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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3 : 여광 일인국가 후량(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12월06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12월05일 16시1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1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1) 여광의 서역토벌(AD383년 8월-9월)

 

AD382년 가을 차사전부(신강성 투루판시 지역)왕 미전과 선선왕 (신강성 약강현) 휴밀타가 전진 조정이 있는 장안에 입조했다. 자신들이 길 안내자가 되어 서역토벌의 길잡이 되겠다고 제안했다. 그만큼 북중국 전역을 장악한 전진 부견의 군사력과 영향력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부견은 효기장군 여광을 사지절 도독서역정토제군사로 삼아 서역 토벌에 내보냈다. 장수 강비, 팽황, 두진, 강성과 함께 10만 보기병과 철기 5천을 주어 보냈다. 동생 부융이 이런 움직임을 막았다.

 

  “ 서역은 거칠고 멀어서 백성을 얻어도 부릴 수가 없으며

    그 땅을 얻어도 먹고 살 수가 없으니 

    한 무제가 얻었어도 잃은 것을 보충하지 못했습니다.

    만 리 밖에서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여

    한나라 실패를 반복하시려 하니

    신은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부융은 문학을 좋아하고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으며 귀로 들은 것을 바로 외웠고 눈으로 한 번 스친 것을 잊지 않았으며 힘은 백 명의 필부를 대적할 만 했고 말도 잘타고 활쏘기에도 뛰어나 어려서부터 칭찬이 그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부견 또한 그런 훌륭한 동생을 아끼고 중히 여겨서 국사를 항상 같이 의논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부견이 듣지 않았다. 승산도 확실할뿐더러 서역을 장악하는 것은 장차 동진을 함락시켜 전국을 통일하는 대업에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부견의 이 판단은 옳은 판단이었다. 서북쪽이 열려 장안이 위협받게 되는 상태에서 부견이 건강의 동진함락에 전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융의 진언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견의 속셈이 전국 통일에 있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AD383년 1월 여광의 대군이 장안을 출발했다. 여광이 사막(타클라마칸 사막)으로 300여리 들어오자 언기 등 사막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순순히 항복하면서 조공을 약속했다. 다만 구자국(신강성 고차현)왕 백순 만이 항거하면서 버티자 여광이 이를 공격했다. 다급해지자 백순은 회호(신강성 고차현 서쪽)에게 뇌물을 주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회호는 기병 20여 만, 그리고 주변 여러 나라 병사 70여 만으로 여광에게 공격을 받은 구자국왕 백순을 지원해왔다. 여광은 이들 연합군을 대파했고 백순은 사막 서쪽 끝으로 도망갔다.

 

여광이 마침내 구자성에 입성했다. 구자성은 번성하기가 마치 장안과 같다고 했다. 여광이 선정을 펼쳐서 서역지역을 두루 잘 다스렸으므로 전에 복종하지 않던 주변 나라들도 모두 전진과 여광에게 귀부해 왔다. 어떤 나라는 후한시대에 내려 받았던 부절을 들고 와서 바치니 여광은 이를 전진 조정의 것으로 바꾸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백순의 동생 백진을 구자왕으로 삼았다.(AD383년 7월) 전진왕 부견은 여광이 서역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그에게 서역교위, 도독옥문이서제군사를 임명했으나 길이 끊겨 연락 닿지 못했다. 아마도 이즈음 농서(감숙성 농서현)에서 반란을 일으킨 걸복보퇴와 그의 조카 걸복국인이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걸복국인은 2년 뒤 농서를 중심으로 서진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림] 구자(지금의 고차 혹은 쿠차)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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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구자(고차)의 여광과 구마라습 권고(AD385) 

 

사막 한 가운데 있어서 모든 황량할 것만 같은 구자국은 의외로 풍요하고 안정되었다. 천산산맥의 눈이 녹은 물들이 땅을 파고 스며든 뒤 구자국 주변에서 용출됨으로써 광대한 농경지를 만들어냈고 기후 또한 온화한 편이었다. 당시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한 이후 전진 강토는 여라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한 때였다. AD384년 요장이 후진을 건국하였고 같은 해 모용수는 후연을 세우던 때였다. AD385년에는 걸복국인이 서진을 건국했고 AD385년에는 탁발규가 북위의 전신인 대(代)나라를 재건할 때였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여광은 그냥 구자국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이 때 천축승려 구마라습이 여광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 여기는 흥망이 무상할 땅이니 머무르기 부족합니다.

     동쪽으로 가시면 도중에 자연스럽게 복록의 땅을 가질 것입니다.

     거기서 영원히 거주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의 귀족 구마라염(鳩摩羅炎)을 아버지로, 구자국(龜玆國)왕의 누이동생인 기바(耆婆)를 어머니로 하여 구자국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이름은 부모의 이름을 합한 것이라고 한다. 7세 때 출가하여 여러 곳을 편력하다가 인도 북쪽 계빈(罽賓)에서 반두달다(槃頭達多)에게서 소승교(小乘敎)를 배우고, 소륵국(疏勒國)에서는 수리야소마(須梨耶蘇摩)로부터 용수(龍樹)의 대승교(大乘敎)를 배운 다음 구자국으로 돌아와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서 율(律)을 배웠다. 그 후 구자국에서 주로 대승교를 포교하였다. 

 

여광은 이 문제를 두고 여러 부하 장수들과 의론했다. 모두들 돌아가자는 의견이었다. 여광은 마침내 낙타 2만 마리에 진귀한 보물을 싣고 말 1만 마리를 몰아 동쪽으로 돌아왔다. (AD383년 3월) 이 때 여광은 구마라습을 데리고 왔다. 나중에 AD401년 후량이 멸망하기 직전 후진 요흥의 습격 때 구마라습을 장안으로 모셔왔으며 12년 뒤 AD413년 장안에서 69세의 나이로 죽었다.    

 

 (13) 전진의 양희 격파와 양주접수(AD385)

 

3월에 출발한 여광이 거의 반년 뒤인 그 해 가을에 의화(감숙성 안서)에 도착했다. 당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전진의 양주자사 양희가 변경을 폐쇄하고 여광의 무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여광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고창(투르판)태수 양한이 이렇게 말했다.

 

  “ 여광이 서역을 격파하여 강하고 기세가 날카롭습니다.

    중원에서 전쟁으로 혼란이 거듭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기도를 할 것입니다.

    하서 땅은 사방 1만 리에 갑병이 10 만 명이니 지키기 충분합니다.

    만약 여광이 사막지역을 나오면 저지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고오곡구(투르판)는 험한 요새이니 

     먼저 그곳을 지키면서 물을 빼앗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 멀다면 이오관(합밀)을 막아도 좋습니다.

     이 두 곳만 지킨다면 여광이 자방의 계략을 가졌다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광이 무리가 도착하기 전에 투르판이나 합밀의 두 요새를 막아 저지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양주자사 양희는 듣지 않았다. 양희가 여광의 군사를 미리 막지 않은 것은 다른 속셈이 있었다. 책사 장통이 양희에게 이렇게 물었다.

 

  “ 관중이 크게 혼란하니 경사를 조정이 아직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여광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무슨 명분으로 

    어떻게 그를 막겠습니까?

 

양희가 대답했다. 

 

 “ 나도 아직 그 방도를 모르겠다.”  

 

장통이 양희에게 슬쩍 이렇게 제안했다. 

 

 “ 여광은 계략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군사들도 연전연승을 해서 기세가 등등합니다.  

   양장군은 대대로 은혜를 입었고 충성이 뛰어났으니

   이번에 공훈을 세우셔야 합니다.

   행당공 부락은 황상의 사촌이고 용감합니다.

   그를 맹주로 삼아 군중의 소망을 거두고    

   충의를 고양시켜 호걸을 거느리면 

   여광이 온다 하여도 감히 다른 생각 못할 것입니다.

   여광의 정예병을 기둥삼아 모흥(하주자사)을 아우르고 

   왕통(진주자사)과 양벽(남진주자사)을 연결하며

   사주(四州)의 흉악한 무리를 쓸어내고 제실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제환공 강소백과 진문공 희중의 업적입니다.“

 

여광의 군사를 이용하여 주변 지역을 장악하여 부락을 세워서 반란을 일으키자는 말이었다.

양희는 장통의 말을 듣지 않고 AD380년 귀양와 있던 부락을 죽였다. 

 

여광은 고창태수 양한이 양주자사 양희에게 올린 계책, 즉 험한 요새를 틀어막고 여광을 제압하자는 책략을 듣고 선뜻 나아가지 못했다. 책사 두진이 나사서 여광을 독촉했다,

 

  “ 양희는 문장 짓는 것에는 여유가 있으나

    기회를 살피는 것은 부족합니다.

 

    결국에는 양한의 계략을 실천하지 못할 것이니 걱정할 것 못됩니다. 

     그들의 위,아래 마음이 흐트러지게 하면서 

     급히 진격하셔서 그곳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여광은 두진의 책략을 따랐다. 급히 전진하여 고창에 이르자 태수 양한이 군대를 들어 항복해왔다. 여광의 군사는 옥문관에 도착했고 양희가 격문을 띄워 여광을 질책하면서 양윤에게 5만 군사로 주천에서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돈황태수 요정과 진창태수 이순이 여광에게 항복해왔다. 여광은 격문을 띄워 국난을 도울 생각을 않고 또 귀국하는 자신의 병사를 막은 양희를 질책했다. 팽황, 두진, 강비를 선봉으로 양주군사 양윤과 안미(감숙성 주천 동쪽)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부근 전 지역이 여광에 투항해왔다. 양주 관내 무위태수 팽제도 양주자사 양희를 체포하고 투항해왔다. 여광은 양희를 참수하고 고장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양주자사가 되었다. 두진은 무위태수를 시켰다.

 

(14) 당당한 송호와 송반의 죽음(AD385)

 

양주 모든 군현이 항복했지만 주천태수 송호와 서군태수 송반은 저항을 계속했다. 여광은 군사를 몰아서 이들을 체포하고 이렇게 꾸짖었다.

 

 “ 내가 황제의 조서를 받고 서역을 정벌했는데

   양희가 내 귀로를 끊으니 조정의 죄인 아닌가?

   왜 내게 반대하였는가?         

 

송반이 이렇게 대꾸했다.

 

  “ 장군은 서역을 평정하라는 조서를 받았지

    양주를 어지럽히라는 조서를 받은 것은 아니다.

    또 양공(양희)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이는 것인가?

    나 송반은 힘을 다했으나 부족하여 군부의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어찌 역적 저족의 팽제가 한 것과 같겠는가?

    주군이 망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늘 있는 일 아닌가?“

 

(15) 여광이 총애한 간신 위우의 배신(AD385)

 

뼛속까지 서늘하고 당당한 대꾸에 내심 많이 놀랐지만 여광은 송반과 송호를 죽였다. 양주 주부 위우는 간사하고 사악하여 아첨과 모함을 잘했다. 팽제와 함께 양희를 체포하는데 앞장선 사람이었다. 여광은 이들을 좋아하고 신임했다. 위우는 여광의 총애를 믿고 고명한 선비 요호 등 10여 명을 참소하여 죽였다. 이 때문에 양주사람들은 위우는 물론 여광도 싫어하게 되었다. 여광은 위우를 금성(감숙성 난주)태수에 임명했는데 위우는 윤오(감숙성 영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광의 충신 강비가 군사를 이끌고 위우 토벌했고 위우는 결국 달아나 흥성(윤오 서쪽)을 점거하고 버텼다.   

 

[그림] 후량(AD386-AD403) 왕조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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