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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도요토미, 그리고 도쿠가와와 장미대선 후보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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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4월12일 16시19분

작성자

  • 이상근
  • 서강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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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유학생활을 경험한 필자는 가끔 케이블 TV를 통해 NHK를 시청하곤 한다. 요즘 기억이 새삼스러운 것은 몇 년 전에 방영했던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軍師官兵衛)’이다. 이 드라마는 일본 전국시대의 3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많이 알려진 일화이지만 이 세 사람에 대한 역사적 인물평은 꾀꼬리를 울게 하는 방법에서 잘 나타난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칼로 베는 성향의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가 울게끔 꾀를 내는 인물’로, 마지막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는 인물’로 평가된다.

 

간단하게나마 여기서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야요이(彌生) 시대(BC 300~300), 야마토(大和) 시대(300~593), 아스카(飛鳥) 시대(593-710), 나라(奈良) 시대(710-794), 헤이안(平安) 시대 (794-1192), 가마쿠라 (鎌倉) 시대(1192-1338), 무로마치 (室町) 시대(1338-1467), 아즈키 모모야마 (安土桃山) 시대(1573-1603), 에도(江戶) 시대(1603-1868),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 다이쇼(大正) 시대(1912-1926), 쇼와(昭和) 시대(1926-1989), 헤이세이(平成) 시대(1989~현재)로 구분된다. 

 

여기서 일본의 전국(戰國)시대 (1467~1573)란 무로마치막부의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足利義政)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일어난 분쟁의 시기로 당시의 신·구세력의 갈등이 폭발한 시점인 오닌(應仁) 원년(1467)에 시작하여 1573년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15대 아시카가 요시아키 (足利義昭)를 축출한 때까지라는 게 정설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의 틈바구니 속에서 성장한 무사로 기후성을 개축한 뒤 패권전쟁을 시작하여 오미(시가현)의 아자이 가문과 이세(미에현)의 기타바타케(北畠) 가문을 흡수한 뒤 교토로 진격해 미요시(三好) 가문을 몰아내고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게 된다. 둘 사이의 관계는 오다(실세권력자)가 아시카가(쇼군)를 제어하기 위해 갖가지 규율을 강요하면서 급격히 나빠졌다. 아시카가는 각지의 다이묘(大名)들에게 교지를 통해 다케다 신겐,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혼간지 겐뇨(本願寺顕如)를 중심으로 오다 세력을 포위해 갔다. 하지만 1573년 다케다 신겐의 급사로 이 포위망이 와해되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면서 무로마치 막부도 와해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가문의 영지까지 획득하고 일본 통일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光秀)의 배신으로 인한 혼노지(本能寺)의 변(變)으로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혼노지의 변은 1582년 6월 다케다 가문을 병합하고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오다 노부나가가 실질적인 최대 라이벌 세력인 모리(毛利)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한 사건이다. 동원된 휘하 병력 중 하나인 아케치 미츠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들여 주코쿠(히로시마 주변)지방으로 진군하던 중, 6월 2일 혼노지를 급습하여 “적은 혼노지(내부)에 있다”는 유명한 관용구를 남기고 오다 노부나가를 자결케 한다. 

 

이 혼노지의 변을 통해 일본 역사상 최고의 배신자로 각인된 아케치 미츠히데가 찰라의 순간 권력을 잡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키요스 회의(清須会議)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시킴으로 최대세력을 형성하었다. 이에 오다가문의 마지막 충신인 시바타 카츠이에 (柴田勝家)가 반발하지만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제압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고 실권자가 되어서, 마침내 1590년에 오다와라성 전투에서 호조(北条)가문을 굴복시켜 일본을 통일의 시켰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내부 군벌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조선 수군과 명나라 군대의 반격에 몰려 지지부진하다 1598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당시 어렸기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고, 이 틈을 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1600년 2월, 친도요토미파와 도쿠가와파간의 최대혈전인 세키가하라(기후현) 전투의 승리를 통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잔존 세력을 바로 제압하지 않고, 무려 15년 기다려, 1615년 오사카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에도막부(江戶幕府) 시대를 열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종결시킨 것은 확실하지만 새로운 자신의 막부시대를 열지 못한 이유는 여럿이 있겠지만 포용력의 부족을 최대의 이유로 꼽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반란으로 일순 권력을 잡았지만 배신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겼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패권정치로 여러 세력들의 통합에 실패함으로써 자신의 막부를 세우지 못하고, 인내와 관용의 미덕을 베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궁극적으로 천하를 얻게 되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바라보면서 작금의 우리나라 장미대선과는 너무나도 흡사한 형국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이번 대선의 최종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통합과 관용을 통해 미래 한국의 비전을 제시한 후보가 하늘이 점지한다는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한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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