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7H) : 후조(後趙)의 흥망성쇠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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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1) 석호의 세자책봉 의론 : 열 살짜리 석세를 세움(AD348)

 

태자 석선이 비명에 가자 석호는 당장 후계자를 세우고자 했다. 태위 장거는 연공 석빈과 팽성공 석준 중에서 선택하자고 추천했다. 석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융소장군 장시가 나서서 반대했다.

 

“ 연공 석빈의 어머니는 비천한 출신인데다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고   

  팽성공의 어머니 정씨는 태자 석수의 친모로써 석수 폐위 때 쫓겨난 일이 있으니 

  적절하지 못합니다.“

 

장시는 석호가 늦게 얻은 애첩 유요의 딸 안정공주에게서 낳은 석세를 후계로 세울 생각이 있음을 알았고 그렇게 되면 유씨가 태후가 되니까 실권을 장악할 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시가 적극 나서서 석세를 옹호하며 말했다.

 

“ 폐하께서 두 번이나 태자를 세우셨으나

  그 모후가 다 비천한 출신이었으므로 이런 화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땅히 어머니가 귀한 사람이고 효자인 사람을 후계로 세우셔야합니다.“

 

석호가 호령했다.

 

“ 경은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내가 태자가 있는 곳을 알고 있소.“

 

갑론을박 끝에 석호는 석세를 후계자로 세웠다. 나이가 열 살이었다.

  

 

(52) 석호의 황위 등극과 요익중의 석호 질책(AD349)

 

조왕 석호는 이제야 황제로 등극했다. 섭조천왕이 된지 12년 만의 일이다. 동궁의 휘하에 있다가 량주(감숙성)로 귀양가던 10만여 병사들은 모두 무력과 체격이 뛰어난 장사들이었는데 감숙성으로 가던 도중 책임인솔자 양독의 지휘아래 반란을 일으켜 가던 길을 돌아왔다. 그들의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갑옷과 무기가 없이도 한 명이 열 명 이상을 감당하였다. 양독은 스스로를 진의 정동대장군이라 칭하면서 장안으로 진격해왔다. 장안을 지키던 낙평왕 석포가 모든 정예병을 가지고 막았으나 한 번 만에 격파되었다. 양독의 군사는 동쪽으로 나아가 동관을 함락하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석호가 이농을 대도독으로 삼아 10만 기병으로 토벌하게 했으나 이농 또한 신안에서 크게 패하여 막아내지 못하고 성고로 퇴각했다.

   

양독은 더욱 동쪽으로 나아가 형양, 진류의 여러 군을 노략질했다. 석호는 무공이 뛰어난 아들 연왕 석빈에게 전권을 주고 관군대장군 요익중과 거기장군 포홍과 더불어 방어토록 했다.

 

요익중은 자신의 휘하 8천 기병을 이끌고 업에 도착하여 알현을 요청했다. 석호는 병중 이었으므로 직접 나오지 않고 음식만 하사했다. 화가 난 요익중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 주상이 나를 불러서 도적을 처치하라고 불렀으니

  마땅히 만나 보고서 방략을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나보고 밥만 먹고 가라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밥을 먹으러 왔단 말입니까?

  또 내가 직접 주상을 보지 못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안 단 말입니까?“

 

석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접견했다. 요익중은 석호를 크게 나무랐다.

 

“ 어린애가 죽어서 근심하는가?

  병 때문에 근심인가?

  자식이 어렸을 때 좋은 스승을 붙여 가르치지 않아서 반역에 이르기까지 했고

  또 그런 아들을 죽였으면 또한 어찌 근심하는가?

  너는 오랫동안 병이 들었는데

  세워 놓은 사람이 어린아이이니 네가 쾌유되지 않으면

  세상은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 아닌가. 그것을 먼저 걱정해야지 

  어떻게 도적 떼 들을 걱정한단 말이냐.

  양독이란 놈은 궁색하고 고단하여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저러는 것이니

  잔폭한 짓을 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는가.

  이 늙은 강족 요익중이 너를 위하여 한 번에 처리하고 올 것이다.“

 

요익중은 강직하고 사나워서 누구한테든 너라고 불렀으므로 석호도 책망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사지절과 정서대장군 직책을 내렸고 갑옷과말을 하사했다. 요익중은 인사도 하지 않고 말을 달려 나갔다. 석빈과 힘을 합해 양독을 형양에서 격파하고 머리를 벤 다음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처단했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서평군공과 함께 칼을 차고 전작에 오를 수 있도록 허락하고 포홍에게는 거기대장군 약양군 및 옹주자사를 내렸다. 

  

 

(53) 석호의 와병과 혼란(AD349)

 

4월 석호의 병이 심해졌다. 석호는 팽성왕 석준에게 대장군 직을 주어서 관중의 오른쪽을 방어하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삼아서 상서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장시는 진위대장군 및 영군장군 이부상서로 삼아서 석빈과 함께 정사를 나누어 보도록 했다. 태자의어머니 유후는 석빈의 정치보좌를 싫어하여 장시를 꾀어서 석빈을 도모하게 하였다. 장시는 사냥으로 양국에 가있던 석빈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 주상의 병이 이미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사냥을 좀 더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빈은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사냥과 음주를 계속했다. 유황후와 장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조서를 고쳐서 불충하고 불효한 석빈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장시 동생 장의에게 무사 500명으로 석빈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AD349년4월9일)

 

4월 19일 석준은 유주에서 업성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뵐 수가 없었고 다만 금병 3만 명을 배속 받고 임지(관중의 오른 쪽)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차린 석호가 석준의 도착을 물었는데 이미 떠난 지 한참 뒤였다. 석호를 호위하는 군사들은 연왕 석빈을 근위병사의 책임을 맡게하고 황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했으나 연왕을 불러도 유황후와 장시가 가로막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석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자 인새를 직접 가지고 연왕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호의 마음이 석빈에게 있음을 알아챈 유황후와 장시는 다시 조서를 고쳐서 석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았다. 최고의 군권이 장시에 쥐어진 것이다. 시중 서통은 절망에 빠져 음독자살하고 말았다.(4월22일) 그 다음날 석호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열 살 태자 석세가 즉위하고 유씨가 유태후가 되어 황제를 대행했다. 장시는 태위 장거와 사공 이농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장거가 사이가 좋았던 이농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이농은 즉시 식솔을 데리고 도망갔다.

 

 

(54) 석준의 무혈 쿠테타 집권(AD349)

 

팽성왕 석준이 하내에 이르렀을 즈음 아버지가 죽은 소식을 들었다. 요익중과포홍과 석민이 양독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이성(하남성 온현)에서 석준을 만났다. 이들 노장들은 석준이 장자이고 도 무공이 혁혁한데다가 석호가 장차 후사로 생각했었으나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 지고 현혹되어 장시와 유후에게 휘둘렸다고 말하면서 장시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쉽고도 바른 길이라고 설득했다. 석준도 동의했다. 군사를 돌이켜 이성을 출발해서 업성으로 들어가니 주변의 낙주자사 석준과 유국도 합류했다. 석준의 군사들은 탕음(하남성 탕음현)에 진을 쳤는데 융졸이 9만이었고 석민이 선봉에 섰다. 주변 성읍의 주민들은 물론 업성의 주민들도모두 다 석준에게 부응하여 왔다. 간사한 우복야 장리마저 마지막에는 장시에게 등을 돌리고 성문을 열어 석준의 군사를 영입했다. 다급한 유황후와 장시는 석준에게 있는 직책을 총동원하여 환심을 사려 했다. 승상, 영대사마, 대도고, 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가 석준에게 내려진 직책이었고 덧붙여 황월과 구석(황제만 가질 수 있는 물건 아홉 가지) 내렸다.  

  

14일 석준이 업 부근에 도착하자 장시가 몸소 나아가 영접했는데 석준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가 다음날 평락시장에서 목을 베었고 삼족을 멸했다. 유씨(유태후 였다)의 명령을 빌어서 석준이 황위를 이어받도록 했다.(AD349년 4월 16일) 석세를 폐위하여 초왕으로 책봉하고 유씨도 태비로 책봉한 다음 얼마 후 모두 죽였다. 옛 연왕 석빈의 아들 석연을 태자로 삼았으며 석감을 시중 및 태부, 낙평공 석포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일등공신 선봉장 석민에게는 도독내외군사 및 보국대장군이라는 최고의 군사직을 수여했다.  

 

 

(55) 모용황의 내침계획(AD349)

 

사흘 뒤 4월 19일 업성에 태풍이 불었다. 집채만 한 나무가 뽑히고 바가지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궁궐에 큰 불이 한 달 이상 꺼지지 않는 바람에 많은 누각과 궁전이 불에 탔다. 승여나 어복도 절반 이상 타버려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때 패왕 석충은 계성(북경)에 진수하고 있었다. 동생 석준이 석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앉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석준 토벌군대를 일으켰다. 5만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내려오는 동안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정의로운 군사에 동참을 호소했다. 옛 조나라와 연나라 지역에서 구름처럼 지원군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10만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 석준은 석충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군사를 돌리라고 권유했다.

 

석충은 부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군사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석준은 석민과 이농에게 정예군 10만을 주어 격퇴시킬 것을 명령했다. 석충의 10만 군사와 석준의 10만 군사는 평근(하북성 석가장 동남쪽 조현부근)에서 싸웠는데 석충이 크게 패하였다. 석충은 도망가다가 원지에서 붙잡혀 참수되었고 군사 약 3만 명은 매몰되었다.

 

석민은 석준에게 석호의 명령에 따라 관중지역, 즉 진주(섬서성 중남부)와 옹주(산서성 서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포홍이 장차 국가의 위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당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종용했다. 석준이 포홍의 옹진주도독직을 파면하자 포홍은 화가 나서 동진에 투항하고 말았다.

 

석호의 죽음과 그에 다른 승계문제로 후조 조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린 것은 북쪽의 전연이었다. 평적장군 모용패가 작년 AD348년 모용황이 죽은 다음 계승한 그의 아들 모용준에게 편지를 써서 지금이야말로 한 칼에 후조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북평태수 손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아버지 대상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답답하다고 느낀 모용패가 말을 달려 용성으로 가서 모용준을 설득했다.

 

“ 잃기는 쉬워도 얻기가 어려운 것이 기호입니다.”

 

모용준이 말했다.

 

“ 업에서 비록 혼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등항이 낙안을 점거하고 있으니 쉬운 일이 아니요.

  군사는 강하고 곡식은 충분한데 

  바다로는 내려 갈 수가 없으니 노룡으로 가야 할 텐데 

  그 지역은 험준하기 이를 데가 없지 않소?“  

 

모용패가 응답했다.

 

“ 등항의 군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대군이 몰아치면 순식간에 와해될 것입니다.

  신을 선봉으로 세워 주신다면 동족 도하(요녕성 금주)로 나아간 다음에

  영지(하북성 천안)를 끼고 내려와 전격적으로 공격하면 

  적군은 그대로 놀라 무너지고 궤멸될 것입니다.“    

 

모용준은 미적거리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오재장군 봉혁에게 물었다. 봉혁이 대답했다.

 

“ 군사를 쓰는 방법이란

  적이 강하면 지혜를 쓰고 

  적이 약하면 형세를 쓰는 법입니다.

  따라서 큰 것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은 이리가 돼지를 먹는 것과 같고

  잘 다스려진 것으로 혼란한 것을 교체하는 것은 

  마치 태양이 눈을 녹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전부터 덕을 쌓으시고 인정을 베푸셨으니

  군사는 강하고 병졸은 훈련된 정예군입니다.

  석호와 그 아들들의 난폭한 정치가 극에 달한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하루라도 빨리 건져주기를 목을 빼어 고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계성을 빼앗고 다음으로 업도(하북성 임장현)를 향하여 기치를 높이시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고서 대왕을 환영할 것입니다.

  흉적들은 깃발만 보고도 얼음 부서지듯 할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종사중랑 황홍은 이렇게 말했다.

 

“ 지금 태백성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세성은 필성의 북쪽에 모이고 있으니 

  음국이 천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서둘러 군사를 펴십시오.“

 

절충장군 모여근도 거들었다.

 

“ 중군의 백성들이 석씨의 폭정에 쪄들어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모두가 주인을 바꾸고 끓는 물과불 속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천년에 한 번 오는 기회이니 놓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한 목소리로 전쟁을 원하자 모용준이 웃으며 이들의 말을 쫓았다. 20만 군사를 모아 준비에 들어갔다.(AD349년 4-5월)

  

 

(56) 석감의 쿠테타와 석민(염민)의 쿠테타(AD349)

 

지난 4월 석세의 조정을 무너뜨릴 때 석준은 석민에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정작 쿠테타가 성공하자 자신의 아들 석연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었다. 군권을 쥐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려던 석민은 석준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드러내지 않고 휘하 장수들에게 많은 상훈을 내려서 환심을 샀다. 석민의 생각을 알고 있는 석준은 석민이 내린 상훈을 대부분 거절하거나 깎아내려 버렸다. 장수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서령 맹준과 좌위장군 왕난은 석민의 병권을 서둘러 빼앗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석준에게졸랐다. 석준은 석시 종친 대신 석감과 석포와 석소 등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들의 생각은 한 결 같이 석씨 성이 아닌 석민을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태후는 반대했다. 

 

“ 극노(석민의 어릴 적 이름)가 없었으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조금 교만하고 방종하다고 어찌 이리 급히도 죽일 수가 있겠소?“ 

 

석감이 몰래 빠져나와 환관 양환을 보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석민은 이농과 왕기 겁박하여 석준 폐위를 모의한 다음 장군 소언과 주성에게 갑옷을 입혀 3천 군사로 남대에서 석준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석준은 태연히 부인과 바둑을 두다가 주성에게 물었다.

 

“ 주모자가 누구냐?”

 

주성이 말했다.

 

“ 의양왕 석감이 당연히 즉위 해야겠지요.”

 

석준이 말했다.

 

“내가 오늘같이 며칠 만에 물러나야 하는데

 석감은 며칠이나 가겠느냐?“

 

석준은 잡혀서 그날로 곤화전에서 참수되었고 정태후, 태자 석연, 맹준, 왕난 장비가 같이 죽었다. 석감이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석민은 대장군, 녹상서사 및 무덕왕에 봉해졌다. 사공 이농은 대사마, 낭개가 사공 노심이 중서감이 되었다. 석감은 불만을 지닌 채 서쪽 고향으로 쫓겨 가는 포홍 세력들을 무마하기 위해 업에 포로로 있던 포홍의 아들 포건을 풀어주면서 포홍에게는 도독관중제군사, 정서대장군 및 옹주목, 영진주자사로 삼았다. 

 

석감은 석민이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몰래 낙평왕 석포와 중서령 이송 등에게 야밤을 타고 궁중에 거처하는 석민과 이농을 습격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하고 궁궐이 소란해지면서 황궁무사와 석민군사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황제 석감은 발뺌을 하기 위해 이송과 석포를 잡아 죽여서 자신과 무관한 일임을 보이려 했다. 석민이 일단 승기를 잡고 석감을 유폐시키면서 일은 그렇게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석민 일당에게 반감을 가진 석호의 아들 석지는 요익중과 포홍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임지인 양국에서 군대를 몰아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석민은 이농과 7만 군사로 석지를 대응했다. 석감을 지지하고 석민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궁성 내에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중령군 석성과 하동태수 석휘가 석민과 이농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고 손복고도 황제 석감의 밀지를 받고 석민을 공격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했다. 손복도는 석민의 칼에 죽고 석감은 유폐되었으며 궁궐 안에서 무기를 들고 잇는 자는 모두 참수되었다. 한족이었던 석민은 명령을 내려서 한족으로써 호족과 갈족과 같은 이민족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는 문관의 경우 3등급을 올려주고 무관은 모두 아문을 제수한다고 했다. 하루에 수만 명, 전체적으로 20여 만 명 이민족 목이 날아갔다. (AD3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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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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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21 16:33:00 최종수정 2017-09-21 16: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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