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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증은 신경 C섬유의 떨림이다.”

  지난 번 언급했던 유물론의 유력한 한 버전 동일론에 대해 좀 더 논의를 진행해보자. ‘동일하다’는 말은 ‘같다’는 말이다. ‘심신동일론(mind-body identity theory)’은 ‘마음과 물질은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버전은 신경생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했다. 몸과 마음은 서로 성질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같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유물론의 한 형태라고 여겨지지만 반드시 ‘사실상 같은 그것’이 ‘물질’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유물론’을 넘어서는 유물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론의 주창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유물론’보다는 그저 ‘동일론’으로 불리기를 선호한다. 

  동일론의 대표적인 명제가 있다. “통증은 신경 C섬유의 떨림이다”가 그것이다. 몸에서 느끼는 통증은 광범위하게 분류하면 ‘의식’의 범주에 들어간다. (불교의 어느 분파에서는 ‘통증’을 몸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몸과 마음의 카테고리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의식을 존재론적으로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인 심리철학에서는 통증 같은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이고 주관적인 감각을 ‘날 감각(raw-sensation)'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동일론자들은 이 날 감각이 신경 C섬유(신경은 세 가닥으로 돼있는데, 각각 A, B, C섬유로 명명한다)의 떨림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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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증’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이고, 신경 C섬유의 떨림은 물리적 과정이다. 그 두 과정은 매우 성질이 달라 보인다. 하지만 두 과정은 각각 따로따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통증을 느낄 때는 그 사람의 신경 C섬유의 떨림이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두 과정은 결코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신경이 떨리기 때문에 아픔이 일어나거나, 아프기 때문에 신경섬유가 떨리는 게 아니다. 동일론의 중요한 요지는 바로 이것이다.

  두 과정이 서로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동일한) 것을 ‘지칭하고(가리키고)있다’는

주장이다. 정말 그럴 듯하다. 동일론을 심신이론의 강자로 군림케 할 정도로. 도대체 이런 주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렌즈 갈던 철학자, 스피노자

  "..... 저주하고 제명하여 영원히 추방한다.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저주 받으라. 나갈 때도 들어올 때에도 저주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용서 마옵시고 분노가 이 자를 향해 불타게 하소서! 어느 누구도 그와 교제하지 말 것이며 그와 한 지붕에서 살아서도 안 되며 그의 가까이에 가서도 안 되고 그가 쓴 책을 봐서도 안 된다." 

  23살 청년에게 내려진 종교공동체의 포고문이다. 그렇게 그는 파문됐다. 개인에게 내려진 가혹함의 극치였다. 왕따의 결정판이었다.

 

  163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 계 유태인 스피노자. 세속의 모든 혜택을 누리며 랍비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그는 힘든 사상의 자유를 선택했다. 그리고 44살의 짧은 생을 렌즈 깎는 일로 유지했다. 렌즈 깎는 기술이 비상시 생업이 될 기술 하나를 익혀야 한다는 ‘유태인 교육’의 혜택이었다는 점, 또 이 기술이 죽음으로 이끈 폐병의 원인이 됐다는 점은 두 번의 아이러니다.

  파문 전 랍비에게 철학과 신학 공부했지만, 아라비아와 르네상스를 거쳐 데카르트 사상 에 영향을 받았다. 30살쯤에는 독자적 사상을 갖게 되었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후에도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모든 저작이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올랐다. 38살까지 네덜란드 곳곳을 방랑하며 살다가 이후 헤이그에 정착했다. 죽기 직전 대표저작인 된 ‘에티카(윤리학)’를 완성하였지만, 출판하지 못했다.

  운명에 굴하지 않았던 스피노자의 삶은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그의 사상은 바로 이 ‘에티카’로 요약된다. 열악한 환경에서 렌즈 가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당시 독일 최고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초빙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자유로운 철학활동을 보장하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스피노자는 오로지 철학적 진리를 구현하는 한 길의 삶을 살았다.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으리라.

 

  스피노자의 복권

  ‘데카르트 에디피스’, 철학적 지식의 체계를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고자 했던 데카르트 방법론을 ‘건물’에 비유한 말이다. 데카르트의 이 이념을 더욱 철저하게 밀고 나간 철학자는 다름 아닌 스피노자였다. 그는 기하학의 논증법을 빌어 윤리학을 공리와 정리로 체계 지우려고 시도했다. ‘에티카’는 그래서 기하학의 딱딱함으로 가득한 저술로 보인다. 하지만 에티카는 그의 독창적 형이상학과 철학적 영감을 표현한 명제로 가득하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신, 자연, 실체는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다. 그것들은 하나 뿐인 같은 것을 가리키며, ‘정말로 존재하는 하나’에 대한 이름이다. ‘자연이 곧 신’이라는 주장, 곧 ‘범신론은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골자이기도 하다. 이런 주장은 정통 기독교도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헛소리다. ‘인격’을 갖고,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터무니없는 개똥철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철학사에서 대륙 합리주의의 세 거두로 자리매김했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스피노자는 "신을 모독한 저주받을 무신론자"였지만, 후대 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특히 루소, 괴테, 헤겔, 피히테 등은 시간적 갭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제자들이었다. 무신론적 성향이 강한 일원론적 범신론의 철학은 독일 관념론에 큰 영향을 끼쳤고, 계몽주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독일 계몽주의 극작가 레싱은 "스피노자 철학 밖에는 진정한 철학이 없다"고 말할 만큼 그의 왕팬이었다. 지난 세기 삶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철학자는 두 가지 철학을 갖고 있다. 자신의 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을.” 스피노자는 대략 백년마다 재해석된다. 금세기에도 스피노자 철학은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다. 지금 우리가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심신동일론도 그 중 하나이다.

 

 

 

  ‘영원의 상하’

  스피노자 철학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저작이 형이상학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제목은 왜 ‘에티카’ 즉 윤리학이었을까? 윤리학은 인간의 삶과 행위의 가치를 다루는 철학의 분야가 아닌가?

  스피노자의 철학은 앞서 언급한대로 범신론이며 일원론이다. 신이며 실체인 자연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연관을 맺는가?

  니체가 말했다. “신은 죽었다”라고. 그러나 그보다 3백 년 전 스피노자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인격신을 부정했던 스피노자가 당시 삶을 누릴 수 있던 곳은 네덜란드 말고는 없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준 철학자였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바로 우리 자신이 가진 생산력과 창조력이었다. 그는 이 ‘역량’ 또는 ‘힘’을 ‘코나투스’라고 불렀다. 윤리학적 맥락에서 코나투스는 자아를 보존하고 완성하려는 욕구의 의미이다. 스피노자의 ‘행복’은 바로 코나투스의 완전한 표출이다. 그는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뭇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즉 코나투스를 발휘할 수 있는 체제가 최선이라고 보았다. 

  하나 뿐인 자연 역시 코나투스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측면을 갖고 있다. 무한자의 측면과 유한자의 측면이다. 무한자는 '능산적 자연' 즉 산출하는 자연이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궁극적인 힘이다. 유한자는 '소산적 자연'으로 산출된 자연이다. 

  무한자를 신 또는 자연이라고 부르며, 유한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 둘은 어떻게 관계되는가? 유한자가 무한자의 변용태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스피노자주의'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신의 필연성에 따라 일어난다.

 

  유한자는 무한자의 필연성을 수용함으로써 그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은 신과 결합하고 행복을 얻는다. 신에 대한 지적 직관으로 신의 입장에 선다. 스피노자는 이 입장을 ‘영원의 상하’, 즉 ‘영원의 입장 아래’ 서는 일이라고 말한다.

  어떤가? 스피노자에게서 언뜻 불교가 보이지 않는가? 현상을 떠나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또 ‘법은 어디에나’ 있고,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일 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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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8 17:12:00 최종수정 2017-12-08 13: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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