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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면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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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1월31일 17시05분

작성자

  • 옥동석
  • 인천대학교 무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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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타당성조사(이하는 예타)는 우리나라에서 전문성이 정치적 판단을 제압하는 정말 몇 안 되는 제도 중 하나다. 1999년 제도도입 이후 지금까지 정치권은 수많은 공공사업들을 요구하였지만 그 중 절반은 예타에서 탈락하였다. 정치인들에게 예타는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눈엣가시’처럼 불편하고 성가신 존재였다. 심지어 대통령조차 자신의 제1호 공약사업이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할까 전전긍긍 우회로를 찾을 정도로 예타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였다.

 

예타의 위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B/C분석(비용편익분석)으로 불리는 경제성 분석의 과학적 객관성에 있다. ‘국민 세금 1원을 투입할 때 최소한 1원 이상의 사회적 편익은 창출되어야 한다’는 이 간단한 논리가 갖는 설득력 때문이다. 국민들의 혈세를 한 푼이라도 아껴 써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곧 예타의 위력이다. 누가 감히 0.3원의 사회적 편익을 위해 1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사회적 편익(B)은 예타에서 어떻게 판단하는가? 정부의 정책목표는 다양하고 모호한데, 어떻게 B/C분석은 편익을 단 하나의 수치로 표현하는가? 여기에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사회적 편익은 개인의 행복, 개인의 만족, 개인의 효용에 기반해야 하며 그 어떤 전체주의적 가치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들은 사회적 가치를 판단할 때 이념과 진영으로 나뉘어지지만, 자신의 행복을 판단하는 일에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타는 개인들이 공공사업에 대해 인정하는(또는 지불하고자 하는) 개인적 가치의 총합으로 사회적 편익을 산정한다.

 

결국 예타의 위력은 사회적 가치의 판단기준과 그에 따른 계량적 수치의 객관적 설득력에서 나타난다. 수치 산정에서는 그 누구도 압력을 가할 수 없다. 오직 경제적 논리만이 작동할 뿐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결정한 수치(시장가격)를 기준으로 사회적 편익이 결정된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장차관도, 시도지사도, 재벌회장도 이 수치의 결정에서 오직 5천만 국민의 일원으로만 참여한다. 설령 시장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가치(예컨대, 안전과 환경)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시장가격으로부터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가치를 도출하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와 같은 평가에서는 소득분배 효과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1원의 비용을 부담하고 부자들이 1.5원의 수익을 얻는 공공사업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경제성의 논리이다. 이는 정말 괴롭고 안타까운 일이다. 경제학자들은 이 안타까움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명하고 있다. 

 

첫째, 공공사업은 특정 집단에 유리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지 않아야 한다. 공공사업들이 무차별적으로 제안될 수 있다면 ‘공공사업들 패키지’ 자체는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공평한 이익을 줄 수 있다. 

둘째, 정부는 공공사업과 별도로 소득재분배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벗어날 수 있다. 더구나 공공사업의 소득분배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타에서는 소득분배를 무시한다. 불가능한 이상(理想)에 치우쳐 현실을 비관하며 허송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앞선 경험을 가진 대부분의 OECD 선진국들은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소득재분배를 위한 정책사업이 아닌 한, B/C분석이라는 경제성을 위주로 공공사업을 선택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그들은 소득분배와 경제성의 목표를 구분한 후 정책별로 역할을 분담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예타에서 경제성 평가를 50%에 한정하고, 그 나머지 50%는 정책적 평가(25%)와 지역균형발전 효과(25%)에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지역균형발전효과에서는 지역낙후도 지수를 활용하여 낙후된 지역에 돌아가는 편익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며 소득분배를 나름 감안하고 있다.

 

이처럼 멋진 우리나라의 예타 제도가 지난 2009년, 그러니까 제도 도입 10년 만에 큰 위기에 봉착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광역경제권발전 30대 선도프로젝트’와 ‘4대강사업’에 대해 국토균형발전과 재해예방을 명분으로 예타 면제를 강행하였다. 정부의 의무적인 사업과 긴박하고 시급한 사업에 대해서는 예타를 실시할 실익이 사실상 없다. 그렇지만 이들 사업은 의무적이지도 않고 또 시급하지도 않았다. 국토균형발전의 효과는 예타제도의 지역균형발전효과에서 충분히 감안할 수 있음에도 예타면제를 감행한 것은 오직 경제성을 무시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이다. 

 

더구나 국토균형발전은 그 정책적 목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 전국의 지가와 지가상승률을 모두 동일하게 하는 것인가? 모든 주민들이 10km 이내의 수영장을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 모든 주민들이 통근시간 1시간 이내에서 연봉 4천만 원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 지역적 차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理想)일 뿐이다. 오히려 주민들에게 지역별로 차별적인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그들이 거주이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누리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균형이 아닐까? 더구나 집적효과를 극대화한 도시의 경쟁력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결국 균형발전을 이유로 하는 예타면제는 지역의 민원해결이라는 것을 실토할 수밖에 없다. 공공사업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포퓰리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역에 돌아갈 편익 0.3원을 위해 국가가 1원을 부담하는 것은 지역민들 입장에서 환상적인 일이다. 더구나 A지역의 정치인과 B지역의 정치인이 투표거래를 통해 서로의 공공사업을 밀어주기로 한다면 A, B의 지역민 모두가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은 결국 국가 전체에, 또 국민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끼친다. 너무도 잘 알려진 공유지의 비극처럼 모두가 공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은 단계에서 이러한 정치적 포퓰리즘을 극복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예타 제도를 확립하여 정치적 논리를 제압한다는 것은 OECD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2009년 이후 또 다시 10년이 흐른 2019년, 적폐청산을 부르짖던 문재인 정부가 또 다시 예타면제를 감행하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사라져가던 부당한 예타면제의 폐습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사람중심 경제를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가 개인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경제성 분석을 무시하고 비인격적인 가치를 앞세우는 이러한 논리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경제 원리란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도록 경제성을 극대화하여 그 수익이 어떤 형태로든 국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성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경기부양을 내세울 수 있겠지만, 이는 그럴 듯한 용어에 불과할 뿐 실상은 미래를 희생하고 현재를 즐기는 낭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부양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취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와 같이 급격하고 충격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경기부양의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아야 한다. 

 

예타가 무력화되면 정치적 포퓰리즘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나에게 이익을 준다 하더라도 국가 전체에 해를 끼치는 정책에는 우리 모두가 냉정해져야 한다. 예타의 경제성 분석은 포퓰리즘에 대한 정확한 처방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민원이라는 이유로 예타면제를 반기고만 있을 것인가? 1980년대 각종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은 ‘먹고도 안 찍는 민주배짱’으로 정치인들의 표 매수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정치인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과연 우리 국민들에게서 이러한 기개는 모두 사라진 것일까? 예타 면제! 정말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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