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의 한국 대통령 전 상서(前 上書) <27> 개혁은 투쟁이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7월06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17년07월06일 17시14분

작성자

  • 김정수
  • 무역협회 경제통상자문역

메타정보

  • 34

본문

 

 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대통령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

 


<편지 27> 개혁은 투쟁이다


덕장(德將)이기를 포기하라

 

나는 스스로를 지장(智將)이나 명장(名將)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물며 덕장(德將)은 어불성설이다. 지장과 명장이 필요한 시대였겠으나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덕장이 지도자가 되어도 무방할 정도로 일본 경제•정치•사회가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최근 베스트셀러의 제목처럼, 지도자는 미움을 마다 않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는 일찌기 덕장이기를 포기하고, 기꺼이 맹장의 길을 택했다. 모든 이의 칭송을 받고, 모든 이가 자발적으로 나를 따르고 모든 이가 존경해 마지않는 그런 지도자가 되기 보다, 불의(不義)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그런 지도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불의는 ‘구태(舊態) 정치, 구태 경제, 구태 행정’이었다. 나는 맹장으로서, 일본경제와 일본 정치 아니 일본 그 자체의 개혁을 이룩하기 위한 전장(戰場)에 앞장 서기를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문제는 리더십의 위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총리가 되고 싶다는 것 말고는 일본 부활을 위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리더, 그래서 국민으로부터의 믿음과 지지를 누리지 못하는 리더, 그 결과 국민에게 개혁의 고통 분담과 희생을 요구할 수 없는 리더, 그래서 포퓰리즘에 기댈 수 밖에 없는 리더… 그런 리더가 만들어낸 것이 오늘날의 불만과 불안과 불황의 일본이다.

 

개혁 투쟁에는 옳고 그름, 공공의 선과 악이 있을 뿐이다

 

개혁은 선악(善惡)2분법 또는 흑백 논리로, 끝까지 추진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개혁에는 개혁이냐 반(反)개혁이냐가 있을 뿐이고, 정책에는 옳은 정책이냐 그른 정책이냐가 있을 뿐이다. 개혁과 반개혁, 옳고 그름에 중간이나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다.

 

내가 2001년 6월말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였다. 나는 하이눈(High Noon)이라는 서부영화를 언급하면서, 국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을 성공리에 치러낸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칭송하면서, “보안관은 혼자서 네 명의 악한과 대결했다. 나도 혼자서 자민당 안의 반대파와 싸우고 있다”며 개혁의 결의를 내비쳤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위대한 아버지로부터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운 점이다”고 화답했다.

고이즈미 개혁을 추진할 때는 이해부문, 부처, 자민당, 야당 등 개혁저항세력으로 사면초가(사면초가)였다. 리더의 개혁추진은 결국 공공 선(善)과 악(惡) 간의 외로운 싸움인 것이다.

 

타협(妥協)은 쥐약이다

 

리더가 흑백논리 또는 ‘모 아니면 도’식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해도, 때로는 정치사회적 여건 때문에 때로는 급변하는 국제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하거나 중도에 추진을 멈출 수 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개혁추진 초입부터 타협이나 중도 추진을 전제로 일을 벌인다면, 죽도 밥도 아닌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추진하지 않느니만 못한 꼴이 된다. 도로공단 민영화의 경우가 그랬다. 

 

2001년 12월 ‘특수법인 등 정리합리화 계획’이 마련되었을 때만 해도, 4개 도로공단은 ‘완전민영화’(도로공단에 대한 정부 지분을 100% 매각하는 것)가 최종목표였다. 경영과 소유가 민간에게 넘어가야,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정부 돈이 들어가지 않고 쓰임새도 없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지 않으며 종국에는 도로공단의 빚도 갚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여곡절과 당정간 타협을 거쳐 2014년 6월에 국회를 통과한 도로공단 민영화 법안은 민영화라는 말을 붙이기가 쑥스러울 정도였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민간도로운영회사에 정부가 빚 보증을 서면서까지) 새 도로를 건설할 수 있게 길을 텄고, ‘민영화’ 후에도 정부가 도로회사 지분의 1/3 이상을 보유하도록 결말이 났다. 

언론은 ‘채무상환보다 고속도로 건설을 우선시 하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장래에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을 남길 것이다’고 악평을 서슴지 않았고, 민영화위원 중 한 사람은 ‘이름뿐인 민영화로서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다’며 공개적으로 규탄까지 했다.

 

도로공단 개혁이 이런 지경에 이른 제 1차적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즉, 민영화를 조속히 추진하는 데에만 집착하여 도로공단 커뮤니티(도로공단, 국토교통 상임위 위원, 국토교통성 등 도로건설과 운영에 이해를 둔 집단)와 타협을 한 것이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 후 다시는 도로공단 개혁과 같은 실책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우정민영화 등을 추진할 때 도로공단 민영화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중요한 면에서는 한 치의 타협 없이 최종 단계까지 개혁의 초심대로 개혁을 추진했다고 나는 자부하고 있다.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이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34
  • 기사입력 2017년07월06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17년07월06일 17시14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