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7E) : 후조(後趙)의 흥망성쇠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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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9) 유요의 죽음(AD328)

 

석감의 공격을 받은 전조의 군사들이 퇴각하면서 술에 취한 유요는 달아나다 말이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졌고 10여 군데 칼과 창을 맞은 뒤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전조의 군사는 대패했다. 석륵이 명령을 내렸다.

 

“ 잡고자 하는 사람을 잡았으니 

  적군이 도망가게 내버려두라. “ 

 

유요가 석륵을 보자 말했다.

 

“ 석왕은 중문에서의 맹세(重門之盟, 하남성 휘현의 북문)를 기억하시오?”

 

중문에서의 맹세란 18년 전 유총과 유요와 석륵이 서진 태수 배정을 포위하면서 맺은 우호의 맹세를 말한다. 

 

석륵은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 하였다.

 

“ 오늘의 일은 하늘이 만든 것이오.

  다시 옛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석륵은 유요를 다그쳐 빨리 항복하라는 편지를 아들 유희에게 띄울 것을 재촉했다. 유요는 유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와 사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마라.”

   

석륵은 이마를 찌푸리며 화를 냈다. 한 참 지나서 유요를 처단했다.(AD328년12월)

 

 

(30) 전조의 멸망(AD329)

 

낙양이 석륵에게 점령되고 아버지 유요가 잡혀 죽자 태자 유희는 남양왕 유윤과 함께 당장 서쪽, 즉 지금의 감숙성 방향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상서 호훈이 말리며 나섰다.

 

“ 비록 주군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국의 강토는 건재하고

  장수와 병사들 또한 배반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힘을 합하여 막을 생각을 않고 먼저 도망갈 생각부터 하십니까?

  힘으로 막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도망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   

 

남양왕 유윤은 호훈이 자신을 막아서는 것에 분함을 느끼고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전조의 백관을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달아났다. 조정이 떠나버린 전조의 도읍지 장안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몇 몇 잔당들이 장안을 점거하다가 결국 석륵에게 모두 투항하고 말았다. 남양왕 유윤은 수 만 군사를 이끌고 천수를 나와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AD329년8월)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살고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모두 유윤에게 호응했다. 군사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윤군은 서안 북쪽 50KM 지점인 중교(섬서성 예천)까지 도달했다. 석륵 휘하 석생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치중했다. 석륵의 부하 중산공 석호가 2만 군사로 지원을 오고 있었다.

 

AD329년 9월 석호의 군사가 의거(감숙성 영현)에서 유윤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유윤군사는 황급히 상규(감숙성 천수)로 도망쳤다. 석호는 끝까지 뒤를 쫓아 결국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그리고 공경 이하 3천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살해하고 유민 9천 명을 수도 양국(산서성 임분)으로 압송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 져 살고 있는 흉노무리 5천여 명을 낙양까지 끌고 와 거기서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이로써 AD304년 선비족 유연에 의해 건국된 전조는 25년 만인 AD329년 9월 같은 선비족 석륵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저족의 추장 포홍과 강족의 우두머리 요과중도 나아와 석호에게 항복했다. 석호는 저족과 강족 15만 두락을 하남성과 하북성으로 이사시켰다.     

 

 

(31) 석륵이 대조천왕(大趙天王)이 되다.(AD330)

 

건국한지 25년 된 전조를 멸망시킨 석륵은 스스로 대조천왕(大趙天王) 및 행황제사(行皇帝事)라고 불렀다. 아직 황제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황제라고 자칭한 전조를 멸망시켰으므로 황제직을 임시(영)로 대행한다는 듯을 품고 있는 직책이다. 열 여섯살 된 큰아들 석홍(石弘:AD314-AD335)을 세자에 책봉했다. 둘째 아들 석굉에게는 대선우,  표기대장군 및 도독 중외제군사, 셋째 아들 석빈에게는 좌위장군 및 태원왕, 그리고 막내아들 석회에게는 보국장군과 남양왕을 책봉했다. 그리고 입양한 동생 석호는 태위 및 상서령으로 임명했고 석호의 아들 석수와 석감에게도 제왕 및 팽성왕을 책봉했다.(AD330년2월)

 

중산왕 석호는 이번 인사에 매우 불만이었다. 

 

“ 대선우라는 자리를 자신에게 주어야 하는데 

 ‘노란 주둥이 비첩의 아들(석홍을 말함)’에게 주다니 

 기가 막혀서 잠도 못자고 먹을 수도 없다. 

 주상이 안가(사망)하기까지 기다리다가는 종족이 남아있지를 못하겠네.”

 

석륵의 신하들은 계속해서 천자의 자리에 오를 것을 재촉했다. 석륵은 결국 9월 황제를 칭하고 제위에 올랐다. 부인 유씨를 황후, 아들 석홍은 황태자로 올려 책봉했다. 

 

(32) 충간의 기개를 살려라 : 궁궐 건축을 반대한 속함을 살림(AD331)

 

황제가 된 석륵은 도읍지 업에 거대한 궁궐을 지을 생각이었다. 정위인 속함이라는 자가 극렬하게 반대하며 나서자 석륵은 그의 목을 벨 참이었다. 중서령 서광이 나서서 석륵에게 말했다.

 

“ 속함의 말을 채용할 수 없으면 채용안 하시더라도

  신하의 말 하는 것은 용납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어느 날 아침에 바른 말을 했다고

  경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신하의 목을 자르신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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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끔해진 석륵은 탄식하며 말했다.   

 

“ 임금이 되어서 스스로 이런 일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필부가 비단 100필만 있어도 집을 구하려고 난리일 텐데

  사해를 소유한 임금이 무엇을 못 하겠느냐.

  궁궐을 꼭 지어야 할 것이지만

  임금의 처사에 반대하는 신하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니

  궁궐 짓는 명령을 거부한 신하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도록 하라.“

 

속함에게 비단 100필과 벼 100곡을 하사하였다. 또 해마다 현량과 방정을 추천하도록 조서를 내렸으며 등용된 현량방정도 새로운 인사를 널리 추천하도록 하였다.       

  

 

(33)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물은 석륵(AD332)

 

황제가 된 석륵이 정초에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열면서 물었다.

 

“ 나를 옛날과 비교한다면 

  어떤 황제와 견줄 만하오?“

 

중서령 서광이 대답했다.

 

“ 신과 같은 폐하의 무공과 모략은 한 고조(유방)을 지나치시니

  후세에도 비교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석륵이 껄껄거리며 대답했다.

 

“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겠소. 경의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소.  

  한 고조를 만나면 당연히 북면하고 신하로써 섬겨야 할 것이고

  한신과 팽월을 만난다면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고

  만약 후한 광무제를 만난다면야 서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를 것이요.

  대장부는 마땅히 공명정대하여 마치 해와 달같이 밝아야 할 것이지

  조맹덕(조조)이나 사마중달(사마의)처럼

  고아(유비의 아들을 의미)나 과부(손권의 부인)를 속여 

  여우처럼 천하를 빼앗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요.“

 

석륵은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학생들에게 책을 많이 읽도록 권고하고 또 그들에게 책의내용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역사를 통해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귀담아 들었으며 그것을 논평하기를 좋아했으므로 괄료들 또한 석륵의 깊은 통찰과 이해력에 존경심을 보냈다.     

 

(34) 동생 석호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AD332)

 

우복야 정하가 석륵에게 조용히 말했다.

 

“ 중산왕 석호는 용감하고 사나우며 권모술수와 지략을 모두 갖추어

 다른 사람들이 따라 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폐하 외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는 듯 오만하게 행동하며

 또 내심 지난 해 인사에 대한 불만도 쌓여 있으니

 앞으로 어떤 못된 일을 할지 모릅니다.

 서둘러 그를 제거하셔서 커다란 계책을 편하게 이루셔야 합니다.“

 

석륵이 말리면서 말했다.

 

“ 아직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다.      

  태자 석홍도 아직 어린아이다.

  중산왕은 골육지친으로 나의 천명을 진심으로 도운 공로를 가지고 있다.

  마땅히 이윤과 곽광의 역할을 해야 할 터인데

  어찌 경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요.

  태자의 외삼촌으로써 권력과 부귀를 멋대로 못할 것이 두려워 그런 것이요?

  내 죽을 때 마땅히 경을 고명대신으로 삼을 것이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오.“  

 

정하가 문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 신이 염려하는 것은 국가의 공적인 일이지

  개인의 사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충언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중산왕이 비록 황태후께서 직접 기르셨지만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며

  비록 작은 공로를 세우기는 했지만

  그의 생부와 친속들에게 충분히 은혜와 영광을 베푸셨습니다. 

  불만에 가득한 그의 내심을 볼 때 만약 그를 일찍이 제거하지 않으신다면

  종묘에 따뜻한 제사가 올라오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

 

석륵은 끝내 석호를 미리 제거하라는 정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하가 나오면서 서광에게 그것을 알리자 서광 또한 걱정하면서 말했다.

 

 “ 중산왕은 우리 두 사람에게 이를 갈고 있는데

   만약 변고라도 생긴다면

   나라는 물론 우리 두 집안에도 화가 미칠 것이요.“

 

서광이 수심이 가득한 석륵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 어찌 폐하께서는 뱃속의 질환(석호를 암시)은 걱정하지 않으시고

  나라를 통일하는 것에만 몰두하십니까?

  지금 석호를 그냥 두시면 반드시 황실을 기우릴 것입니다.

  최근에 보면 중산왕은 황태자마저 가볍게 여기는 듯한 기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둘러 대책을 세우십시오.“

 

그러나 석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황태자 석홍에게 직접 정치를 보살피는데 참여하도록 했다. 중대한 정벌이나 사형집행 이외의 모든 정치는 석홍에게 위임하여 서둘러 황태자 권위를 세우도록 했다. 황태자를 돕는 일은 중상시 엄진이 도맡았다. 엄진이 아니면 황태자는 아무 것도 결정할 수가 없게 되자 엄진의 권한은 석호를 능가했다. 석호의 집에는 인적이 끊겨 참새 틀을 놓을 수 있을 정도(可投雀羅)로 한산해졌다.   

 

 

(35) 석륵의 죽음과 석호의 무혈쿠테타(AD333) 

 

AD333년 여름 석륵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산왕 석호는 금중에 들어와 직접 병수발을 들면서 모든 조서를 좌지우지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궁궐 밖에서는 석륵의 병환의 정도가 어떤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석호는 외지에 나가있는 진왕 석굉(석륵의 친 아들)과 팽성왕 석감(석호의 아들)을 수도 양국(형태)으로 불러 들였다. 병에 차도가 생겨 나아진 석륵이 곁에 있는 석굉을 보고 물었다.

 

“ 어찌하여 업성을 지키지 않고 이곳에 있냐.

  왕을 부른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온 것이냐?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면 당장 목을 벨 것이다.“  

 

석호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 폐하가 걱정이 되어 스스로 온 것입니다.

 당장 임지로 보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석호는 즉시 석굉을 억류했다. 며칠 뒤 석를이 석굉이 어디 쯤 갔냐고 묻자 절반 정도는 것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석륵이 유언을 내렸다.

 

“ 석홍(석굉과 석회) 형제는 마땅히 서로를 잘 보호해야 하느니라. 

  사마씨가 앞서 간 수레와 같으니라. 

  중산왕은 주공 단과 곽광을 생각하며 처신에 조심하여

  사람의 입에 오르지 않도록 유념하라.“

 

그리고 석륵은 죽었다(AD333년 7월21일). 이 때 나이는 59세였다. 석호는 즉각 석홍을 통제한 뒤 정하와 서광을 감옥에 가두고 아들 석수를 불러 궁궐을 장악했다. 석홍이 두려워 자리를 양위하려고 하자 석호가 말했다.

 

“ 군주가 죽으면 당연히 아들이 즉위하는 법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석홍이 그래도 계속 사양하려하자 석호가 말했다.

 

“ 만약 무거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면

  천하 사람들은 당연히 마땅하고 옳은 길을 찾을 것인데

  미리 겁을 먹고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석호의 종용에 따라 결국 석홍이 등극했다.(AD333년 7월 말) 석홍은 8월 중산왕 석호에게 승상⦁위왕⦁대선우로 삼고 백관을 통할하게 하였다. 정하와 서광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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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8-31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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