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3D 민생통합으로 북위를 확립한 탁발준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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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태자 탁발황의 죽음과 종애의 탁발도 암살(AD452)

 

북위의 황태자 탁발황(AD428-AD451)은 탁발도의 장자로써 네 살 때인 AD432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수 십 차례 전쟁을 통하여 북중국을 사실상 통일한 아버지 탁발도는 자주 수도 태원을 비워야 했으므로 태자 탁발황이 수도에 남아서 정치를 도맡았다. 어린 탁발황이 사실상의 국정을 장악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감국(監國)하게 되자 중서시랑이면서 태자의 스승이었던 고윤이 이렇게 충고하였다.

 

“  주(周)나라 무왕은 주공 희단, 소공 의상, 제공 강상 및 필공 희고를 중용하여

   천하의 왕 노릇을 잘 수행하였으나

   은나라 주(紂)왕은 비렴과 악래와 같은 난신을 등용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

   지금 동궁에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첨하고 사악한 무리를 배척하시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선비를 가까이 하셔서  

   땅의 소출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고

   판매하는 것도 이익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시면

   훌륭한 명성이 쌓여

   비방하는 말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태자 탁발황과 그의 측근들은 의욕에 넘치는 나머지 너무 꼼꼼하게 행정과 세정을 펼쳤으므로 안팎으로 원성이 높아갔다. 특히 태자 탁발황의 측근 급사중 구니도성과 시랑 임평성은 당시 조정 실세였던 환관 우두머리 중상시 종애와 매우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중상시 종애 또한 황권 권력의 실세였으므로 동궁권력 실세 구니도성과의 마찰은 불가피했다.

 

선공은 중상시 종애가 먼저 일으켰다. 구니도성을 착복 및 혹정으로 참소했고 황제 탁발도는 종애의 참소에 따라 구니도성과 동국관속 여러 명을 처형해 버렸다. 태자 탁발황은 충격에 빠진 나머지 걱정을 거듭하다가 죽었다.(AD451년6월15일) 23세였다. 욱하는 탁발도 성격에 동궁관료를 죽인 것이 결국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셈이 되었다. 탁발도는 한편으로 매우 후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일을 일으킨 중상시 종애를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탁발도는 탁발황을 경목태자로 추증하고 똑똑하고 영민한 그의 아들 탁발준을 황태손으로 책봉했음에도 불구하고 탁발황에 대한 비통함을 가눌 수 없었다. 중상시 종애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탁발도가 자신을 죽일 것이 두려워 결국 그를 시해하고 말았다.(AD452년 2월5일) 탁발도 나이 45세였다.    

  

 

<2> 황제 옹립의 문제 : 탁발여의 등극과 피살(AD452)

 

종애의 탁발도 암살사건 직후 조정은 그 사실을 비밀에 붙였다. 시중 화필은 황태손 탁발준이 너무 어렸으므로(당시 5세) 죽은 탁발황의 동생인 진(秦)왕 탁발한을 세우려고 몰래 모셔왔으나 적통 황태손 탁발준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어서 미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종애로써는 탁발도를 시해한데다가 경목태자를 사실상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또 탁발한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자기와 가장 사이가 좋은 사람을 세워야 자신의 목숨이 유지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종애는 탁발황의 나이 어린 동생 남안왕(南安王)탁발여(拓拔余)를 선택하여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황태후, 즉 탁발도의 부인 혁련황태후의 명령이라고 속여서 상서좌복야 난연, 시중 화필 및 설제를 궁궐로 소환했다. 난연 과 화필과 설제 등 조정 대신들은 평소 황제의 최측근 종애가 무식하고 미천하며 아둔한 자라고 여겼으므로 전혀 의심도 하지 않고 궁궐로 들어갔으나 잠복한 무장군인 30여명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탁발한은 감옥에 가두었다가 죽였다. 탁발여가 황제에 올랐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황제의 정통성이 결여되었고 또 종애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세워진 것을 탁발여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탁발여는 조정의 환심과 민심을 얻기 위해 국고를 털어 나누어 주면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크게 훈장과 포장을 베풀었다. 나아가 정치와 인사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몰래 종애를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심복을 곳곳에 깔아둔 종애가 모를 리가 없었다. 10월 초하루 밤 탁발여가 선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려 할 때 종애는 소황문 가주를 보내 탁발여를 죽여 버리고 그 사실을 비밀에 붙이려 했다. 우림(황제호위군)낭중인 유니가 다가와서 종애에게 황태손 탁발준을 옹립하자고 권했다. 종애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 그대는 참 어리석소.

  탁발준이 황제위에 오르면

  어찌 정평(경목태자 탁발황의 죽은 일) 때의 사실을 잊겠소?“  

 

 

<3> 탁발준의 쿠테타와 황제 등극(AD452)

 

그렇다면 누구를 세울 생각이냐고 유니가 묻자 종애는 좀 기다려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유니는 종애가 또 다시 변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중상서 원하에게 황제사망 사실을 몰래 알렸고 원하는 남부상서 육려와 함께 대책을 의논했다.

 

“ 황태손 탁발준을 세우지 않으면 

  사직이 다시 위태로워질 것이오.“

 

황태손 탁발준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원하와 상서 장손갈후가 함께 황실 군대를 풀어서 황궁을 장악한 뒤 유니와 육려는 탁발준을 모셔 와 황제로 옹립했다.(AD453년 10월3일) 그리고 유니가 궁궐 군대에게 이렇게 외쳤다.

 

“ 종애가 남안왕을 시해하는 대역무도를 저질렀으니

  황태손 탁발준을 모시고 대위에 오르셨다.

  조서가 내려졌으니 모든 군사는 무기를 버리고

  자대로 복귀하고

  새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라.“

 

종애와 가주는 오형(五刑:笞,杖,徒,流,死의 다섯 가지 형벌)을 내리고 삼족을 멸하였다.   

  

 

<4> 탁발준의 충신 육려

 

탁발준이 황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은 육려와 원하였다. 특히 육려는 탁발준에게는 심려(心膂), 즉 가장 가까운 총신이었다. 그 공을 높이 사서 탁발준이 평원왕이라는 작위를 수여하려하자 육려가 강하게 거절했다.

 

“ 폐하께서는 나라의 적통으로써 

  당연히 기본적 계통을 이어야 하실 몸이었으니

  순종하고 받드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감히 하늘의 공로나 자리를 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이나 거절했지만 탁발준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육려가 더 거절하기 어려워 이렇게 말했다.

 

“ 정 그러시다면

  신의 부친(육사)께서는 선조를 모시면서

  충성과 근면을 다하여 본보기를 드러내셨고

  지금에는 상유(桑楡, 뽕나무와 느릅나무. 은퇴를 상징)에 이르렀으니

  그에게 작위를 내려 주십시오.“

탁발준은 육려의 효성에 감탄하며 말했다.

 

“ 어찌 천자가 경의 두 부자에게    

  왕위를 내리지 못하겠느냐.“

 

아버지 육사는 건업공에서 동평왕이라는 작위로 올려서 내렸고 육려에게는 평안왕을 내렸으며 육려의 처에게는 왕비라는 칭호를 허락했다. 

 

 

<5> 드러나지 않은 충신의 상징 고윤(AD458)   

 

탁발준을 말하면서 고윤을 빠뜨릴 수는 없다. 고윤은 AD431년 황제 탁발도의 부름으로 조정에 징소되어 나온 수 백 명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특히 죽은 경목태자 탁발황의 깊은 아낌을 받았던 사람이었다.<국기>, 즉 국가역사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연루된 고윤을 태자 탁발황이 아버지 탁발도에게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그에게 거짓말을 하여 빠져 나오도록 종용했으나 고윤은 거부하고 직설했고 이것이 오히려 약이되어 탁발도에게 칭찬을 받음과 동시에 면책된 일이 있었다<본 칼럼(#3C 탁발도) 참조> 

 

사실 고윤은 탁발준이 황위에 오르는 모의에 참여한 결정적인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원하나 육려와 같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 결과 논공행상에서 또한 밀려나 있었지만 고윤은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고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를 몹시 거리는 성격이었다.  

 

탁발준이 황제가 되고나서 6년이 되었을 때 간신 관선명이 황제를 꾀어 황궁인 태화전을 지으려고 했다. 중서시랑 고윤이 나서서 반대했다.

 

“ 태조(탁발규)께서는 반드시 농한기에만 궁을 지으셨습니다.

  지금은 나라가 세워진 지 오래되어 조회에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설사 넓힌다 하더라도 급할 것이 없습니다.

  대략 2만 명 정도가 필요할 텐데

  부수인력까지 합하면 4만 명 정도가 있어야 합니다.

  한 명의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수 백 명이 굶어야 할 형편이데

  수 만명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탁발준이 결국 궁궐 신축을 포기했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 고윤은 간절하게 간하기를 좋아하여 

  편치 않은 일이 있으면 번번이 알현을 요청하였고

  황제는 즉시 주위를 물리치고 그를 맞이하였다.

  혹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르렀고

  혹은 날을 넘기기도 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혹 통열하고 아프도록 간절하여 황제가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좌우에 명하여 그를 끌어내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사과하고 그의 뜻을 높이 받들었다.」

 

탁발준은 이렇게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 군주와 아버지는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잘못했는데 자식이 어찌 은밀히 편지를 써서 지적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들추어내듯 고발한단 말인가. 

  사사로이 감추어진 곳에서 간언한다는 것은

  어찌 아버지의 악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싶음이 아니겠는가.

  군주의 잘못을 면전에서 지적하지 않고 표문을 올려 지적하는 것은 

  어찌 군주의 잘못을 드러냄으로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어찌 충신이 할 짓이겠는가.

  고윤은 짐의 허물을 대면하여 은밀하게 말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짐이 듣기 거북한 말을 피한 적 또한 없었다.   

  천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어찌 가히 충신이라 말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고윤은 자신의 책무만 묵묵히 최선을 다해 감당할 뿐 승진이나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는 27년 동안 낭관이라는 같은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탁발준이 마침내 고윤을 알아보고는 주위의 대신들을 꾸짖으며 말했다.

 

“ 너희들은 비록 칼과 활을 들고 바로 내 곁에 있으면서도

  바로잡는 말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이

  오로지 짐이 기뻐하는 기회를 틈타 관직을 빌고 구걸하여

  별다른 공로도 없이 왕공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나 고윤은 붓 하나로 

  나라와 짐의 가족을 보필하여 국가의 이익이 됨이 적지 않았으나

  단지 나의 낭관에 불과하니      

  너희들은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탁발준은 고윤에게 중서령을 내렸다. 그제야 사도 육려가 나서서 고윤을 옹호했다.

 

“ 사실 고윤은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청렴하여

  아내와 아들을 세워두기조차 힘든 지경입니다.“

 

탁발준이 육려를 꾸짖으며 말했다.

 

“ 공은 어찌 여태껏 아무 말도 없다가 

  지금 짐이 그를 높이는 것을 보고서야

  마침내 그가 가난하다는 것을 말하는가?“

  

당시 고윤은 초가 몇 칸과 무명이불과 솜 옷 몇 벌이 재산의 전부였고 부엌에는 소금과 채소 몇 단 밖에 없었다. 탁발준이 탄식하며 비단 600 필과 곡식 천 곡(1곡=10말)을 내렸고 장자를 장락태수에 임명하였다. 고윤이 극구 사양했으나 황제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고윤을 ‘영공(令公)‘으로 높여 불렀다.

 

고윤과 함께 징소되었던 유아가 이렇게 고윤을 평가했다.

 

“ 고윤은 안으로는 글에 밝고 

  밖으로는 공손 온화하지만

  그 말은 눌변이라서 웅얼웅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옛 날 탁무와 유관의 사람됨을 칭찬했는데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다.

  나는 고윤과 40년을 같이 지냈는데

  일찍이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제야 옛 사람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았다.

  전에 사도 최호가 말하기를 

  고윤은 재능이 풍부하고 학문이 넓어 한 시대의 훌륭한 선비이지만 

  모자라는 바가 ‘고고한 절개와 위엄’이라고 평했었는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호가 작은 실수로 결국 죄를 지어 죽게 된 것(국기사건)에서

  황제가 조서를 내려 꾸짖자 모두가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오직 고윤만은 홀로 당당하게 일의 이치를 상세하게 밝히고 

  옳고 그름을 풀어서 아뢰었는데

  말의 뜻을 바르게 하였고 소리가 맑고 높았었다. 

  인주께서는 이 때문에 얼굴빛이 달라지시고

  사람들의 정신이 솟구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것이 고고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종애가 권력을 휘두를 때 왕공이하 모든 백관이 

  뜰로 나아가 무릎 꿇고 위를 바라보며 절을 하였지만 

  오직 고윤은 계단에 머물면서 고개만 숙여 읍만 할 뿐이었으니

  어찌 급장유가 드러누워 위청을 올려다 본 것만을 항례(抗禮)라 할 것인가.

  고윤의 행동 또한 어찌 절개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쉽게 알지 못하니

  나와 또한 최호가 그 부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관중이 포숙아에게 가서 큰 소리로 울었던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 북위 탁발준의 위업 : 피폐한 국가재정과 민생경제 회복 

 

탁발도는 AD386년 나라를 건국한 할아버지 탁발규와 아버지 탁발사를 이어 AD439년 북량을 정복함으로써 북중국, 즉 북조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열여섯 살인 AD424년 황제가 되어 AD452년 까지 38년 동안 재위하면서 북 중국의 강국인 하나라(AD434)와 북연(AD436)과 북량(AD439)을 차례로 병합함으로써 오호십육국 시대를 종결한 사람이 탁발도다. 그러나 비록 국가영토는 크게 확장되었지만 국가재정은 말이 아니었다. 재위 30년(AD423-AD452) 동안 21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가 당연히 고갈되었다. 게다가 전임 탁발여의 선심 정책으로 그나마 있던 재정이 완전 고갈되었다.

 

이 국가재정을 13년 만에 바로 세운 사람이 북위 고종 문성제 탁발준이다. 탁발준의 정책은 민생중심의 안정정책이었다. 

 

탁발준은 정치를 시작하자마자 아버지 때인 AD446년 도입한 불교배척 정책을 모두 철폐했다. 당시 조정과 유사들은 오로지 유교만 중시할 뿐 불교를 매우 배척했다. 특히 탁발도는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억불정책을 시행해왔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해탈과 깨달음을 좇는 불교의 내면중심의 도리가 적극적인 국가관과 부자, 군신, 혹은 부부간의 윤리를 강조하는 유교정신과 상통하지 않은 면도 있었지만 잦은 대부분의 유력한 장정과 가문들이 전란을 피해 절을 세우고 피해 숨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인이 어떠했든 백성과 관료사회에서 몰래 불교교리를 배우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억불정책에 대한 완화요구도 거세어짐에 따라 불교에 대한 정책은 조금씩 완화되었다. 특히 탁발도의 정복전쟁이 마무리 되면서 불교 억제 정책은 빠른 속도로 정상화되었다. 탁발준은 즉위하는 그 해(AD452) 조서를 내려 모든 행정구역 마다 불교사찰 혹은 불탑을 하나 세울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주 별로 작은 주는 40명, 큰 주는 50명 씩 사문으로 출가를 허용했다. 지난 날 훼손 된 모든 사찰은 복구하도록 했으며 위 주군이 몸소 사현 등 5명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국가통합을 위해서는 민생에 부합하는 정치가 시급함을 탁발준은 잘 알고 있었다. 

 

탁발준은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해 금주령을 시행했다. AD458년 탁발도는 술을 빚거나 사고팔거나 사서 마시는 사람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다만 길흉의 모임에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예외로 술을 허용하였다. 탁발준이 이런 가혹한 형벌을 내린 이유는 사람들의 다툼과 국정비판이 모두 술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꼭 필요한 경우의 예외를 인정하면서 과도한 음주문화를 척결하여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조치를 내린 것이다. 

  

탁발준은 또한 공직기강 및 관료의대민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안팎으로 후관(候官), 즉 염탐꾼을 늘려 파견하여 여러 행정관청과 주군현을 사찰하였다. 때로는 본인이 직접 미복을 하고서 부시(府市,관청과 시장)의 여러 곳을 잠행하면서 관리들의 횡포를 찾아내었다. 당시 뇌물로 포 2장(丈: 10척)을 넘기면 목을 베었다. 또 새로운 범법행위를 규정하는 법을 79장 새로 만들어 법을 규제하였다.

 

무리한 건축을 자제하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될 수 있으면 전쟁이나 공역에 백성들을 동원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민생조치들은 크게 외형적으로 넓어진 통일국가를 내면적으로공고하게 다지는데 필수적인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탁발준은 AD465년 26세 나이로 죽었다. 열두 살 탁발홍이 황제에 오른다. 탁발준이 하지 못한 과업은 탁발홍이 완성하게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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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13 17: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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