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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3 : 여광 일인국가 후량(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12월2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1월02일 15시1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7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6) 곽논과 왕상의 반란(AD397)

 

후량 산기상시인 곽논은 서평(청해성 서녕)이 고향이었는데 천문지식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 때 곽논이 이상한 별자리 움직임을 보게 되자 복야 왕상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나라 안에 장차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주군(여광)께서 연로(당시 60세)하시고 또 병까지 들어계시고

   태자(여소)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태원공 여찬(여광의 장자)은 흉악하고 사나우니

   어느 날(주상이 죽는 날을 의미) 꺼리는 일이 없게 되면

   재앙과 난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요직에 있었으니

   태상이 반드시 우리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왕걸기라는 사람이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거사를 일으켜 그를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은 뒤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상도 그러자고 동의했다. 곽논이 수하 무리를 데리고 먼저 궁궐 문을 불사르고 들어가면 안에서 왕상이 호응하여 여광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들키는 바람에 왕상이 먼저 죽었다. 왕궁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곽논은 거사계획을 돌이킬 수 없었다. 고장의 동원성(東苑城)을 장악 했는데 성 안에서는 이런 소문이 크게 퍼졌다.

 

 “ 성인이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곽논을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병상에 있던 여광은 급히 아들 여찬을 불러 곽논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단업의 반란군을 진압하느라 바깥에 나가있던 여찬이 즉시 장액에서 수도 고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수하 장수들이 붙잡고 말렸다.

 

 “ 장군께서 고장으로 군사를 돌리시면 

   반드시 단업이 후미를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의당 몸을 숨기셨다가 야밤에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찬이 말했다.

 

 “ 단업은 영웅재질이 없는 하찮은 졸장부에 불과하오.

   내가 겁을 먹고 군사를 숨겨두고 야밤을 탄다고 하면

   그의 기세만 높여 줄 뿐이요.“

 

그리고는 즉시 사람을 단업에게 보내 이렇게 제안했다. 

 

 “ 곽논이 반란을 일으켜 내가 지금 도읍으로 돌아가야 하오.

   경이 결정해 줘야 할 것은 

   즉시 나와서 나와 전투를 하는 것이요.“

 

(27) 양통의 반란과 양궤의 반란(AD397)

 

여찬이 전쟁을 서두르자고 모르자 단업은 겁에 질려 더욱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다. 여찬의 사마 양통은 그의 사촌형 양환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곽논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절대로 무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참에 제가 여찬을 죽일 테니 형님께서 주군이 되셔서

   서쪽으로 같이 가서 여홍(여찬의 동생)을 습격한 뒤 장액을 점령하면 

   여러 지역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일로써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입니다.“ 

 

양환이 버럭 화를 내며 꾸짖었다.

 

 “ 나는 여씨의 신하가 되어서 

   여태껏 그가 준 녹봉으로 온 가족이 편안함을 누리며 살면서

   여러 번 그에게 위기가 닥쳐와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에게 어려움을 끼칠 수가 있겠느냐?

   만약 그가 죽는 다면 나는 차라리 홍연이 되고 말겠다."

 

[그림] AD398년경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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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연은 춘추시대 위(衛)나라 대부였다. BC660년 북적이 위국 주군 의공을 살해하였는데 주군의 시체는 사지가 다 없어지고 단지 간장만 남아 있었다. 홍연은 자신의 신체에서 배를 갈라내고 주군 의공의 남은 간장을 집어넣고 순국한 사람이다. 

 

양환이 동조하지 않자 양통은 혼자 반란을 일으킨 뒤 곽논에게로 갔다. 여찬은 서쪽에서 돌아와 석원량과 함께 곽논의 반란군을 격파했다. 

 

후량에게 복속했던 융족과 하족 무리 3천명도 장첩과 송생의 주도 아래 휴도성(감숙성 무위시)에서 후량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족 출신 후량 장수 양궤를 맹주로 삼고서 곽곤과 연대하였다. 양궤의 참모 정조가 이렇게 간하였다.

 

 “ 경은 용의 머리를 버리고 

   뱀의 꼬리를 따라가고 있으니 참으로 잘못된 선택입니다.“

 

양궤는 정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에 합류했다. 여찬의 군대가 곽곤의 잔당 왕비를 깨뜨리면서 쫓아오자 다급한 곽곤은 급히 사람을 남쪽 북량으로 보내 독발오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발오고는 동생 독발이록고와 기병 5천을 고장(무위)지역으로 파송했다.   

 

(28) 반란 수습 실패와 북량의 세력 확장(AD398)

 

태원공 여찬이 직접 양궤를 공격했으나 주변에서 지원하는 군대들이 몰려와 여찬이 크게 실패했다. 여찬은 도읍(무위)로 돌아왔다. 장액의 단업은 저거몽손에게 권하여 서군(감숙성 영창형)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자 저거몽손은 서군태수 여순(여광 동생의 아들)을 포획하고 돌아왔다. 진창(감숙성 안서현)태수 왕덕과 돈황(감숙성 돈황)태수 맹민이 단업에게 항복해 들어왔다. 

 

여찬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양궤는 이참에 무위로 쳐들어가 여광을 뿌리 뽑으려 들었다. 그러나 매 번 참모 곽논이 아직 때가 이를 뿐더러 후량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들어서 말렸다. 후량의 장수 여홍은 장액 부근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단업이 저거남성과 왕덕을 시켜서 여홍을 공격하도록 했다. 여홍이 갑자기 북량의 공격을 받게 되자 후량 주군 여광은 동생 여찬을 급파하여 돕도록 했다. 양궤가 걱정하며 말했다.

 

 “ 여홍의 군대와 여찬의 구원군이 합쳐지면 

   후량의 군사력은 너무 강해져서 뺏을 수가 없게 된다.

   서둘러 여홍-여찬의 세력을 깨뜨려야 한다.“

 

양궤가 독발이록고와 연대하여 지원 오는 여찬군을 도중에서 맞서 싸웠으나 양궤가 크게 패하자 양궤는 왕걸기에게 도망갔다. 양궤가 홀로 왕걸기에게로 도망가자 그의 참모 곽논은 무리를 이끌고 걸복건귀의 서진에 항복했다.

지원오던 여찬의 군대가 도중에 양궤-독발이록고에게 공격을 당하여 못 오게 되자 여홍은 지키던 장액성을 버리고 급히 동쪽으로 도망갔다. 단업이 여홍을 쫒아가려 했으나 저거몽손이 말렸다.

 

 “ 돌아가는 군대는 막는 것이 아니며,    

   궁지에 몰린 도적은 뒤 쫒지 않는 것이 

   병가의 경계하는 바입니다.“

 

단업은 듣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쫓아갔다가 대패했는데 저거몽손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단업은 돌아와 서안(감숙성 산단현)에 큰 성을 쌓고 장막해를 태수로 삼아 지키게 했다. 저거몽손은 장막해의 인물됨이 모자람을 들어서 태수로 자격이 없음을 지적했지만 듣지 않았다. 서안성은 얼마 있지 않아서 후량 여찬에게 처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AD398)

   

(29) 남량의 세력 확장(AD398)

 

후량 조정 안팎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동안 단업과 저거몽손의 북량이 하서회랑의 서쪽 장액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면 남량의 독발오고 또한 청해 지역과 그 동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양궤는 여러 이민족을 규합하여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염천(감숙성 민화현)에 주둔했다. 왕걸귀의 권고를 받아들여 양궤는 독발오고에게 귀순했다. 양궤는 강족 추장 양기에게 패하여 도망갔는데 독발오고는 양기를 쳐부수어 요하(청해성 귀덕현) 방면으로 쫓아내었다. 자신의 세력이 서녕의 동북 쪽으로 확대되자 독발오고는 AD399년 치소를 서녕에서 동쪽 낙도(청해성 낙도)로 옮기기까지 했다. 더 큰 꿈을 가지고 세력 확장을 계획하는 독발오고는 여광의 후량, 감숙성 난주의 걸복치반 서진, 단업과 저거몽손의 북량 중 어디부터 쳐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양통이 이렇게 말했다.

 

  “ 서진의 걸복씨는 원래 우리의 한 부락이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복종할 것입니다.

    북량의 단씨는 서생에 불과하여 결코 난을 일으킬 재목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우리에게 화친을 요청할 것이니 

    이를 먼저 치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여광은 늙었고 후계자 여소 또한 무능하며

    다른 아들 여찬과 여홍 또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해 들어가면 싸우지도 않고 도망갈 것입니다.  

    여광을 먼저 공략하셔야 합니다.

    나머지는 저절로 떨어지게 됩니다. “

 

독발오고가 소리쳤다.

 

  “좋다”

 

AD399년 단업은 스스로 양왕이라고 부르면서 연호를 신새(神璽)에서 천새(天璽)로 고쳤다. 그리고 저거몽손을 상서좌승, 양중용을 상서우승으로 임명했다.

 

(30) 후량의 반격 실패 (AD398)

 

서쪽에서 남량, 북량, 서진 등의 여러 나라들이 후량을 배반하여 일어나자 종주국 후량 또한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찬과 여소 형제가 장액에 근거지를 둔 북량의 단업을 제일 먼저 공격했다. 갑자기 쳐들어오는 후량에게 놀란 북량의 단업은 남량의 독발오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독발오고는 양궤와 동생 독발이록고를 파견했다. 북량의 지원군이 온다는 말에 자신이 생긴 단업이 나가 싸우려 하자 저거몽손이 말렸다.

 

 “ 싸우지 않으면 태산 같은 안정이지만

   나가서 싸우면 계란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

 

단업이 전투를 중지했다. 후량의 여찬과 여소도 남량이 북량을 도와 연합작전을 편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은 후량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실수다. 북량군이 도착하기 전에 단업을 쳤어야 했다. 승부야 붙어 봐야 아는 것이지만 단업이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면 허약했다는 증거일 수가 있고 만약 후량이 북량을 제압했더라면 남량도 지원을 중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불행하게 여찬 여소 형제가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후량이 남량이나 북량이나 서진 보다 먼저 멸망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후량(AD386-AD403) 왕조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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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12월2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1월02일 15시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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