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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의 한국 잠룡 전 상서(前 上書) <12> 자리(인사권)를 손에 쥐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3월16일 16시58분
  • 최종수정 2017년04월27일 15시52분

작성자

  • 김정수
  • 무역협회 경제통상자문역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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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25년’ 중에 딱 한번 일본경제가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거센 당내 저항을 극복하고 5년 5개월의 총체적 구조개혁으로 일본을 다시 일어서게 한 고이즈미 내각(2001~2006년)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개혁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의 장래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잠룡들에게, 고이즈미가 편지로 전하는 충언을 한번 들어보자.​​

 

 

 

<편지 12> 자리(인사권)를 손에 쥐라

 

내각과 당의 인사권은 총리만이 행사해야 하는 총리의 고유 권한이다. 이 권한은 누구와의 타협 없이, 누구에게도 양보함이 없이, 총리가 독자적으로 행사해야 하는 권한이다. 이는 집권 공약을 가장 효율적으로 일관되게 실천할 수 있는 인물로 내각과 당에 관저주도의 체제를 꾸미기 위해서다. 그것은 나의 집권 공약이 내가 국민과 뜻을 같이 하고 국민에게 약속하였으며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총리로서) 내각과 (당 총재로서) 당의 인사를 할 때는, 파벌이든 정치원로이든 측근이든 누구에게서든 조언이나 인사 청탁을 받거나 누구의 의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 내가 인사를 함에 있어 ‘안배’ 라는 것도 안중에 없었다. 

대신, 지역이든, 계층이든, 무엇이든 총리로서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하고 이룩하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가장 적합한 곳에 임명하는 것에 집중했다. 물론 총리직에 있다 보면, 내각 인사 등 중요한 결정을 함에 있어 정치적 고려를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정치적 고려를 해야 할 때에도, 어찌 하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되느냐를 두고 고심했지, 어떤 결정이 특정 지역이나 집단의 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탕평인사’나 ‘통합’ 인사를 높이 평가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새 내각이 들어설 때마다 그 탕평과 통합의 기준을 주요 학교, 주요 지역, 최고 지도자와의 평소 친분 등 측면에서 몇 명이 내각에 참여하도록 하였느나를 가지고 평가하는 관행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일본도 한국과 유사하다. 일본의 경우에 한국과 다른 점 하나는, 새 내각이 들어설 때 정계, 관계, 언론 등이 ‘어느 지방 출신이 몇 명 대신이 되었냐’ ‘어느 대학 출신이 몇 명이냐’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여당의 어느 파벌 출신이 몇 명이냐’에 관심을 모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만큼, 일본 정치가 파벌주도로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그런 일본의 통념과 인사 관행은 내가 집권한 후 첫 내각 인사로 허물어 버렸다.  

 

파벌 무시의 독자적 인사

 

인사에 관한 나의 첫 발언은 2001년 4월 24일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직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였다. “파벌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각 파벌들도 이번에는 파벌 (입각 후보) 명부를 내지 않고 희망은 일절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말과 더불어 “(당 인사를) 수상지명을 끝내고 나서 새 내각인사와 더불어 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언론이 크게 보도한 이 인사 발언은, 자민당의 인사 관행의 파괴, 아니 여당 자체와의 결별 선언이었다.

 

그 때까지의 인사 관행은, 우선,  당 총재로 선출되면 바로 주요 파벌 출신(또는 영수급 인사)으로 당3역(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을 임명하고, 다음에 당 3역과 내각인사를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내가 ‘시간을 두고’ 당과 내각 인사를 같이 하겠다는 얘기는, 한편으로는 당3역이나 그들을 통해 파벌들이 인사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뜻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민당뿐 아니라 연립내각 파트너인 공명당과 보수당과도 인사 협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주1-그렇다고 연립내각 파트너 정당에게 대신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교통이나 건설 등) 그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부처를 그들 몫으로 남겨두었다.> 나의 독자 인사 발언에 대해 자민당과 연립내각 파트너가 공개적으로 반발을 했으나, 자기의 뜻대로 인사를 하기로 작심한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이의 제기였다.

 

25일 당 3역 인사를 발표했다. 당 간사장에는 십년 넘게 나와 함께 자민당 개혁을 주장해 온  야마자키(山崎拓) 전 정조회장, 정조회장에는 모리 내각에서 최초의 경제재정담당대신을 지낸 아소(麻生太郎), 총무회장에는 호리우치 (堀內光雄) 전 통산대신을 기용했다. 야마자키와 호리우치는 각각 파벌의 영수이긴 했지만, 파벌이라고 해도 규모로는 당내에서 제 5위, 제 4위에 지나지 않았고, 아소의 파벌은 파벌이랄 것도 없는 소규모 정치그룹이었다. 

1, 2, 3위의 파벌이 당3역에 한 사람도 들이지 않은 것은 전대미문의 이례적인 일이자 파벌무시 처사였다. 특히 제 1위의 하시모토 파는, 1980년 7월의 스즈키 내각 이래 그 파벌로부터 총재가 나온 경우를 제하고 당 3역 가운데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 날은 각료인사를 단행했다. 나 스스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인사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자민당 파벌들이 놀란 건 당연했다. 이 인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파벌체제의 무시 내지 ‘수(數)의 논리의 묵살’이었다. 당내 8파벌과 연립여당 모두에게 적어도 내각이나 당 3역에 한 자리씩을 주는 관행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파벌의 크기나 영향력 또는 각 의원의 당선 회수 등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 파벌로부터 2명밖에 각료로 기용하지 않았고, 각료 17인 가운데 파벌에 속한 국회의원은 10인 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아무 파벌에 속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민간 또는 연립여당 파트너 정당의 의원들이었다. 국회의원이 아닌 민간인을 각료로 세 명이나 기용하고, 여성 각료를 5명으로 늘렸다는 것도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이 인사는 여당총재이자 총리의 당내 및 내각 내에 걸친 인사권이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역대 총리는 파벌 눈치 보느라 인사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었고, 각료인사는 주요 파벌이 추천하는 인물을 우선적으로 기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제도를 통한 총리의 당이나 내각에 대한 리더십 발휘는 유명무실 한 것이었다. ‘선거(공천), 돈(선거자금), 자리(입각)’ 세 가지 정치적 자원을 당 총재가 아니고 파벌(영수)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90년대의 정치개혁으로 의해 ‘선거와 돈’ 등 면에서 파벌의 힘이 약화되면서, ‘자리(인사)’ 면에서의 파벌의 힘도 덩달아 약해져 왔다. 나는 당과 내각의 인사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민당 총재라는 지위 그 자체가 수상에게 큰 권력을 보장하게 된 것을, 고이즈미는 수상 취임 전후에 행한 자민당 집행부 인사와 내각 각료 인사에서 증명해 보였다.”

 

제도가 마련해 준 관저주도의 기반을 동원한 나의 파벌 무시 인사는, 다시 그의 관저주도 체제를 강화 시키는 상호 상승효과를 가지게 했다. 이는, 관저주도 체제를 이용해 개혁을 추진하려는 총리의 입장에서는 선순환 고리이지만, 자기네들의 권한 약화를 우려하는 파벌 등 자민당 구세력 입장에서는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셈이다. 

 

자민당에는 당 3역(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뿐 아니라 주요 당직 전부, 내각에는 대신뿐 아니라 거의 모든 정무차관(정치적 임명 케이스)까지, 내가 정하지 않은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인사에 관한 한, 당과 정 공히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주2- 田原總一郞(2007), 『小泉 官邸の眞實』. アスコム. 197쪽.> 고이즈미 개혁을 피하고 싶은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고이즈미가 높은 국민지지를 등에 업었다고 해도, ‘대통령적’으로 비칠 정도로 국회를 무시하고 인사, 정책 결정 등 모든 것을 고이즈미 혼자서 정하는 것은 독단 내지 전횡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요샛말로 불통(不通)의 총리인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 아베의 ‘친구 내각’

 

내 내각에 이어 2006년 9월 출범한 아베 내각은 ‘고이즈미 개혁의 계승’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아베의 속내는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 즉 정치적 보수화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평소에 친분이 있는 정치인 중에 젊고 정치적 보수 성향이 분명한 인물들로 내각을 꾸몄다. 정치인 일색으로 내각을 꾸민 것의 예외가 자문회의 담당대신 오다(大田弘子)였다. 오다에게 자문회의를 맡긴 것은 아베 내각이 ‘고이즈미 개혁 계승 내각’임을 보여주려고 하는 치장술에 불과했다. 아베의 내각 꾸미기는 경제계로부터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당 내외로부터는 아베 내각은 ‘논공행상 내각’이나 ‘친구 내각’이라는 야유를 들어야 했다. ‘고이즈미류의 경제개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보수화를 위한 총리가 되기로 작심한 아베에게는 그런 야유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야심차게 출발한 아베 내각은 고이즈미 개혁노선에서 벗어나 정치적 보수화로 나아가는 과정에 각료들의 비리와 망언이 이어지면서 내각지지율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다. 2007년 7월의 참의원에서 자민당의 패배가 점쳐지고 있었지만, 그런 참혹한 패배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89년 참의원 선거 이후 18년만의 참패로 자민당은 1955년 창당 후 처음으로 참의원에서의 제 1당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코너에 몰린 아베가 내놓은 개각 카드는 전형적인 ‘장고(長考) 끝의 악수(惡手)’였다.  (2006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경합했던 다니가키 의원을 제외하고) 자민당 주요파벌의 영수들을 다 끌어 모아 주요 장관 자리를 맡긴 것이다. 그 인물들은 하나 같이, 파벌 ‘실력자’들로서 리더급 족의원이거나 불법 정치자금 등 흠결이 있는 대표적인 부패 정치인들이었다. 파벌에 좌지우지 되는 구태 정치 행태로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을 파벌 일색으로 꾸민 것이다.

 

아베의 당시 내각은 나의 개혁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었다. 아베가 파벌 영수들을 내각으로 불러들여 내가 5년 여의 비난과 야유 속에 구축해 놓은 관저주도 개혁체제를 허물어트렸을 뿐 아니라, 나의 ‘청렴’ 자민당 내각을 하루 아침에 ‘부패’ 내각으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뜻에 반하는 아베의 내각 인사는 추락하는 내각지지율 앞에 1달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정책적으로도, 고이즈미 내각이 공공사업(특히 도로건설지출) 삭감을 통해 지향했던 ‘작은 정부’가 이들 도로족에 의해 공공사업 확대를 통해 ‘큰 정부’로 변질될 것이 뻔 했다. 2007년 8월의 아베 개조내각은 관저주도 체제를 벗어버리고 파벌정치 체제로 회귀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고이즈미 개혁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째로 빌려 온 내각’-후쿠다

 

후쿠다는 (파벌의 영향력이 대폭 늘려진) 아베 개조내각을 거의 그대로 이어 받은 내각(‘통째로 빌린 내각’이라고 불렸다)을 꾸몄다. 17명 각료 중에 2명만 새로 영입했다. 파벌 영수들 앞에서 ‘면접 시험’까지 보고 파벌들의 담합으로 총리가 된 후쿠다로서는 그 자신이 바라던 내각 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민당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로 내각을 구성했다는 점, 고이즈미나 아베처럼 총리 자신의 생각만으로 행한 당정 인사가 아니었다는 점은, 아베 내각의 실정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관저주도체제의 기반을 더욱 크게 흔들어 놓았다. ‘정치와 돈’과 관련해, 50년간 일본의 정치를 부패로 물들게 한 파벌의 영수들로 내각을 꾸려가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것은, 아무리 정치적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서 이해해 준다 하더라도, 후쿠다가 관저주도체제를 활용해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난을 받아도 그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개혁적이든 무엇이든 정책다운 정책을 추진하려 하지 않았던 후쿠다 내각 또한 날로 떨어지는 내각지지율에 떠밀려 집권의 자리를 내주고 쫓겨났다.  

 

‘파벌에 의한, 파벌을 위한 내각’-아소 내각

 

후쿠다 내각을 이은 아소 내각도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야유를 받으며 출범했다. 각료 중에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내각총리를 지낸 사람이 아소 총리를 포함해 하토야마, 나카소네, 오부치 등 네 명이나 되었고, 이들을 포함한 세습정치가가 11명이나 되었다. 세습정치가가 많았던 후쿠다 내각 때도 9명이었는데 그 보다 더 늘어났으니, ‘세습 내각’ 또는 (아베 내각에 이어) ‘도련님 내각’이라는 야유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소 내각도 여론과의 관계에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이다.

 

자민당 안에 가장 작은 파벌(아소 파)의 영수였던 아소는 다른 파벌이 지지가 없었다면 총리가 될 수 없었다. 그 탓에 그의 내각 인사는 처음부터 ‘파벌균형’ ‘논공행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파벌을 배려해 파벌 소속 국회의원에게 각료 자리를 배분한 결과 민간 전문가에게 차례가 돌아갈 각료 자리가 없었다. 아소 내각에는 국회의원이 아닌 각료가 총무대신 한 명뿐이었다. 그 대신마저 곧 망언으로 퇴임하는 바람에, 아소 내각은 민간인 각료가 한 명도 없는 내각이 되었다. 아베 내각 말기부터 부활하기 시작한 파벌정치체제는, 후쿠다 내각에서 자민당 정치권에 깔끔하게 복귀한 다음, 아소 내각에 이르러서는 자민당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아소 내각은 집권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각료뿐 아니라 총리까지 경쟁하듯 망언과 비리를 저질러 안 그래도 취약한 국민의 신뢰 기반이 더욱 흔들렸다. 2009년 9월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주기 직전, 아베 내각에 대한 지지율은 55년 자민당 출범 이후 최저였던 7% 수준까지 떨어져 있었다.  

 

국민만을 바로 보는 내각 인사여야

 

나는 집권 기간 동안 단독의 인사권 행사를 고집했다. 더구나 (내 내각의 전과 후에 자주 있었던 것 같이) 파벌 영수들로 내각을 구성하는 짓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관저주도의 개혁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파벌을 무시하는 나의 인사 스타일은 그들에게 ‘누가 일본(경제)을 끌고 가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의 적극적 인사권 행사는 파벌을 약체화하여 파벌주도의 구태 자민당 정치를 타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적재적소’ 기준에 맞는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접촉하여 내각에의 참여를 권했다.  그들을 선정할 때, 나는 ‘나의 통치이념 특히 개혁에 관해 나와 신념을 같이 하고 있느냐’, 또 ‘내가 이룩하겠다고 국민과 한 약속을 (흔들림 없는 정책 추진으로) 지키는 데에 제 역할을 할 사람이냐’ 여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소속된 파벌 내에서 또는 일본 정치계에서의 그들의 입지를 감안하여) 그들을 영입하는 것이 내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느냐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나는 자부하고 있다. 

독자적으로 내각과 당의 인사권을 행사하여 ‘고이즈미 개혁의 손발’이 되어줄 인물로 내각을 꾸며 관저주도의 개혁체제를 구축한 데에는, 나에게 ‘고이즈미 개혁’ 추진을 위임한 국민의 뜻을 섬기기 위함 외에 어떤 고려 사항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립내각 파트너 정당에게 대신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교통이나 건설 등) 그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부처를 그들 몫으로 남겨두었다. 

 

 

 <순서>

 

왜 지금 개혁의 리더십인가?

제 1부 제대로 된 잠룡라면

제 2부 대권을 잡고 나면  개혁의 무대는 이렇게 꾸며라

제 3부 모두를 개혁에 동참시켜라

제 4부 논란이 많은 개혁과제를 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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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7년04월27일 15시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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