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G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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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31) 황자 양준의 독살과 황태자 양용폐출과 양광의 태자책봉(AD600)

 

AD600년 6월 부인 최씨의 독약을 먹고 오래 병을 앓던 셋째 아들 양준이 결국 죽었다. 아들 양호(浩)가 있었으나 생모 최씨가 죄인이므로 상주가 될 수 없었다. 묘비도 세우지 못하도록 했다. 셋째 아들 양준은 심성이 부드러웠지만 사치함으로 실패하여 죽었다면 첫째 아들 태자 양용은 정반대였다. 그의 성격은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검약 절제하는 스타일이었으며 교활하게 꾸미거나 자만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의 지위가 흔들리게 된 것은 자못 아이러니컬하다. 양견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이해 양견은 59세) 태자 양용에게 신하들이 쏠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동짓날 문무백관들이 양용에게 문안인사 간 것이 양견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른 양견은 이런 조서를 내렸다.

 

“ 예절에는 차등이 있고 주군과 신하는 섞이지 않는 법이다. 

  황태자 또한 신하이다.

  계절에 따라 백관들이 신하인 동궁에게 선물을 보내거나 인사를 차리는 것은 

  앞으로 정지하도록 하라.“

 

이 일로부터 동궁에 대한 은총이 식어지고 점차 의심이 많아졌다. 독고황후도 장자 양용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양용이 본처 심씨 대신 첩 운씨를 너무 총애한 나머지 본처원씨가 원망함으로 죽는 일이 발생했다. 원씨는 독고황후가 직접 골라 간택한 여자였다. 독고황후는 양용을 심하게 꾸짖었다. 운씨는 양용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서 양엄, 양유, 양균 등 여러 아들을 생산했다. 독고황후는 본처 대신 첩을 아끼는 그런 양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람을 몰래 보내 양용의 흠결을 찾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스타일을 잘 아는 둘째 양광은 겉으로 본처 소씨만 사랑하는 척 연기를 했고 첩에게 나는 아이들은 모두 기르지 않고 몰래 남에게 주거나 버렸다. 이쁜 미희는 전부 감추어 숨겼고, 방의 휘장이나 치장은 전부 꾸밈없이 흰색으로 바꾸었다. 항상 흰 색 비단을 입었고 악기는 모두 줄을 끊고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신들을 깍듯이 대하면서 노비들에게도 매우 후한 대우를 보였다. 세상은 양광을 높이 평가했고 그런 양광을 독고황후는 매우 기특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양견은 여자나 술이나 음악에 빠지지도 않고 대신들을 존경하며 노비들에게 후한 양광을 더없이 총애하였다. 독고황후도 양용을 폐하고 양광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양광은 우문술을 끌어 들였다. 우문술은 금품으로 가까이 다가가 양소(楊素)과 그의 동생 양약을 추천하여 같은 편으로 만들었다. 양소가 독고황에게 다가가 양광의 어짐과 효성스러움과 공손 검약함을 들어 지존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다. 양용을 양광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것을 최초로 암시하며 밖으로 말한 사람이 양소다. 당연히 양견과 독고황후도 같은 생각이었다. 

 

태자 양용도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고 있었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사람을 불러 액운을 때우는 굿을 하거나 몸소 누추한 곳에서 기거하면서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양견은 양소를 보내 양용의 동태를 살폈다. 양소는 돌아와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니 살펴서 막아야 한다고 주청했다. 독고황후도 따로 사람을 보내 염탐을 시킨 뒤 굿을 하여 숨긴다는 죄목으로 양용을 모함하도록 시켰다. 양광도 양용의 궁녀에게 뇌물을 주어 양용의 비위를 낱낱이 보고하도록 했다. 황제부부와 양광의 집요한 계략에 양용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양소는 최종적으로 양용의 죄목을 이렇게 올렸다.

 

“ 태자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만족 무리를 이미 다 토벌했는데 또 어지까지 나를 멀리 보낼 생각이신가?

  양소 너는 우복야로 맡겨진 일이 가볍지 않는데 어찌 내 일에 간여하는가,

  옛날 대사(양견의 황위찬탈)가 실패했으면 내가 제일 먼저 죽었을 것이다.

  지금 천자이신 분은 나를 여러 동생보다 못하게 만들려고 

  한 가지 일 이상은 시키지를 않았다.

  이제야 나는 내 자신이 방해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견은 양용 폐위를 결정했다. 그리함으로써 천하를 안정시키겠다고 까지 했다. 좌위대장군원민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희위에게 양용의 죄목을 더 낱낱이 보고하라고 말했다. 원민, 배홍 등 양용의 심복을 모두 하옥했다. 양용과 그 아들들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최종적으로 양소가 양용에 대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 첫째, 양용은 괴목(불이 잘 붙음)을 수천 매 주위에 나누어 주었고(반란음모로 여김),

  둘째, 태자는 항상 말 천 필을 기르면서

       ‘궁궐을 포위하면 굶어죽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AD600년 10월 9일 황제는 양용을 불렀다. 양견은 군복으로 무장하고 백관과 친족을 모두세운 뒤 양용과 그의 아들을 끌어내어 배열시켰다. 내사시랑 설도형이 조서를 선포하여 페서인시켰다. 원민, 당령칙, 추문등, 하후복, 원엄 소자보, 하송이 참수되었고 그 가족들은 적몰되었다. 11월 3일에 양광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32) 폐립을 간하다 죽은 사만세(AD600)

 

북쪽 변방에서 돌궐을 토벌한 태평공 사만세가 몇 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양소는 사만세의 공을 극히 폄하하면서 이미 오래전에 돌궐은 항복한 족속들이며 변경에서 목축을 하고 있었으므로 공이라 할 것이 없다고 양견에게 보고했다. 사만세는 자신의 부하들의 전공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것에 분개했다. 자주 항의 서한을 올렸지만 황제에게까지 전달되지도 않았다. 한 번은 황제가 사만세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교활한 양소는 폐위된 양용에게 인사드리고 있는 중이라고 답했다. 황제는 격노했다. 황제가 사만세를 불렀다. 사만세는 이 참에 자신의 정벌과 또한 폐위의 부당함을 지극히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문제는 말투가 좀 거칠었다. 황제도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터였으니 온전하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양견은 몽둥이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양견이 곧바로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중지토록 했으나 교활한 양소는 그 전에 사만세를 죽이고 말았다.(AD600년 겨울) 11월 3일 양광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양견은 양광에게 양용을 감시,감독하도록 했는데 양용이 아버지 양견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을 다 차단하고 양용이 미쳐간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33) 아들 양수(楊秀) 퇴출(AD602)

 

익주총관 양수(楊秀,AD573–AD618)는 양견의 넷째 아들로 용모가 특이하게 크고 담력이 있었으며 무술에 뛰어났다. 양견은 그런 그를 좋게 본 것이 아니라 걱정스럽게 여겼다.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짐작했다. 마침 대장군 유쾌가 운남지역을 정벌할 때 양무통을 선봉으로 보냈는데 양수는 자신의 심복 만지광을 양무통군사의 행군사마(참모장)로 임명하여 딸려 보냈다. 양견은 자리에 적절치 않은 인사를 종용한 양수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 내 법 체계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내 자손이구나.

  다른 것도 아닌 털 속의 벌레 같은 것들이 

  호랑이를 해치고 먹어치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양견은 익주총관 양수의 군대를 절반으로 줄여 버렸다. 양견의 견제를 깨닫지 못한 양수는 근신하기는커녕 사치를 탐하고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며 인심을 잃어갔다. 자신의 충신 익주장사 원암이 죽은 뒤로부터는 아무도 충간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양수의 폭정은 고쳐질 수가 없었다. 새로 태자가 된 네 살 위 형 양광의 입장에서 양수는 눈엣가시였다. 최근 좌복야로 승진한 양소(楊素)에게 양수의 죄상을 긁어모으고 끊임없이 참소하라고 은밀히 지시했다.양소의 양수에 대한 참소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양수에게 장안으로 들어오라는 소환령을 내렸다. 양수는 병을 핑계로 들어가지 않았다. 측근인 익주사마 원사가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자 집안일이니 경이 간여할 바가 아니라고 질책했다. 조정에서는 전격적으로 익주총관을 독고해로 바꾸어 버렸다. 독고해가 익주 수도 성도에 도착하자 양수는 떠나기를 망서렸다. 독고해는 양수를 습격할 생각을 했다. 양수도 마찬가지로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독고해의 군사가 철저히 방비를 하는 것을 보고 무력반항을 포기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양수가 장안으로 돌아와 자신의 부실한 정치와 사치를 깊이 뉘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양견은 아무 말도 없었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조서를 내려 군법으로 양수를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개부의동삼사(장관급) 경정이 나서서 간언을 올렸다.

 

“ 양용이 폐위되고(AD600)

  양준은 죽었으니(AD600) 

  이제 현존하는 아들이 몇이 되지 않으십니다.

  촉왕마저 성격이 꼿꼿하여 스스로 보전치 않으실까 두렵습니다.“

 

경정의 혀를 자를 생각까지 할 정도로 분노한 양견이 소리쳤다.

 

“ 양수의 목을 베어 저자에 널어서 백성들에게 사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좌복야 양소에게 양수의 죄상을 낱낱이 수사하도록 지시했다. 양광은 몰래 인형에다가 칼과침을 꼽고 인형 손에는 쇠사슬을 묶고 양견과 한왕 양량의 이름을 적은 후 땅에 묻었다. 그리고는 양소에게 그 묻은 장소를 가르쳐 주어 발굴하도록 시켰다. 12월 20일 이렇게 해서 양수는 폐서인이 되었고 유폐되었다.(AD602년 12월)  

 

 

(34) 독고황후 사망과 양소 실각(AD602)

 

수나라 건국 초기 정치 간여를 극도로 줄였으나 점차 정치에 깊이 간여하면서 황태자 교체를 주도했던 독고황후가 AD602년 8월 죽었다. 나이는 59세. 시호는 문헌황후로 정하고 태릉(太陵)에 묻었다. 태자 양광은 겉으로는 애통에 쌓여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척했으나 뒤로는 웃고 낄낄거리며 살찐 짐승고기와 편육, 포육을 대나무 통 안에 넣고 몰래 즐겼다. 양견은 독고황후의 묘 자리를 잘 선택하여 장례를 치른 좌복야 양소의 공을 높이 치켜세워 전지 30경과 비단 1만 필과 쌀 1만 석을 내리고 아들 한 명에게 의강공 작훈을 하사했다.(AD602.윤10월) 

그러나 양견과 독고황후의 마음을 잘 읽고서 양광과 짜고 양수를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양소마저 실각하고 만다. 양소에게는 동생 양약, 숙부 양문사와 양문지, 그리고 친족 어른 양기가 있었는데 모두 양소를 등에 업고 상서와 경이라는 높은 직책으로 부귀를 누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대어 들기라도 하면 멸족에 이를 정도로 위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런 양소에게 굽히지 않는 사람은 유욱, 상서우승 이강, 그리고 대리경 양비 정도였다. 양비(梁毘)는 서녕주자사로 11년 봉직하면서 오로지 청렴과 근신함으로 주변 이민족들을 감화시켜 놀라운 업적을 올린 사람이었다. 높은 평판을 늦게 들은 양견이 조정으로 불러 대리경으로 삼았는데 법 처리가 매우 공평하고 성실했다.  

 

그런 강직한 양비의 눈에 양소 일당의 전횡은 나라의 우환이 될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양비는 죽음을 각오하고 양견에게 봉사를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 신이 듣기에 신하는 위엄과 복을 만들기도 하나

  때로는 그것 때문에 집과 나라를 해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지 좌복야 월국공 양소의 총애가 너무 무겁고 권세가 너무 커서 

  모든 선비관료들이 그의 눈과 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뜻과 마음을 거스르면 

  여름에 된서리 내리듯 하고 

  그 뜻에 아부하면 

  겨울에 단비가 뚝뚝 내리듯 합니다. 

  번영과 쇠퇴가 그의 입술에서 나오고

  폐하고 흥하는 것이 그의 손바닥에서 나옵니다. 

  사사롭게 그가 추켜세우는 사람을 보며 하나같이 곧고 충성스런 사람이 아니고

  진급시키는 사람은 다 친척, 그 자제입니다.

  천하가 다행히 무사하면 잠재울 수가 있겠으나

  만약 사해에 걱정거리라도 생기면 반드시 재앙의 단초가 될 것입니다.

  무릇 간신이 천자의 명령을 휘감게 되어 쌓이면 

  조금 지나서 왕망(전한 쿠테타)같이 되고 환현(동진 쿠테타)처럼 되어

  한나라와 진나라를 위태롭게 했습니다.

  폐하께서 양소를 아형(최고위직)으로 삼으셨지만 

  그의 속내는 분명히 이윤과 다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 옵기는 옛날의 일들을 거울 삼으셔서  

  국가기업을 영원히 굳건하게 하시면 온 천지 사람들에게 크고 넓은 복이 되겠습니다.“ 

 

격노한 양견은 양비를 당장 잡아들여 면전에서 직접 책망했다. 양비는 굽히지 않았다.

 

“ 양소는 총애를 빙자하여 권력을 무자비하게 행사하고 있습니다.

  태자(양용)와 촉왕(양수)이 폐위되는 날

  만천하가 비통에 쌓여 두려움에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오지 양소만은 눈을 치켜세우고 팔꿈치를 털면서

  기쁨을 안색에서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슬픈 사건을 

  자신의 영달의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야 분이 가라앉은 양견은 양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양소의 일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양견은 이런 칙령을 내렸다.

 

“ 좌복야(양소)는 나라의 소중한 보배이니

  몸을 함부로 혹사하면 안 된다.     

  매일 조정에 나올 필요는 없고

  다만 사흘이나 닷새에 한 번 정도 조정에 나와 큰일을 논평하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양소는 실질적인 권좌에서 내려왔다. 양견이 죽고 양광이 즉위한 뒤에야 양소는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AD602년 말)

 

 

(35) 양견사망과 사마광의 인물평(AD604)

 

AD604년은 삼월부터 유난히 더웠다. 양견이 더위를 피하려고 장안 서쪽 150KM 보계에 세운 인수궁으로 피서를 가려했다. 술사 장구익이 말렸다.

 

“ 이번 행차로 나가시면 행여 돌아오지 못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장구익은 지난 번 독고황후의 묘 자리를 본 사람으로 항상 수나라가 30년 이상 못할 것을 걱정해 온 사람이었다. 양견은 불길한 말을 함부로 해대는 장구익을 감옥에 가두고 돌아와서 죽일 참이었다. 모든 국정을 태자 양광에게 맡기고 3월 27일 인수궁에 도착했다. 그러나 곧바로 양견의 몸이 불편했다. 7월 10일 양견의 병이 갑자기 심해져 백관들과 결별의 인사를 나누었고 특별히 감옥에 있던 장구익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사흘 뒤(AD604년 7월13일) 양견이 인수궁 대보전에서 사망했다. 나이 64였다. 양견이 과연 병으로 자연사했는지 아니면 양광에 의해 독살 당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양견을 이렇게 평가했다.

 

“ 수나라 고조 양견의 성품은 엄하고 무거웠다.

  영을 내리면 반드시 행했고 금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조회를 하여 들었고 해가 기울도록 피곤한 줄 몰랐다.

  재물에는 인색했지만 공로 있는 사람에게는 아끼지 않았다.  

  죽은 사람에게는 후히 상을 내렸고 그 가족들도 끝까지 돌보았다. 

  농잠을 권장하면서 요역을 줄였고 본인 스스로도 수레를 고쳐 탈 정도로

  매우 검소 질박하였다.

  그런 까닭에 국가 창고는 넘쳐났으며

  인구도 두 배 이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다만 시기심이 많고 참소를 너무 쉽게 믿은 나머지

  공신들이나 옛 친구 중에서 끝까지 보전된 사람이 없어

  그 자제들마저 원수처럼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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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6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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