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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4 북량(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4월11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4월10일 10시0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6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6] 남량이 서진 걸복치반에게 멸망(AD414)

 

독발녹단의 출병 소식을 들은 걸복치반이 낙도를 습격하려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태부주부 초습은 이렇게 말했다.

 

  “ 독발녹단은 가까이 있는 걱정은 생각지 않고 

    먼 이익만 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를 공격하되 서쪽 길을 끊어서 

    독발녹단이 구원할 수 없도록 조치한다면 

    독발호대는 성을 지키고 앉아서 방어만 하다가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니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걸복치반이 옳다고 판단하여 2만 기병을 이끌고 낙도를 공격했다. 남량의 종사중랑 위숙이 낙도의 외성을 버리고 내성만 지키도록 권고했다. 독발호대가 이렇게 대꾸했다.   

 

  “ 걸복치반은 작은 도적일 뿐이오.

    아침저녁 사이에 물리칠 수 있는 조무래기들인데

    경은 너무 걱정이 많은 것 같으오.“

 

독발호대는 진인, 즉 중국 본토 사람들을 의심하여 내성에 가두어 버렸다. 맹개가 나서서 반발했다.

 

  “ 국가가 계란을 쌓아 놓은 것 같이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저 맹개와 같은 사람들이 나아가 은혜를 갚고자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바라는데 

    어찌하여 전하는 의심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독발호대가 말했다.

 

  “ 내 어찌 그대의 충성심을 모르겠소.

    하나 나머지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단 말이오.

    저들이 만에 하나 뜻밖의 일을 벌이는 것이 두려운 것이니

    결국 그렇게 하면 그대들도 평안해 지는 것 아니겠소?“

       

하루 저녁에 낙도 내외성이 무너지고 걸복치반이 들이닥쳤다. 걸복호대와 문무관료 및 1만 가구를 압송하여 수도 부한(임하)으로 옮겼다. 5천 군사를 걸복첩건에게 보내 독발녹단을 추격하게 했다. 

   

[37] 남량의 충신 위현정(AD414) 

 

수도 낙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독발녹단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 지금 아내와 아들들이 모두 걸복치반에게 사로 잡혔소,

    물러나도 갈 곳이 없으니   

    경 등은 나와 더불어 을불부락의 물자도움을 받아 글한부락을 탈취한 다음

    독발녹단에게 맞바꾸자고 하면 어떨까?“

 

독발녹단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갈 때 많은 군사들과 부장들이 도망쳐 떨어져 나갔다. 독발녹단이 말했다.

 

  “ 저거몽손이나 걸복치반 모두 옛날에는 내 신하들이었는데   

   지금 내가 머리를 숙이자니 부끄러운 일 아닌가.

   사해가 넓어도 나를 받아 줄 곳이 없으니 얼마나 허망한가.

   죽는 것이 흩어져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못하다.

   독발번니는 나의 장조카로 종복의 큰 힘이 되고 있고

   또 북쪽의 우리 무리들도 1만호가 넘으니 장차 너희들도 그리로 가서

   미래를 기약하도록 하라.

   나는 어차피 죽을 몸이니 가서 내 아이와 아내를 보고 죽으리라.“    

    

독발녹단의 모든 신하들이 걸복치반에게 항복하고 들어갔다. 오직 음리록만이 독발녹단을 따라가기로 했다. 음리록이 말했다.

 

  “ 신의 노모가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갈 날을 한번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신하가 되어 충성과 효성의 두 가지를 다 이루기란 어렵습니다.

    신이 재주가 없어서 폐하를 위해 이웃나라에게 

    피눈물 흘리면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할 수도 없으면서

    어찌 폐하의 곁을 감히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독발녹단이 감탄하며 말했다.

 

  “ 사람을 안다는 것이 실로 쉽지 않은데

   대신들과 가족들이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나갔지만

   오늘 충성과 의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지러지지 않은 사람은

   오직 경 뿐이요.“

 

독발녹단의 남량 여러 성들이 모두 걸복치반에게 항복했으나 오직 위현정만이 고문(감숙성 수등현)을 지키면 함락되지 않았다. 걸복치반이 위현정에게 편지를 보냈다.

 

  “ 남량의 다른 성들이 모두 함락되었소.

    낙도도 함락된 지 오래요.

    오직 한 개의성을 지켜서 무엇하겠다는 거요?“

 

위현정이 이렇게 말했다. 

  

  “ 양왕(독발녹단)의 후덕한 은혜로 나라를 지키는 번병이 되었습니다.

    비록 낙도가 함락되고 아내와 가족들이 다 사로 잡혔다 해도

    먼저 항복하여 상을 받기 보다는

    뒤에 따라가 죽음을 얻기를 바랍니다.

    다만 주상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데 감히 귀순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내와 자식에 관한 일은 작은 일일 뿐인데

    어찌 작은 일로 큰일을 그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한 때의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뜻을 버리는 사람을

    대왕께서는 기용하시겠읍니까?“

 

걸복치반은 독발호대를 재촉해서 항복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위현정이 독발호대를 꾸짖었다. 그해 10월 걸복치반은 스스로 진왕(秦王)이라고 일컬으며 백관을 두었다. 

 

  “ 그대는 저부(즉 세자)가 되어서 힘을 다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면박을 당하여 아비를 버리고 임금을 잊고 만세 대업을 무너뜨렸으니

    나 위현정은 어진 선비로써 어떻게 그런 사람을 본받을 수가 있겠소?“

 

독발녹단이 항복하여 걸복치반에게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위현정은 성문을 열고 서진에 항복했다. 

 

[38] 남량 독발녹단의 항복과 죽음 (AD414)

 

독발녹단이 항복해 들어오자 걸복치반은 사자를 교외까지 보내 상빈으로 맞이했다. 독발녹단을 표기장군으로 삼고 좌상공의 작위를 내렸으며 투항한 남량의 여러 신하들에게 재능에 따라 관직을 내렸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걸복치반은 사람을 시켜 독발녹단을 짐살시켰는데 주변의 독발녹단 측근들이 해독하려하자 말리면서 말했다.

 

  “ 내가 병이 들어 그런 것이니 해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치료를 거부한 독발녹단은 곧 즉었다. 독발호대 또한 걸복치반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독발녹단의 여러 아들과 손자들은 북량의 저거몽손에게로 달아났다가 한참 뒤에 북위로 망명했다. 북위 주군 탁발사는 이들 독발씨 후손들을 뿌리가 같은 종족이라며 크게 우대하고 탁발씨와 같이 ‘원’씨 성을 하사했다.

 

[39] 저거몽손의 동진과 혁련발발 연대(AD415)

 

남량을 멸망시켜 국력이 크게 신장한 서진의 걸복치반은 곳곳에서 주변국들과 영토분쟁을 일으켰다. 북동쪽으로는 하나라 혁련발발과 충돌했으며 북서쪽으로는 저거몽손의 북량과 갈등을 겪었다. 

 

동진 조정에서는 저거몽손을 끌어들이기 위해 익주자사 주령석을 시켜 저거몽손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저거몽손 또한 사신 황신을 주령석에게 보내어 화답함과 동시에 동진 황제에게 편지를 올렸다.

 

  “ 엎드려 듣건대 거기장군 유유가 중원을 맑게 평정한다고 하니

    제가 오른쪽 날개가 되어 

    융적 오랑캐(후진과 북위를 말함)를 몰아내겠습니다.“   

 

마침 혁련발발 또한 사람을 보내와 동맹을 요청하므로 북량 저거몽손은 동생 저거한평을 파견하여 하나라와도 동맹을 맺었다. 결국 북량은 동진은 물론 하나라와도 연대를 맺음으로써 가까이 있는 숙적 서진에 대비한 셈이다. 

 

[40] 색승명의 권고와 이고의 저거몽손 공격에 대한 견해(AD416)

 

서량의 사마 색승명이 주군 이고에게 저거몽손을 토벌하기를 청했다. 이고가 말했다.

 

  “ 저거몽손이 백성들에게 걱정을 주고 있으니

    고가 어찌 그것을 잊고 있겠는가마는

    다만 힘이 달려서 감히 나서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경이 반드시 사로잡을 책략을 갖고 있는 것 같으니 나에게 말하라. 

    그냥 소리를 질러서 동쪽으로 토벌하자고 한다면

    석호(후조의 강력한 3대 황제)는 작은 더벅머리 아이일 뿐이니

    저자에서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외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구체적인 공격책략을 갖고 있지 못했던 색승명이 부끄러이 물러났다. 

 

[41] 속임수의 달인 저거몽손의 계략(AD417) 

 

AD417년 4월 저거몽손은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장액태수 저거광종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서량에게 항복하게 한 다음 서량의 양공 이흠을 꼬드겨 북량을 공격하는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가다렸으나 이흠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군사를 되돌렸다. 저거몽손이 이흠의 군사를 추격하다가 이흠의 매복군에게 습격을 당하여 7천 군사를 잃는 패배를 당했다. 저거몽손은 주천 동남쪽에 방어벽을 설치하고는 돌아갔다. 

   

[42] 혁련발발의 장안입성과 황제 등극(AD418)

 

AD 416년 황제 요흥이 죽으면서 후진 조정은 내분과 혼란에 휩싸였고 요흥에게 황위를 물려받은 용렬하고 세심한 요홍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후진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통합과 분열 시리즈 #10 참조) 그 틈으로 타고 남쪽에서는 동진의 유유대군이 북쪽으로 쳐들어 왔고 북쪽에서는 하나라 혁련발발의 대군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동진 군대가 장강을 건너 낙양을 점령하면서 북위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지체하는 동안 발 빠른 기병을 주력부대로 하는 하나라 군사들도 재빨리 후진 수도 장안을 향해 내려왔다. 왕진악이 선봉을 선 유유의 군사들은 마침내 장안을 함락시켰고 곧이어 태위 유유가 장안에 입성했다.(AD417년 9월) 하나라 혁련발발은 장안의 북쪽 안정(감숙성 진원현)에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유유가 결코 장안을 오래 장악하지 못할 것을 알았던 혁련발발은 사태 추이를 보면서 장안을 탈취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유유 또한 본거지 건강을 떠나서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혁련발발과 형제의 화약을 맺자는 편지를 보냈다. 혁련발발은 사신 황보휘를 보내면서 자필편지 대신 자신의 말을 외워서 답하도록 조치했다. 유유가 감탄하며 말했다.

 

  “ 내가 혁련발발보다 못 하구나 ! ”      

   

이 때 유유의 오른팔 동진의 좌복야 겸 중군장군부 군사 유목지가 죽었다. 유유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며칠을 울면서 한탄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많은 유유의 장군들이 권고했듯이 장안에 머무르면서 주변의 오랑캐들을 토벌할 참이었지만 유목지가 죽자 유유는 건강의 조정이 걱정되는데다가 장안에서는 근본적으로 기댈 사람이 없다고 느끼고 어린 12세 아들 유의진에게 장안 수비를 맡기고 서둘러 건강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유유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혁련발발은 크게 기뻐하며 왕매덕에게 말했다.

 

  “ 짐이 관중 땅을 빼앗고자 하니

    경이 그 방략을 만들어 오라. “

 

왕매덕이 말했다.

 

  “ 유유는 어린 아들에게 장안을 맡겼습니다.

    지킬 뜻이 애초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중원을 내린 절호의 기회입니다. 

    먼저 요새 중의 요새 청니(섬서성 남전)와 상락(섬서성 상주)를 장악하신 다음

    동쪽의 관문 동관과 삼보(장안지역)에 격문을 띄워

    위세와 은덕을 펼쳐 보이시면

    모든 사람들이 유의진을 버리고 귀부할 것입니다.“

 

마침내 혁련발발은 아들 혁련귀와 기병 2만 군사를 보내 장안으로 향했다. 혁련창은 동관, 왕매덕은 청니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선봉의 뒤를 따랐다. 혁련발발의 공격을 받은 유의진은 장안을 버리고 도주했다. 대부분의 동진 관료들이 사로잡혔으나 유의진만은  건강까지 살아서 돌아갔다. 혁련발발은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황제자리에 올랐다.(AD418)

 

혁련발발이 황제에 등극하자 “하늘 아래 두 황제가 있을 것이라”는 참서를 믿은 송공 유유는 동진 황제 사마덕종을 짐살하고 그 동생 사마덕문을 세우도록 배후 조종했다.(AD418) 그 다음 다음해인 AD420년 유유는 사마덕문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43] 서량, 북량에게 멸망(AD420)

 

유유와 혁련발발이라는 동맹세력을 가진 북량의 저거몽손은 서쪽에 있는 서량을 정벌할 생각을 품었다. 원래 교활하고 잔꾀가 능한 저거몽손은 서량의 이흠을 속일 목적으로 걸복치반의 서진을 공격하는 척 했다. 그렇게 되면 이흠이 수도 장액이 비는 틈을 타고 공격해 들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과연 계획대로 이흠의 서량 군사는 저거몽손이 출병하자마자 장액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매복하고 기다리던 저거몽손의 군사는 쉽게 서량의 병력을 거의 멸절시켰다. 이흠은 전사했고 그의 동생 이번 등은 돈황으로 도주했다. 

 

저거몽손은 쉽게 서량의 수도 주천에 입성했다. 이흠의 부하 송요에게 전권을 주어 점령한 지역을 통치하게 맡겼으며 서량의 인재를 죽이지 않고 다 거두어 등용했다. 다만 주천 태수에는 아들 저거목건을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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