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 흥망의 교훈:#5E 졸지에 건국하고 망해버린 전조(5)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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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2> 유총의 왕침의 양녀 간택과 왕감의 충간과 죽음(AD318년 4월)

 

유총의 정비 황후는 상황후 번씨, 좌황후 유씨, 그리고 우황후 근씨의 세 명이었다. 그 외에도 귀인, 귀빈, 부인 등 황후의 인새를 지닌 여인은 7명이나 더 있었다. 근씨가 죽자 유총은 생모 장태후의 시녀였던 번씨 성을 가진 여자를 근화후 대신 들였다. 대장군 유부가 나서서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유부는 걱정과 화를 못 이기고 죽었다.(AD316년) 당시 최고실력자 중상시 왕침에게 매우 미모가 뛰어난 양녀가 있었다. 유총은 왕침의 양녀를 좌황후로 들였다.(AD318년 4월)

 

상서령 왕감과 중서감 최의지 중서령 조순 등 조정대신들이 유총의 조치를 말리고 나섰다.

 

“ 신이 듣기로 제왕의 황후란

  덕행이 건곤에 비할 정도여서 

  살아서는 종묘를 잇고 죽은 다음에는 후토에 배향되는 것이니

  반드시 대대로 덕과 명망이 있는 집안에서 자란 요조숙녀를 선택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해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고

  하늘의 기운에 화답하는 것입니다.

  효성제(전한 유오 재위 : BC33-BC7)의 조비연 때문에 

  후계가 끊어지고 사직이 빈 터로 남지 않았습니까.

  왕침의 조카딸이라고는 하지만

  보잘 것 없는 환관 가족의 딸이고

  또 태후 장씨의 몸종 출신인데   

  황후의 초방(椒房, 황후가 사는 향기나는 방)을 더럽힐 것은 분명하고

  다른 비빈들은 모두 공경대신의 가족이니

  어찌 하루아침에 비녀를 비빈의 윗자리에 두신단 말입니까?  

  신들은 아마도 국가의 복이 되지 않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유총은 격노했다. 중상시 선회를 유찬에게 보내 명령했다.

 

“ 왕감 등 보잘 것 없는 놈들이

  미친 말로 거칠게 내게 항의를 하여 나를 모욕하여

  군신의 예를 벗어났으니

  당장 군사를 보내 수사하여 보고하라.“

황제의 명령에 다라 왕감 등을 모두 가두었다가 저자에서 효시하였다. 왕침이 죽음을 앞둔 왕감 등에게 다가가서 지팡이로 그들을 치면서 말했다.

 

“ 이 어리석은 녀석들아.

  다시 못 된 짓을 해 보거라.

  도대체 황제의 중궁의 일이 너희들 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왕감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 위대한 전조를 망가뜨릴 놈들이 바로 너희 왕침과 근준같은 쥐새끼 들이다.

  내 먼저 돌아가신 선조들께 가서

  너희 죄상을 낱낱이 고할 것이니

  곧 지하에 불려와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근준이 화를 내며 왕감에게 물었다.

 

“ 나는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형을 집행할 뿐이요.

  어찌 나더러 전조 사직을 망가뜨린다고 하시오?“

 

왕감이 말했다.

 

“ 너야말로 황태제(유예)를 죽임으로

  황제가 우애가 없는 잔혹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한 놈이다.

  국가가 너 같은 놈을 기르고 양육하니 어찌 사직이 망하지 않겠느냐?“ 

 

같이 붙잡혀 온 중서감 최의지는 중호군 근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 너의 마음은 효조(梟鳥, 어미를 잡아먹는 흉측한 전설 속의 새)나 

 파경(破獍, 애비를 잡아먹는 흉악한 동물) 같으니 

 반드시 나라의 근심이 될 것이다.

 네가 이미 다른 사람을 잡아먹었으니

 너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잡혀 먹힐 것이다.“

 

유총은 충신들의 반대에도 꺾이지 않고 그 후로도 황후책봉을 계속 단행했다.     

 

 

<23> 유총 사망과 유찬의 고명대신 숙청(AD318년 6월)

 

두어 달 후 유총이 병이 들어 누웠다. 즉시 대사마 유요를 징소하여 승상으로 삼고 석륵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석륵은 받지 않았다. 이미 전조 조정과 사실상 결별한 상태였다. 유총이 누운 지 며칠 뒤에 죽고(AD318년6월19일) 태자이자 상국이던 유찬이 황위를 계승했다. 유총의 비인 근씨를 황태후로 올리고 자신의 처 근씨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아들 유원공을 황태자로 임명했다. 유찬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았고 또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즉, 근황태후 등 여러 유총의 황후들은 책봉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어린 여자들이었으므로 새 황제 유찬은 이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근준은 유찬의 이런 패륜을 보면서 가슴 속 깊이 다른 생각(즉, 반역)을 품고서 말했다.

 

“ 소문에 따르면 

  여러 공작들이 이윤이나 곽광처럼 왕을 마음대로 폐립하기 위해

  먼저 태보 호연안과 저를 죽이려고 한답니다.

  폐하께서는 의당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근준의 계획은 일단 황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친인척 조정 대신들을 대대적으로 솎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유찬은 근준의 생각을 좇지 않았다. 초조한 근준은 두 명의 근씨 황후, 즉 황태후 근월화와 유찬의 정부인 근씨 황후를 움직여서야 황제의 결단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때 화를 당한 조정대신은 태재 왕경, 대사마 유기, 유기의 동생 거기대장군 오왕 유령, 기간(기간, 조심스러운 충간)으로 유명한 태사 유의, 대사도 제왕 유매 등이었다. 모두 황제의 가까운 친척이거나 황실의 척족으로써 중직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 때 근준은 쿠테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조정의 강력한 반대세력을 미리 제거해 둘 필요가 있었다. 유찬으로써도 비록 태자였고 상국이었지만 조정의 여러 친척들이나 척족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었음으로 순탄한 통치를 위해서 제거하는 것이 편하다고 판단했다.  유총이 죽기 직전 고명으로 임명한 7명의 대신들 중에서 4명이 죽임을 당했고 주기와 범륭은 장안의 유요에게로 도망가서 살아남았다.  

 

 

<24> 근준의 쿠테타(AD318년 8월)

 

유찬은 황제가 되자마자 모든 군권을 대장군 근준에게 맡기고 석륵을 토벌하겠다고 나섰다. 유요에게는 장안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유찬 자신은 매일 후궁의 정원에서 연회를 열면서 놀았다. 

 

근준은 자신의 쿠테타 계획을 광록대부 왕연과 의논했다. 근준은 왕연을 매우 존경해 오던 차였다. 깜짝 놀란 광록대부 왕연이 조정에 그 사실을 알리려고 하다가 도중에 체포 구금되었다. 왕연은 전에도 여러 번 황제의 잘못을 간하다가 질책을 받은 충직한 사람이었다. 근준이 이런 곧은 왕연과 쿠테타를 모의한 것을 보면 일단 황음한 유찬의 비행에 대해 누구나 동감하고 있었으므로 왕연도 자신의 쿠테타에 흔쾌히 동조할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하간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근준은 군사를 발동하여 광극전에 올라서 유찬의 죄상을 낱낱이 밝힌 뒤 가두어 죽여 버렸고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 동쪽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그리고 죽은 유연과 유총의 묘(영광릉과 선광릉)를 파헤쳐 사체를 훼손하고 종묘를 불태웠다. 근준의 이런 과격한 행동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자매와 딸을 황제의 비로 보낸 황실 척족으로써 황제에 대해 이런 능멸할 행동을 한 것은 해석하기 어렵다. 다만 유총과 유찬의 폭정에 대해 민심이 크게 떨어 졌다는 사실과 또 전조 조정이 선비족의 후예라는 점에서 한족의 민족적 분노감이 배후에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근준이 호숭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 옛 부터 호인(이민족. 주로 흉노)으로써 천자가 된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전국새를 너에게 줄 테니 서둘러 돌아가서 서진 황실에 돌려 주거라.“

 

이미 서진 조정은 무너졌으므로 돌아갈 곳이 없었다. 황당하게 여긴 호숭이 머뭇거리자 근준은 그를 죽여 버렸다. 근준은 스스로 대장군에 한천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명령은 황제의 명령이라고 불렀다. 근준은 왕연에게 이전 조정부터 지켜오던 좌광록대부를 주려고 하였다. 왕연이 근준에게 욕을 내뱉었다.

 

“ 도각의 역적 놈아.

  어찌 나를 속히 죽여 내 왼쪽 눈을 서양문에 두었다가

  상국(유요)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고

  오른쪽 눈을 건춘문에 걸어 두어 

  대장군(석륵)이 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지 않느냐! “ 

 

화간 치밀어 오른 근준은 결국 왕연을 죽였다. 

 

 

<25> 유요의 황위회복(AD318년 12월)

 

상국 유요가 근준의 반란 소식을 듣고 장안에서 수도 임분으로 달려왔다. 석륵도 근준을 토벌하겠다고 5만 명의 군사를 끌고 임분을 향해 동쪽에서 들어왔다. 유요는 적벽(산서성 영제)에 진을 쳤고 석륵은 양릉(하북성 형태) 주둔했다. 태보 호연안이 평양에서 몰래 빠져나와 유요에게 귀부하면서 미리 도망나온 주기와 함께 유요에게 존호(황제칭호)하라고 설득했다. 유요는 황위에 오르면서 근준 일가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 대해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호연안을 사공, 주기를 사도에 임명하고 모든 관원들의 직책을 종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 유요는 정북장군 유아, 진북장군 유책을 분음(산서 영하현) 주둔시켜 장차 있을 토벌을 준비하도록 했다. 

 

석륵이 먼저 근준의 평양(임분)을 공격하고 항복한 주민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근준은 사람을 석륵에게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석륵은 근준의 사신 복태를 잡아 유요에게 보냈다.  유요는 복태에게 이렇게 말을 전해달라고 하면서 근준에게 돌려보냈다.  

 

“ 돌아가신 선제(유찬)은 실로 정치를 많이 어지럽혔소.

  사공 근준이 실로 이윤과 곽광과 같은 자리에 있었소.

  그러나 진작에 나를 받아들였으면

   죽기는커녕 모든 국사를 그에게 맡겼을 것이요.

   경은 돌아가서 짐의 이런 뜻을 잘 전해주시오.“

 

복태가 평양으로 돌아 와 이 말을 전했으나 근준은 듣지 않고 오히려 유요의 생모(호씨)와 형을 죽여 버렸다. 근준의 부하들은 전세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을 알았다. 좌우거기장군 교태와 왕등, 그리고 위장군 근강이 나서서 근준을 죽이고 상서령 근명을 주군으로 삼고서 전국옥새를 복태에게 들려 전조 유요에게 항복했다.(AD318년12월)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요에게 항복한 것을 알게 된 석륵은 전 군사를 동원해 임분을 공격했다. 석륵의 동생(양형제) 석호도 유주(북경지역), 기주(하북성 형수지역) 군사를 끌고 임분 공격에 동참했다. 다급한 근명은 유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요가 지우너군을 임분에 파견했다. 근명은 임분의 군사와 주민 1만 5천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달아났다.

 

평양(임분)에 들어 간 석륵 군대는 궁성을 파괴하고 근준이 훼손한 영광릉과 선광릉을 다시 수축하도록 했다. 한의주군 유찬과 죽은 100여 명 신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뒤 수비군을 두고 퇴각했다. (AD318년 12월)    

     

  

<26> 유요가 석륵의 사신 왕수를 죽임(AD319년 3월)

 

석륵은 그 다음해 초(AD319년 2월) 좌장사 왕수를 유요에게 보내 임분성이 완전히 함락되었음을 알렸다. 유요는 석륵의 공을 높이 사서 그에게 태재, 영대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조왕이라는 봉작을 수여하였다. 조(趙)왕을 내린 이유는 석륵이 장악하고 있는 하북성 남부 형태 지역이 옛날 조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수를 따라 온 조평락이라는 사람은 돌아가지 않고 작은 지역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유요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석륵이 왕수를 보낸 진정한 이유는

  전조의 군사와 민심을 몰래 엿보는 것과 

  때를 보아 유요를 암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요가 그 말을 듣고 격분하여 석륵에게 보내려던 사신 곽사를 도중에서 소환하고 왕수를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석륵이 그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말했다.

 

“ 고(孤)는 유씨를 섬기면서 신하로써의 직분 이상으로 봉사했었다.

  저 사람의 기초는 모두 내가 닦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돌이켜 나를 도모하려 하는구나.

  조의 왕이든 조의 황제든  

  모두 내가 하는 것이지 어찌 남이 시켜줄 것을 기다리겠는가?“

 

본거지 양국(하북성 형태)으로 돌아 온 석륵은 배반한 조평락의 삼족을 이멸시켰다.

 

 

<27> 유요의 전조(前趙) 건국과 칭제(AD319년)

 

장안으로 돌아 온 유요는 곧바로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전조(前趙)를 건국하였다. 신하들의 건의에 다라 국호를 조(趙)라고 했지만 선우족을 조상으로 분명하게 선언했으며 흉노제국의 제1대 가한(황제) 난제묵돌을 하늘에 배향하고 광문황제(유연)을 상제로 배향했다. 유요는 낙양 점령 때 첩으로 삼았던 양헌용을 AD319년 유요가 유찬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황후로 승격시켰고 그가 나은 아들 유희(熙)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유연이 AD304년 이석(산서성 여양시 이석구)에서 나라를 건국했을 때에는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유요 또한 유연의 먼 친척일 뿐 직계 혈통은 아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유연의 한나라는 유요가 세운 나라 전조와는 다른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유연의 한나라를 유요의 전조와 구분하여 한조(漢趙)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일관되게 전조라고 불렀다.

 

 

<28>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다(AD319년11월)

 

하북성 형태를 본거지로 한 석륵은 선비족 추장 일육연을 보내 삭방(산서성 삭주)을 점령시켰고 공장을 보내 유주(하북성 북경지역)의 여러 성을 빼앗았다.  석륵의 군세가 강해지자 동쪽 청주(산동성 청주)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조억이 사신을 보내 연대를 제안하므로 이를 수락했다.  

 

국력이 강해지고 또 유요마저 황제를 칭하기로 하자 석륵의 부하들이 황위에 오를 것을 여러 번 재촉했다. 석륵은 매 번 거부했다. 그러나 그 해 겨울이 되면서 수하 장수들의 독촉이 거세지자 석륵은 마침내 대장군, 대선우, 영기주목 및 조왕이라고 호칭할 것을 허락하고 자신의 영역을 조나라(趙國)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같은 해 유요가 세운 조나라, 즉 전조(前趙)와 구분하기 위해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라고 부른다. 후조의 도읍지는 양국(襄國, 하북성 형태)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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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5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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