기는 샛별이다.”

 

  우리시대의 반려동물로 호강하는 ‘개’는 하루 여러 차례 고급 사료를 먹지만 옛날 견공들의 식사는 하루 한 차례만 제공됐다. 하루 2식의 가난했던 시절, 쥔님들이 이른 저녁식사를 마친 뒤, 견공들은 남은 밥을 남은 된장국이나 찌개에 꾹꾹 말아주는 식사를 기다렸다. ‘개밥바라기’는 바로 이 시각에 떠서 서쪽하늘에 유난히 빛나는 별이다. ‘바라기’는 ‘작은 그릇’을 의미하기도 하고 개가 밥을 ‘바란다’는 중의적 표현이기도 하다. ‘샛별’은 모두 아는 바대로 새벽시간 동쪽 하늘에 빛나는 별이다. 개밥바라기와 샛별, 이 두 개체가 사실상 같은 ‘금성’이라는 별이라는 건 천문학의 탐구 성과다. 

  스피노자 식으로 얘기하면 개밥바라기와 샛별은 금성의 두 측면이다. 이제 동일론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예로 든 명제, ‘통증은 C 신경섬유의 떨림이다’를 통해 동일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픔이라는 프로세스와 몸의 신경에서 일어나는 C 신경섬유의 떨림이라는 프로세스가 사실상 같은 과정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두 프로세스를 두 가지 측면으로 갖는 하나인 그 무엇은 무엇일까?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실체이며 신이며 자연인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꼬집으면 아프다.”

  앞에서 제기한 ‘하나인 무엇’이 무엇인지 논의하기 전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본인의 친구 중 이 글들을 꼼꼼하게 읽어주고 자주 댓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주는 고마운 친구가 있다. 실명은 밝히지 않고 그저 ‘운암선생’이라고만 밝힌다. 운암선생이 동일론의 명제와 관련해서 이런 댓글을 달았다.

 

  “안면마비는 12개 뇌신경중 7번째인 안면신경이 마비돼 나타나는 증상.”

 

  상식적으로 너무 당연한 신경생리학의 참 명제로 보인다. 하지만 철학적 사고와 주장은 상식과 어긋날 때가 많다. 그래서 철학하는 사람은 보통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적잖다. 대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며 ‘사람을 찾았다’는 디오게네스를 흉내 내, 어떤 철학도는 여름에 코트를 입고 다니기도 했단다. (실제로 본인의 대학시절 철학도들은 물들인 군복과 목 자른 워커를 즐겨 신었다. 실크헷을 쓰고 다녔던 철학도도 있었다.) 

  사설이 길어졌지만, 앞의 명제에서 짚을 대목은 ‘...신경이 마비돼 나타나는...’이다. 이 대목에서 데카르트 식 사고와 스피노자 식 사고의 다름을 언급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상식은 아직 데카르트적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이 두 개의 실체라고 주장하면서도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꼬집으면 아프다”라는 명제는 어떤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꼬집는다’는 물리적 자극이 어떻게 ‘아프다’는 심리적 과정을 일으키는가? 엄연히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체인데. 데카르트는 이 대목에서 그저 얼버무리고 만다. 당시로서는 꽤 깊은 해부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이런 변환의 과정이 송과선(소나무 열매, 곧 송방울 모양의 내분비샘)에서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은 과학적 사실도 아니고, 철학적 사유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안면신경이 마비가 원인 돼 안면마비가 온다는 인과율적 상식의 사고는 받아들일 만한가?

  지나치게 깐깐한 논의가 될지 모르지만 스피노자 식 버전으로 이 명제를 바꿔보자. “안면신경 마비와 안면마비는 한 사건의 두 가지 측면이다.” 상식적이진 않을지 몰라도 철학적이긴 하잖은가?

 

  스트로슨의 ‘사람’

  동일론이 신경생리학과 동맹을 맺고 세련된 모습으로 출현하기 전,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의 현대적 변용이 출현한 적이 있다. 몸과 마음은 ‘무엇’의 두 측면이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 ‘무엇’을 영국의 철학자 P. F. 스트로슨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심리철학에서 ‘타인의 마음 문제’는 풀어야 할 중요한 철학적 아포리아(난제)이다. 물리적 과정이 측정 가능하고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반면, 심리적 과정은 주관적이고 직관적이다. 다시 말하면 1인칭적이다. 1인칭적 심리적 과정을 3인칭으로 기술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환원적 유물론이나 행동주의의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스트로슨은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적 술어의 논리적 특수성에 주목했다. 그는 심리적 술어는 1인칭적 사용과 3인칭적 사용의 의미가 동일하다는 특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 의미의 동일성은 ‘사람’이 심리적 측면과 물리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 개별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개별자로서의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개념적 능력을 갖는 존재이다. 사람이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함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론(person theory)’에는 타인의 마음 문제라는 아포리아는 해소된다.

  사람이론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며 동시에 경험과 사유의 주체라는 상식과 잘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이론에는 약점이 있다. 스트로슨이 지적하는 ‘사람’ 개념 안에는 동물도 포함되지 않는가 하는 비판이 가능하다.

  동물도 인간만큼 복잡하지는 않지만 심리적 과정을 갖지 않는가? 현대철학에서 형이상학적 논의는 매우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과정을 거친다. 정교한 언어분석과 범주분석으로 무장한 철학적 논변이 작업의 핵심을 이룬다. 물론 스트로슨의 작업도 그렇다. 그렇게 현대철학의 논리적 논의를 거쳐 스피노자가 재해석되고 있는 셈이다.

 

  스트로슨의 사람이론을 포함한 이런 입장들을 ‘double aspect theory’라고 통칭한다. 물론 심리적 과정과 물리적 과정이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을 지칭한다는 동일론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인지과학 시대의 ‘마음’ 

  스트로슨이 ‘사람’이라는 상식을 넘는 결론을 이끌어오는데 썼던 도구는 언어분석이었다. 스트로슨 이후의 50년의 철학에는 컴퓨터와 뇌과학이라는 커다란 변수가 작용했다. 컴퓨터의 역사는 채 백년이 되지 않지만 수리적 계산을 위한 커다란 방에서 주머니 속 폰까지 급속히 진화했다. 이제 컴퓨터는 사람의 마음을 썩 잘 흉내낸다. 아니 어떤 기능은 마음 보다 훨씬 앞서 간다. 이세돌을 이겼던 알파고를 알파고2가 이겼다. 알파고2의 승률은 백 퍼센트다. 사람의 마음과 컴퓨터의 기능적 유사성은 심리철학자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을 진즉 벗어던져버린 철학자들은 마음이 실체 아닌 기능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마치 성냥이 막대 위에 발린 유황 덩어리를 마찰시켜 얻는 불꽃처럼, 마음을 그런 것으로. 그래서 마음이란 어떤 기본적인 것들의 조합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심리철학에서는 마음에 대한 이런 입장을 ‘기능주의’라고 부른다. 

  미국은 냉전시대 소련과 벌였던 우주개발 경쟁에 쏟아왔던 막대한 재원을 냉전 종식 후 사람의 뇌 연구에 쏟아 부었다고 전해진다. 아직 사람의 뇌에 대해 완전한 이해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뤘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이 뇌와 연관이 있다는 신념에 한 발 더 가까이 간 건 사실이다. 그리고 마음작용과 컴퓨터 기능의 유사성이 마음에 대한 이해의 열쇠라고 하는 믿음 역시 점점 강화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믿음을 가진 철학자들의 입장을 ‘계산주의’라고 부른다.(여기서 ‘계산’의 뜻은 수리계산의 의미를 넘어선다. 컴퓨터가 작동하고 기능하는 방식 전반을 의미한다.) 

  계산주의는 컴퓨터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조합으로 구성되듯, 사람의 마음은 뇌를 구성하는 뉴런과 그 물질적 하드웨어에 구현되는 정보처리 과정으로 유비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관점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보게 된다. 오히려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라고 묻게 되고,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의미 있는 질문이 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해 데이비드 흄 류의 ‘내성(內省, introspection)에 의해서’라는 답변은 단순하고 순진했다. 왜냐하면 착시나 기억의 조작 사례 등을 내성이라는 직관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은 이 문제의 해결에 다양한 영감을 제공했다. 계산주의는 다양하고 세련된 버전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계산주의에서 ‘모듈’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당초 건축에서 사이즈를 재는 실용적 단위로 등장했지만, 통상적으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적 실체를 가리킨다.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특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단위로 문제를 나누면 쉽다. 그 작은 단위가 모듈이다. 고차원의 기능을 수행하는 컴퓨터는 단순한 소프트웨어들의 조합을 통해 목표를 달성한다. 이 단순한 소프트웨어들은 컴퓨터의 모듈들이다. 계산주의자들은 사람의 마음이 수많은 모듈들의 협업에 의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제리 포더라는 미국 철학자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계산주의 마음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주창한 거의 최초의 철학자이다. 포더는 마음의 구조를 언어의 구조와 같으며 논리적 추론의 형식을 따른다는 전제 아래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의 기능을 유비적으로 이해했다. 이런 포더의 이론은 계산주의 마음이론의 초석을 제공했다.

  하지만 포더는 최근 들어 자신이 주장했던 계산주의가 마음의 인지 현상을 설명하는데 턱 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과거 이론을 스스로 비판한 셈이다. 그는 “마음은 계산주의가 설명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고, 인지과학은 마음의 본질을 밝히려면 한참 멀었다”고까지 말한다. 

  최근의 포더는 마음의 인지과정은 ‘기계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라고 본다. 마음이 대상을 만났을 때, 대상을 알아차리고 해석하는 방식은 기계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전체적 맥락에 의존하여 가설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인지가 이루어진다. 계산주의의 모듈들의 협업에 대한 인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모듈이론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이런 복잡한 과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모듈이 존재해야 하는가?

  포더는 로봇과 인지공학의 성과들이 시원찮은 사실을 들며, 마음에 대한 계산주의의 이해가 출발부터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포더를 지지한다면 인지과학의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마음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글들의 주제가 붓다의 가르침과 마음 닦기인 만큼 다음 회에서는 불교가 마음을 어떻게 보는지를 정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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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25 19:21:01 최종수정 2017-12-08 13: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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