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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상식

  많은 사람들이 영혼을 믿는다. 영혼은 육신과 관계없는,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에 불멸이다. 당연히 육신의 죽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특히 서양사상의 전통에서 오랫동안 상식의 지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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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안다’라는 단어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줄곧 오류 없는 확실한 앎이 어떻게 가능한 지를 물었다. 그리고 앎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육체와 관련된 정신의 기능, 즉 감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감각을 통한 앎은 우리를 속인다. 확실한 앎을 갖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육체와 관계없는 정신의 작용이 있다. 플라톤은 대화록 ‘메논’에서 기학학을 배운 적이 없는 노예소년에게 기하학의 한 정리를 이해시키는 과정을 통해 누구나 이런 능력, 즉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이성은 육체와 섞이지 않은 정신의 순수한 작용이다. 그리고 순수한 그 정신이 영혼이다. 이런 사상은 사도 바울에 의해 기독교에 수용됐고, 어거스틴의 철학으로 잘 버무려져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출현할 때까지 기독교 세계를 지배했다. (아퀴나스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종교적 버전이라고 일컬어진다. 아퀴나스는 생전에는 교단의 박해를 받았다.)

 

  ‘근대는 중세의 극복’이라는 말은 그저 한 시대의 상식일 뿐이다. 철학사가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대륙 합리론이 적어도 이성주의와 영혼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계승이라고 기술한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뿌리는 그래서 플라톤이다. 사람이 가진 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발하다. 하지만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의 ‘영혼’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순해서 불멸이다”

  단자론을 주장했던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주의자였다. 하지만 단자론의 결론은 데카르트 이원론과는 빨강과 파랑만큼 색깔이 다르다. 라이프니쯔는 세계를 정신적인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그 정신적인 것들을 ‘단자’라고 불렀다. 단자는 아주 작은 알갱이가 아니다. 알갱이는 아무리 작아도 쪼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쪼갤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기 때문에 ‘단자’라고 부른다.

 

  쪼갤 수 없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고 물질과 달리 공간을 차지하는 속성이 없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정신적인 것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과 다르다는 데카르트의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미분을 창안해내리만큼 창조적인 수학자였던 라이프니츠는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13가지 스텝을 밟아가면서 정신적인 것, 즉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한다. 증명의 골자는 영혼, 즉 순수정신적인 것은 공간을 차지하는 특성, 외연이 없기 때문에 쪼갤 수 없고 그래서 단순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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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자론은 그럴 듯하다. 단자는 정신적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독립적이다. 그래서 ‘창 없는 단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단자 하나하나가 세계 전체를 반영하고 있다. 마치 화엄의 주장과 흡사하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철학계에서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먼저 동양사상을 접했고 단자론의 철학은 주역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과연 라이프니츠 주장대로 단순한 것은 곧 불멸인 것일까?

 

  “단순하면서도 사라지는 것이 있다.”

  영혼이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멸이라면, 우리의 상식적 믿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내 경우 제사를 지낼 때마다 모친이 강조하는 지침이 있다. ‘문을 조금 열어놓을 것과,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을 모조리 치울 것’이다. 조상님들이 쉽사리, 그리고 불쾌하지 않게 다녀가시도록 해드리기 위한 후손들의 기본적인 예의라고 모친은 믿는다.  그런데 ‘다녀가시는 것’이 공간의 이동을 뜻한다면,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영혼의 이동방식은 무엇일까? 

 

  우리의 상식은 단순한 실체로서의 영혼보다는 살아있을 때와는 다른 어떤 기운(혹은 氣)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유가에서는 사람의 정신은 혼과 백으로 돼 있고,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서양의 형이상학과는 퍽 다른 발상이다.

 

  라이프니츠의 ‘단순해서 불멸’이라는 생각에 제동을 건 철학자는 다름 아닌 칸트였다. 칸트는 영혼이 기하학처럼 증명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생명이 있는 것이 죽어갈 때의 모습을 보라. 서서히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력은 곧 힘의 한 형태이다. 힘은 공간을 차지하는 특성(연장)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힘이란 공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다면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영원하지 않는 경우를 ‘힘’의 경우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동양사상의 혼과 백의 사상은 사람의 정신을 일종의 힘으로 보는 점에서 플라톤과 대륙합리론의 합리적 심리학의 견해와 대척점에 서있다고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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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의 ‘불멸하는 영혼’

  내친 김에 칸트 얘기 좀 하고 넘어가자. 라이프니츠에게 피니시블로를 날렸던 칸트 자신은 영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을까? 혹시, 유가나 주자의 견해처럼 마음이 ‘기’ 같은 힘이라고 생각하고 데카르트-라이프니츠 전통의 대척점에 섰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칸트는 잘 알려진 대로 대륙의 합리론과 잉글랜드 섬의 경험론의 철학적 성과를 잘 버무린 ‘종합의 철학자’였다. 하지만 철학이 ‘존재 ; 나와 세계(타인 포함)’에 대한 해명이라면 칸트의 접근은 매우 창조적이었다.

 

  그의 철학은 과학적 인식(뉴턴의 물리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답을 찾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 해답을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정신에서 찾았다.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객관적 관점에서 주관적 관점으로 바꿔놓았다. 

 

  칸트에게 존재는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었다. 칸트의 구성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 곧 정신은 칸트 철학의 제1주제였다. 인간 정신의 능력을 고찰함으로써 그는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을 확보했다. 

 

  정말 그럴 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마음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 밖의 세계, 곧 순수이성의 세계는 우리 정신 능력을 넘어서 있다고 봤다. 이를 ‘외적 존재에 대한 불가지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혼이 불멸하는 지 아닌 지는 우리 정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바로 여기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철학의 출발이다. 그는 영혼불멸의 문제를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다루면서 ‘영혼은 불멸한다’가 아니라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덕과 복은 일치해야 한다?”

  사실적 진리의 세계는 순수오성의 영역이고, 도덕적 가치와 의무의 세계는 실천이성의 영역이다. 칸트는 영혼불멸의 문제를 이 영역에서 다루었고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 그의 논점은 이렇다.

 

 사람 사는 세상을 보라. 모든 덕 있는 자가 복 받고 잘 살지는 않는다. 또 덕 없는 자가 복을 누리며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완전한 세상은 그래서는 안 된다. 덕 있는 자가 복을 받는 세상이어야 한다. 영혼이 한 세상으로 끝나버린다면 덕과 복은 결코 일치할 수 없다. 그런 세상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러므로 덕과 복의 일치하려면 영혼은 불멸해야 한다.

 

  하지만 좀 억지스럽지 않은가? 세상이 왜 완전해야 하는가? 왜 덕과 복은 일치해야 하는가? 가치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와 칸트의 분류대로 다른 영역의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지난 한 세기동안 벌어졌던 뜨거운 논쟁의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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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쟁은 공리주의의 슬로건,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둘러싸고 더욱 뜨거워졌다. ‘행복은 쾌락’이라는 쾌락주의가 공리주의의 전제라고 지적하고 두 영역을 혼동하면 ‘자연주의의 오류’에 빠진다는 G. E. Moore의 논변은 한 세기를 풍미할 정도로 강력했다.

 

  이 논변은 도덕의 문제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자연주의 철학자’들을 까부시는 ‘전가의 보도’였다. 하지만 금세기 철학의 바람은 ‘자연주의’ 쪽으로 불어가는 거 같다. 컴퓨터와 로봇과 인터넷의 출현은 사람의 ‘마음’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트랜드에 기름을 붓고 있는 듯하다.

 

  붓다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양철학의 영혼론과 대척점에 서있다. 불교는 결코 영혼이나 심리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물리적 실체이든 심리적 실체이든 실체 따위는 없다.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붓다는 아닛짜(無常)와 아낫따(無我)라는 엄연한 사실이 통찰지에 의해 드러난다고 가르쳤다. 아닛짜는 변하지 않는 무엇도 없다는 가르침이고 아낫따는 그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요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가르침이다. 붓다의 이런 가르침은 인간 각각의 마음에 우주(브라만)가 깃들어 있으며, 수행을 통해 참나(아트만)을 찾아야 한다는 힌두교의 전통적 가르침과 결별한다. 붓다는 혁명적 사상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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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0-14 19:48:09 최종수정 2017-10-14 19: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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