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6>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탄생한 호민관 제도(기원전 494)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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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초기 로마의 국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로마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는 로마 시를 흐르는 테베레 강 주변에서 하구까지 좁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탈리아반도의 북쪽에서는 에트루리아인이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남쪽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인 타렌툼과 시라쿠사가 있었다. 또 선진국인 그리스의 아테네와 카르타고는 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처럼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한 로마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로마는 공화정을 도입한 후 곧바로 주변 국가들의 침입을 받았다. 왕정을 유지하는 인근 부족 국가들이 공화정으로 갓 태어난 로마를 얕잡아보고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쳐들어온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귀족과 평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주변 국가들 역시 로마의 저력을 알고 무력으로 지배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면서, 로마는 일단 공화정 체제의 위기를 넘겼다. 

 

외부의 적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고 나니 내부의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정치적으로 집정관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은 귀족들이 독차지했다. 이에 따라 평민들의 정치적 소외감이 점점 높아졌다. 

로마에서 귀족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로마 시민은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된다. 토머스 R. 마틴은 『고대 로마사』에서 로마 귀족은 왕정 초기에 약 130개 가문으로 소수에 속했다고 소개한다. 귀족들은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비는 종교 의례를 집전할 특별한 권리를 가지면서 배타적인 집단이 되었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높은 신분과 막대한 재산을 가진 덕택에 로마 최초의 사회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대규모의 추종자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지휘관이 되었다. 

 

한편 평민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전쟁을 통해 체감했다. 매년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평민의 참여 없이는 공화정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힘의 역학 관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에든 갈등은 존재하고, 계기가 있으면 표면화된다. 평민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자, 그 갈등은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화정 초기 10여 년 동안 해마다 전쟁이 일어난 까닭에 평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인 농토나 가게를 장기간 비우게 되었다. 오랫동안 생업을 떠나 있다 보니 개인 경제는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귀족들은 넓은 농토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도 경제력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은 귀족과 평민에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로마인 이야기』 1권에는 60세가 다 된 노인이 포로 로마노에 모인 군중들에게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농노로 전락한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농토가 있는 지역이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농토도 집도 불타버리고, 불타지 않은 가축은 도둑맞았소. 그 재산을 다시 일구기 위해서는 빚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이자는 너무 비싸고 수확은 예상 밖으로 적어서 빚을 갚을 수가 없었소. 그래서 나는 법에 정해진 대로 채권자의 소유가 되어 로마 시민이면서도 노예보다 더 혹사당하는 농노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오.” 

 

이 하소연을 들은 민중들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고 공감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평민들은 원로원에 “로마 시민권자가 노예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집정관이 약속을 하고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파업을 결정했다.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집정관이 군대 소집을 명령했으나, 평민들은 이에 불응하고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전쟁터로 나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로마 최초의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협상이 이루어져 평민들은 파업을 풀었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빚을 갚지 못한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법안은 민회에서 부결되었다. 민회는 경제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많은 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귀족 계급이 민회의 의결을 좌우할 수 있었다. 법안이 부결되었을 때 다시 평민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갈등이 반복되면서 귀족 계급의 지도자들은 마침내 기원전 494년에 평민들의 대표인 호민관(tribune) 제도를 도입하기로 양보한다. 

 

호민관은 평민회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민회는 귀족과 평민이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귀족 계급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평민회는 평민만 참석할 수 있으므로 명실공히 평민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다. 호민관은 2명이 선출되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호민관의 임무는 평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으로, 그 신분은 신성불가침이며, 집정관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또 면책특권도 부여되었다. 호민관의 정원은 나중에 10명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과의 관계가 위기를 맞았다가 회복되고 다시 위기를 맞는 관계가 반복된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은 공화정 창설 이후 200년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이 시기를 ‘계급 간의 갈등 시기’라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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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6 16:55:00 최종수정 2017-11-22 10: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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