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8A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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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수(隋)나라 창업자 양견(AD541-AD604)

 

양견(楊堅)은 서위(西魏)의 홍농군 화음현, 지금의 섬서성 화음시에서 AD541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양충(楊忠)은 선비족 군벌 독고신의 최측근 막료였다.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던 AD534년 양충은 독고신과 함께 서위로 갔고 거기서 서위 실권자 우문태에게 크게 등용되었다. AD557년, 독고신과 양충은 우문태 사후 실권을 계승한 아들 우문각의 쿠데타를 도와 북주(北周)를 건국하는데 수훈을 세웠고 그 공으로 양충은 북주의 수국공(隨國公)에 봉해졌다. 양충은 독고신과 함께 북주 최고 실력자 중 하나가 되었다. 양견의 어머니는 여고조인데 양충의 정부인일 가능성이 크다. 독고신과 관계가 돈독했던 양충은 아들 양견의 부인으로 독고신의 둘째 딸 독고가라를 들였는데 그의 첫째 딸은 우문태의 막내아들 우문륙의 부인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양견은 우문태의 아들이자 황제 우문각의 동생인 우문륙과는 동서지간인 셈이다. 당을 세운 고조 이연의 생모 또한 독고신의 막내딸이었으므로 이연에게 양견은 이모부인 셈이다. 아버지 양충과 장인 독고신의 후광을 업은 양견은 어린 나이에 표기장군직에 올랐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또 다른 북주 실세 중의한 사람은 종실 우문호(護)였다. 그는 우문태의 장조카이면서 황제 우문각, 우문옹, 우문륙에게는 사촌형님으로써 북주 황실로는 큰 어른이었지만 속으로 황실을 넘보면서 양충과 양견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리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양충은 AD568년 61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기 직전에 양충은 양견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우문호와 우문옹은 서로 따르고 복종하기 어려운 사이다.

  따라서 그 어느 편도 들지 않도록 왕래를 조심해야 한다.“

 

 

(2) 북주 조정의 실세 우문호의 우문각 처단(AD557)

 

우문태가 AD556년 죽고 아들 우문각이 천왕(=북주의 황제를 그렇게 부름)에 올랐을 때 나이는 열 다섯 살에 불과했다. 당연히 우문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 그것이 창업자 우문태의 생각이기도 했다. 죽기 직전에 우문태가 섬서 경양에 있던 조카 중산공 우문호를 급히 불러 후사를 간곡히 맡겼음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우문태에게도 여러 아들이 있었으므로 조정에는 직급이 높지도 않고 또 직계도 아닌 우문호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다. 대사도 우근은 우문호에게 다가가 이렇게 조언했다.

 

“ 죽을 각오로 정권을 잡으셔야 합니다.

  만약 조정의 중론이 다르게 모아진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자리를 양보하시면 안 됩니다.“ 

 

다음날 중신회의에서 우근은 이렇게 말했다.

 

“ 지난 번 안정공 우문태가 아니었으면 나라가 이렇게 안정될 수 없었다.

  지금 아들이 어리고 약하니

  당연히 우문태의 큰 형의 아들인 우문호가 

  군국정사를 도맡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우문호가 큰 소리로 외쳤다.

 

“ 이것은 우리 가족의 일이요.

  내가 비록 용매하기는 하나

  어찌 감히 사양할 수가 있겠소.“ 

 

조정대신들은 과거 우문태와 동년배로써 깊은 신임을 받은 우근의 설득에 따라 우문호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문태 사후 정치불안은 상당히 가라앉게 되었다.(AD556년12월) 

 

 

(3) 우문호의 우문각 축출과 우문육 옹립(AD557) 

 

AD557년 우문각이 15세 나이로 천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실권은 대사마(병권장악) 우문호가 장악하였다. 우문호보다 형식적 직급도 높고 또 북주 건국 8공신(팔주국) 원로대신 태부 조귀는 우문호 집권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태보 독고신(양견의 장인)에게 다가가 우문호를 제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독고신은 말렸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우문호는 고귀를 살해했고 독고신은 파직시켰다.

 

그러나 우문호에 대한 제거음모는 삭으러들지 않았다. 특히 강직하고 과단성 있는 우문각의나이가 장성함에 따라 큰 사촌형님 우문호의 집권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었다. 이식, 손항 등은 우문각에게 노골적으로 우문호 제거를 독촉했다. 우문각도 싫지 않았다.여기에 을불봉, 하발제가 동참했다. 우문호 반대 세력이 크게 확대된 셈이다. 우문각도 몰래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문제는 주모자 이식이 장광락을 포섭하려 한데서 불거졌다. 장광락이 우문호에게 음모를 누설한 것이다. 우문호는 즉각 주모자 이식과 손항을 밖으로 내쫓았다. 우문각은 나름대로 그 둘을 안으로 데려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우무호가 우문각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 아무리 친하다 해도 친형제보다 더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형제가 서로 의심한다면 누구를 더 믿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가 어리시므로 태조(우문태)께서 제게 후사를 간곡히 부탁하셔서

  저 마음으로 오로지 가문과 국가를 위하여 이 자리를 맡고 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만기친람 하시는 날은 오히려 제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간사한 무리들이 뜻을 얻어

  폐하를 가리고 사직을 무너뜨릴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참소 비방하는 신하를 믿으셔서 

  골육과 등지는 잘못을 범하지 마옵소서“   

 

우문각의 반감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우문각 측근들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문호의 이식 무리 처단이 가벼운 것을 보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우문호 제거 운동을 펼쳤다. 그 중심에 을불봉이 있었다. 장광락은 그 사실을 몰래 우문호에게 전달했다. 하란상과 울지강과 의논한 우문호는 그들의 권고에 따라 마침내 우문각을 폐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금위병 총책에게 주모자 을불봉을 체포하게 한 다음 하란상을 보내 전항하는 우문각을 강제로  악양공으로 강등시켜 유폐시키고 우문태의 가장 큰 아들 우문육(북주 3대 明帝)을 옹립했다.  

몇 달 뒤 악양공 우문각은 피살되었다.

 

 

(4) 승상 대사마 우문호 제거(AD572) 

 

허수아비 우문륙을 세운 우문호(AD513-AD572)는 나이로나 경륜으로나 북주 조정의 가장 어른이고 강력한 실세였다. 우문태가 죽었을 때(AD556) 그의 지위(승상이었음)를 고스란히  우문호에게 승계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우문호의 숙부이자 북주 시조인 우문태보다 나이로는 여섯 살 아래였지만 명제 우문육(AD534-AD560)이나 그를 AD560년 독살시키고 그 뒤를 이어 세운 우문옹(AD543-AD578) 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다. 그러나 우문호는 난폭하고 무자비하고 탐욕, 방자한 여러 아들 때문에 민심을 크게 잃어가고 있었다. 우문호가 측근인 유계재에게 돌아가는 민심과 하늘의 천문에 대해 물었다. 유계재가 이렇게 답했다.

 

“ 제게 베푸신 은혜가 깊으니 어찌 바른대로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잠시 하늘에 변고가 있을 듯합니다.

  공께서는 정치를 천자(우문옹. 우문호의 조카)에게 돌리시고 

  청컨대 노쇠함을 핑계로 사택에 머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하시면 백세를 누리시고 자손 대대로 하늘의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으시면 다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겠습니다.   

 

우문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 나의 속마음도 다르지 않소.

  다만 황제께서 나의 면직요청을 수락하지 않으셨을 뿐이오.

  공은 이미 황제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게 따로 배알하지 않으셔도 되오.“

 

우문직은 황제 우문옹의 친동생으로 우문호와 매우 가까웠으나 돈구전투(AD567)에서의 패배 이후 파직되어 우문호에게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미 장성한(당시 19세) 황제 우문옹 또한 강력한 실권을 쥔 우문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문직은 형이자 황제인 우문옹에게 다가가 우문호를 제거할 때가 되었다고 부추겼다. 우문옹은 황실친척과 측근을 모아 우문호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이미 우문호에 대한 민심도 많이 추락했다. 우문직, 우문신거, 왕궤 및 우문효백이 가담했다. 제거 계획은 이랬다. 우문호가 임지에서 인사차 수도 장안에 들러 원태후(우문각의 부인)에게 인사를 드릴 때 술을 좀 줄이시라는 편지(酒誥,주고)를 올리게 하고 그것을 읽는 동안 칼로 시해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우문호는 황제가 시키는 대로 원태후 앞에서 주고를 읽어 내려갔다. 뒤에 서있던 황제가 옥정(옥을 된 홀)으로 우문호를 내리쳤고 우문호가 쓰러지자 우왕좌왕하는 환관을 제치고 우문직이 나서서 칼로 베었다. 나이 59세 였다. 우문호가 죽자 황제는 곧바로 궁정에 알리고 우문호의 모든 아들과 승상부의 관료들을 죽여 숙청했다.(AD572) 우문호를 제거한 황제 우문옹은 바로 아래 동생이자 제거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우문헌을 대총재로 가까이 등용하면서 우문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인 대사도로 임명하였다. 우문직은 또 다시 불만에 가득 찼다. 

 

 

(5) 양견의 딸 양려화를 황태자비로 세우다(AD573)

 

조정의 강력한 실권자 우문호를 제거한 황제 우문옹은 아들 우문빈(AD559-AD580)을 황태자로 책봉했고 다음해인 AD573년 양견의 딸 12살 양려화(AD561-AD609)를 14살 황태자비로 간택했다. 양견을 자신 편으로 끌어드린 셈이다. 그러나 황태자 우문빈은 용렬하여  소인배들과만 가까이 했다. 우문효백, 울지운 같은 충신들이 황제 우문옹에게 태자의 교육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권하자 울지운을 태자에 붙여 주었지만 태자는 속으로 매우 불쾌하고 싫어하였다.    

 

(6) 우문직의 반란(AD575년 7월)

 

우문호를 제거하는데 수훈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대총재직을 우문헌에게 뺏긴 우문직은 가슴 가득히 원망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살던 집을 빼앗아 태자궁으로 만들었다. 과거 사냥에서 자신이 함부로 행동한다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채찍을 맞은 적도 있었다. 이래저래 불만에 가득 찬 우문직은 황제가 섬서성 경양으로 순유 나간 때(7월 2일)를 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장안을 지키고 있던 장수 울지운은 훌륭하게 우문직의 반란군을 격퇴했다. 우문직은 하남성으로 도망갔으나 결국 사로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어 유폐되었다가 곧바로 사약을 받았다.        

 

 

(7) 북제의 혼란과 북주의 북제 침공(AD573.7월-9월) 

 

당시 중국 북조의 오른쪽 한 축인 북제(北齊)는 세조 무성제 고담(재위 AD561-AD565)의 사후 음탕한 호태후의 총애를 받은 화사개와 원문요와 같은 간신들이 조정을 장악하며 난정과 폭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 고위의 유모였던 육령훤이라는 궁녀가 미모에 재치를 갖추었으므로 황제는 물론 호태후의 총애를 한 몸으로 받아 막강한 실세로 군림하면서 정치를 어지럽혔다. 황제의 동생 고엄(고담의 아들)이 풍자종과 함께 화사개 타도의 군사를 일으켜 화사개를 참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고엄 또한 황제파인 곡률광(고위의 장인이었음)에게 유폐되고 호태후(생모였음)의 만류와 보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피살된다. 

 

북제는 과거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날렸다가 축출된 조정(祖珽)을 소환하여 정치를 소생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정은 과거의 조정이 아니었다. 악명 높은 유모 육령훤을 황태후로 책봉하려했고 육령훤 또한 조정을 국사 및 국보라 치켜세우면서 좌복야로 승진시키기도 했다.(AD572) 북제 조정은 육령훤-조정-목제파의 간신배 무리와 이에 대항하는 곡률광의 대립으로 치달았다. 곡률광은 조정과 육령훤의 계략에 말려들어 피살되었다(AD572). 북제 조정은 조정, 목제파 및 한장란 세 사람(三貴)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황제 고위는 목황후를 세움과 동시에 호태후를 폐서인하고 대신 육령훤에게 태희라는 태후 버금가는 직책을 내렸다.(AD573) 

 

북제의 정치가 극도로 문란하게 된 것을 틈타 북주는 대대적인 침공계획을 세웠다. 위효관이 북제 공략의 세 가지 계책을 올렸다. 습격이 제일이라는 것, 습격하지 못한다면 북제 내부를 이간질시켜야 한다는 것, 그도 저도 아니면 즉시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쪽에 있던 진욱의 진(晉)도 오명철, 배기와 같은 장수를 보내 이미 북제를 공격하고 있었다. 우문옹은 즉각 토벌하기를 선택했다. 북제토벌의 북주군 선봉에 양견이 있었는데 우문헌이 양견을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우문옹의 측근 내화가 깊이 양견을 두둔하는 것을 듣고 죽이지 않았다. 내화는 이미 오랜 전에 양견의 미래를 내다보고서 양견에게 살육을 절제하라고 충고했던 사람이다. AD575년 7월 우문옹이 6만의 군사로 북제의 낙양 부근 맹진을 공격했으나 병이 나는 바람에 전군이 회군하여 돌아왔다.(AD575년 9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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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0-05 1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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