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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하지 않는 사랑 

  젊음이란 특권이기도 하지만 무척 무거운 짐이다. 나이 들어 보니 비로소 알 것 같다. 수행처에 오는 수행자들을 보더라도 나이가 젊을수록 고뇌의 표정을 짓고 다닌다. 사야도 인터뷰에서 한 애기보살이 물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출가할까 말까를 망설이는 중이라고 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왜 마음이 이렇게 슬픈가요? 좋아하던 사람이 떠나서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은데요.”

  사야도는 이 질문에 대해 꽤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다. 의외였다. 마음에 슬픔이 있는 건 슬픔이 집착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맘껏 사랑하라고 말했다. 집착 없는 사랑을. 

  우리가 늘 말하는 사랑은 보통 열정을 지칭한다. 열정은 욕심이고, 번뇌이고, 집착이다. 젊은이들은 그걸 죽었다 깨도 모른다. 사야도께서 그렇게 의외로 길고, 친절하게 젊은이의 질문에 응답한 것은 안타까움에서였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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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야도는 설명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미움과 마찬가지로 집착의 한 형태이다. 집착의 사랑과 집착의 미움은 고통을 낳는다. 행복하라! 집착에서 자유로워져라! 그리고 맘껏 사랑하고 미워하라!

  무집착의 사랑을 ‘메따’(자비)라고 한다. 미운 사람에게도 자비를 보낼 수 있다면 비로소 집착에서 놓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던 이 애기보살은 며칠 후 보이지 않았다. 사야도의 법문을 이 애기보살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K거사의 ‘날마다 좋은 날’

  쉐우민에서 사야도 인터뷰는 언어별 그룹별로 진행된다. 인터뷰에서 수행자들은 각자의 체험을 보고하고 수행을 점검받는다. 인터뷰는 5일에서 7일 간격으로 진행되는데 K거사는 좀처럼 인터뷰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수행의 이력이 다양한 만큼 여러 사람이 그의 체험을 궁금해 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냥 이대로 좋습니다. 모든 게 좋습니다.”

 

  운문선사의 ‘日日是好日’의 체험을 보고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수행이 여일하여 나날이 진보하는 그런 경지를 보고하는 것으로 나는 알았다. 그러나 사야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완곡하지만 수행의 잘못됨에 대한 꾸짖음이었다. 심지어 “저런 수행자는 두타행을 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두타행이란 목숨을 겨우 유지할 정도의 최소한의 의식주만을 유지하면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두타행 수행자들은 공동묘지의 무덤이나 버려진 시체 옆에서 시신을 쌌던 천 조각을 모아 옷을 지어 입고 삶의 실상을 뼈저리게 체험하기 위해 수행한다. 사야도의 눈에는 K거사가 아무런 절실함이 없이 ‘날마다 좋은 날’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것으로 보였을까? 사야도가 K거사를 깨우쳐주려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삶에서 정 떼기 

  두타행자들은 왜 두타행을 하는가? 사야도는 왜 K거사에게 두타행이라도 하라고 말했을까? 다음은 사사나 스님의 코맨트이다. “지혜와 깨어있음으로 날마다 좋은 날이어야지 무명으로 좋다, 좋다하면 앎의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

  곁에서 보기에도 K거사의 하루하루는 편안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사야도는 그 평화로움 때문에 K거사가 무명 속에 계속 머물게 될까봐 그것을 경계한 것이리라. 삶 속에 어찌 괴로움만 있으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한 날도 있겠지. 그래서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을 거’란 유행가 노랫말처럼 우리는 삶을 견디며 그렇게 사는 거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 늙고 병들고 삶을 마치게 되겠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붓다는 이런 삶이 결코 좋은 삶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오히려 “이 세상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고까지. 세상이 좋아 보이는 건 집착 때문이라고. 좋은 세상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비로소 나타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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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게 집착 버리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싫은 것을 피하긴 비교적 쉽지만 좋은 것을 버린다는 건 너무너무 어렵다. 두타행의 수행은 이렇게 지긋지긋한 집착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일견 좋아 보이는 삶에서 정떼기였다.

 

  “김치를 못 먹어도 괴롭고 먹어도 괴롭다.” 

   한국 사람에게 김치는 부식 이상이다. 마늘을 넣어 버무리는 김치는 과거 국제사회에서 기피음식이었다. 하지만 국력의 신장과 함께 이제 김치는 세계적 음식이 됐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 사람과 김치와의 인연은 질기고도 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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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쉐우민에서도 그렇다. 쉐우민에 오래 머무는 한국 보살들은 배추를 구해서 김치를 담가 먹는다. 사야도도 그런 사실을 아시는 듯하다. 인터뷰 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김치를 못 먹어 괴롭다고 한다. 하지만 김치를 먹는 것 역시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신랄한 비판이다. 멀리서 수행하겠다고 온 사람들이 수행의 관문에 조차 들어오지 못했다는 법문이기 때문이다. 

  괴로움(dukkha)을 아는 것은 수행의 관문이다. 붓다는 세상이 괴로움만으로 꽉 차있다고

가르쳤다. 그렇지 않고 세상 어느 곳엔가 궁극적인 행복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만을 찾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딘가 그런 것이 있다고 믿고 그리고, 그 믿음대로 분투하면서 살아간다.

  괴로움을 알아야 진정한 수행은 시작된다. 세상을 벗어나야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세상을 버린다. 또 그렇게 세상을 얻는다. 야보도천의 말처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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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움은 진리이다

  세상에 괴로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단연코 그러하다. 이따금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있다. 스스로의 고통을 즐기는 매저키스트와 남의 고통을 즐기는 새디스트의 경우가 그렇다. 이 점에서 고통과 괴로움은 다르다. 둘의 교집합은 있겠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고통은 우리말로 아픔이다. 육체적 아픔이 일차개념이고 마음 아픔은 은유적 표현이다. 보통의 경우 아픔은 괴로움에 속한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삶은 괴로움이다. 행복이 괴로움의 상대어라면 사람 사는 세상에 어디에도 단연코 행복 따위는 없다. 붓다가 그렇게 말했다.

  붓다의 논리는 매우 정연하다. “사람의 삶을 보라!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행복인가?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있었겠지. 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되던가? 그 까닭은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잠시 모여서 된 것을 나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세상 어디에도 나는 없고 세상 어디에도 나의 행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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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절하지 않은가? 우리의 삶이. 그렇다. 처절하다.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그래서 법(진리)이다. 법을 안다는 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남은 한 가지 방법이다.

 

  ‘와서 보라’

  삶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 어느 곳에도 행복이 없다면, 그렇다면 수행은 왜 하는가?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중생들에게 전하면서 늘 ‘와서 보라’고 말했다. 중생의 삶이 겪는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남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 설했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시작해서 괴로움에서 끝난다. 괴로움은 결코 인간의 주관적 믿음이나 생각이 만든 관념이 아니다. 괴로움은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모든 존재의 속성이다.

  그래서 ‘와서 보라’이지, ‘먼저 믿어라’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은 어리석음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지혜이다. 세상을 꽉 채우고 있는 괴로움은 그래서 성스럽다. 세상을 벗어나도록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움에 대해 뼈저리게 알아야 한다. 앎은 삶을 바꾼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 사실을 아는 순간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달라지듯.

  삶의 태도를 바꾸지 못하는 앎은 뼈가 저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앎이다. 삶의 괴로움을 뼈저리게 아는 순간이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여기서 황벽희운 선사의 시 한 구절...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추위가 한 차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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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25 10: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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