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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11:바람처럼 사라진 혁련발발 하나라(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8월23일 17시5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35) 혁련발발 장안 입성과 황제 등극(AD418)

 

   

혁련발발은 장안 외곽에 있는 함양을 완전히 장악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낙양에 있던 유유는 괴은을 장안으로 보내고 대신 둘째아들 유의진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우사마 주령석을 도독장안제군사로 임명하면서 장안퇴각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말했다. 

 

  “ 가벼운 복장으로 장안을 서둘러 나서라. 

    관중을 벗어나면 천천히 가도 좋다.“

 

유유는 혁련발발이 쫓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장안을 나온 뒤에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의진이 장안을 빠져 나가자 혁련귀의 3만 군사가 장안에 들이닥쳤다. 유의진 장군 부홍지가 유의진에게 수레를 버리고 빨리 달아나자고 건의했다. 유의진은 거절했다. 급한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안을 빠져 나오면서도 주변의 마을을 약탈하고 여자를 탈취하면서 시간을 허비하였다. 

 

하나라 군사가 느릿느릿 퇴각하는 유의진 무리를 청니에서 따라 잡았다. 동진 장수 괴은, 부홍지, 모수지가 모두 청니(섬서성 남전)에서 왕매덕에게 사로잡혔다. 혁련귀가 동진의 명장 부홍지를 굴복시키려고 추운 겨울임에도 발가벗기고 고문하면서 항복을 요구했다. 부홍지는 소리를 지르며 항복을 거부했다. 결국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혁련발발이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전사한 동진군사의 머리를 쌓아놓고는 촉루(臅髏)대라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과시했다. 혁련발발이 왕매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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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이 지난 날 말한 것이 1년 만에 이루어졌으니

    가히 계산을 하면서 빼먹은 것은 없는 것이 분명하오,

    이 술잔들이 여기에 쌓인 것은 경을

    위한 것이 아니면 누구를 위한 것이겠소?“

  

혁련발발은 왕매덕을 도관상서(법무장관) 및 하양후로 책봉했다. 혁련발발은 장안 동쪽 파상에서 황제에 등극하면서 연호를 창명이라고 했다.동진의 유유는 장안을 다시 공격할 생각을 세웠으나 아들 유의진이 무사히 돌아오자 계획을 접었다. 보다 더 중요한 일, 즉 동진의 황위를 빼앗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36) 혁련발발이 은사(隱士) 위조사를 죽임(AD419) 

 

하나라를 세우고 황제자리에 오른 혁련발발은 그래도 들은 것이 있어서 숨어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튼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진시절부터 명망이 있던 숨어있는 은사 위조사를 징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겸손하며 혁련발발을 어려워했다. 화가 난 혁련발발이 심하게 그를 질책했다.

 

  “ 내가 선비를 등용하려고 너를 불렀는데

    너는 나를 못된 무리로 생각하고 나를 꺼리는구나. 

    요흥에게도 절을 하지 않던 네가 

    나에게는 어찌 절을 하느냐?

    살아있는 나도 황제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내가 죽으면 어쩔 참이냐?“ 

 

마침내 위조사를 죽였다. 혁련발발의 조급하고 과격하며 선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잘 나타나는 사건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혁련발발은 성격이 영리하면서도 교활 포학하고 백성을 지푸라기 보듯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주변에 거리끼는 혐의가 있는 사람은 직접 칼이나 활로 죽였으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눈을 뽑았고 빈정거리며 웃는 사람은 입술을 도려냈고 간언을 올리는 사람은 혀를 뽑은 다음 목을 잘랐다.

 

 

혁련발발의 신하들은 줄기차게 도읍을 장안으로 정하자고 졸랐다. 혁련발발은 이렇게 대답했다.

 

  “ 짐이 어찌 역대 조정의 도읍지 장안을 모르겠느냐?

    그러나 장안에 도읍하게 되면 

    강적 북위까지 거리가 100리 밖에 되지 않는 통만(섬서성 정변)이 위태롭다. 

    그러나 내가 만약 통만에 있으며 

    북위는 절대로 황하를 건너 쳐들어오지 못할 것 아니겠느냐?‘ 

 

신하들이 놀라면서 말했다 

 

  ”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혁련발발은 장안에 남대를 설치하고 아들 혁련귀에게 옹주(장안지역)을 맡기고 통만으로 돌아갔다.

 

 

(37) 동진이 멸망하고 유유가 송을 건국(AD420) 

 

지난 해(AD419) 동진 황제 안제 사마덕종을 교살하고 그 동생 사마덕문을 세웠던 58세 송왕 유유는 장안에서 물러나와 수양(안휘성 수현)에 주둔하면서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군웅이 그랬듯이 그런 속내를 감히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말을 꺼내는 순간 자리를 탐내는 하찮은 인간으로 전락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한 유유는 연회석상에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한탄했다.

 

  “ 경사(수도 건강)로 돌아가 노후를 편하게 보내고 싶소.”   

 

유유의 중서령 부량이 그 말뜻을 알아챘다.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불현 듯 유유의 속뜻을 알아차린 부량이 재빨리 발길을 돌려 유유의 숙소로 되돌아갔으나 이미 궁궐문은 잠겨있었다. 문짝을 급히 두드려 유유를 뵌 부량이 유유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 신이 잠시 도읍으로 돌아가야 겠습니다.“

 

유유 또한 밤늦게 다시 되돌아와 건강으로 가겠다는 그의 의도를 즉시 짐작했다.

 

  “ 몇 명이면 되겠소?”

 

부량은 수십 명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유유는 흔쾌히 허락했다. 밤늦게 궁궐을 나오면서 부량은 하늘에 장성(유성)이 하늘 가로지르는 것을 보면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AD420년 초)

 

   “ 내 평소에 천문이라는 것을 믿어 본 적이 없지만   

     오늘에서야 영험이 있다는 것을 알겠구나.“

 

부량은 건강에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은 4월 유유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넌지시 당시 동진 황제 공제에게 선양을 귀띔했다. 

 

공제는 전혀 놀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바라던 바요.”

 

이렇게 해서 유유는 동진의 마지막 황제 공제 사마덕문의 양위를 받고 6월14일 황제자리에 올랐다. 영릉왕으로 깎아 내려진 사마덕문은 얼마 있지 않아 질식사 당했다. 이로써 사마염이 AD265년 창건한 서진은 AD310년 망했다가 AD317년 사마의의 증손자 사마예가 세운 동진이 건국한 지 103년 만에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유유를 유(남)송의 무제라고 부른다(재위: AD420-AD422)   

 

 

(38) 북위 탁발사의 와병과 탁발도(AD422)

 

AD422년경 전 중국의 판도는 3강 2약의 구도였다. 3강이란 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혁련발발의 하나라와 북경주변을 지배한 탁발사의 북위, 그리고 광대한 장강 이남지역을 관할하는 유송이다. 2약이란 AD420년 서량을 멸망시키고 장액과 주천에 웅거한 저거몽손의 북량과 AD414년 독발욕단의 남량을 멸망시키고 난주를 점령한 서진의 걸복치반이다.       

 

하, 북위, 및 유송의 3강중에서 가장 무력이 강한 나라는 아무래도 북위였고 경제적 기반이 강한 나라는 유송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강국은 내부적으로 큰 혼란에 봉착해 있었다. 북위 주군 탁발사와 유송의 주군 유유가 모두 몸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유송이야 거의 육십 세였으므로 그렇다하더라도 탁발사(AD392년생)는 만 30세에 불과했다. 역사가들은 평소 복용하던 회춘약 한식산의 부작용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탁발사는 측근 최호에게 후계에 대해 물었다.

 

  “ 여러 아들이 아직 어린데 

    나 죽은 후의 계책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최호가 이렇게 대답했다.

 

  “ 지금 동궁(후계자)를 세우시고

    현명한 신하를 좌우빈객과 친구로 삼으셔서

    들어가서는 만기를 친람하게 하시고

    나가서는 군사를 총괄하시게 하시면 됩니다.

    장자를 세우는 것은 큰 도리이므로

    성인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능력이 있는 자를 세우시기로 한다면

    거꾸로 앞으로 큰 혼란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신하들도 대개 같은 의견이었다. 탁발사는 장자이자 태평왕이던 탁발도를 황태자로 삼고 측근대신 장손숭과 해근과 안동을 좌필, 최호와 목관과 구퇴를 우보로 임명하여 태자를 보필하게 하였다.

 

 

(39) 유송의 유유 사망(AD422년 5월)

 

이 때 유송의 주군 유유도 몸이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당시 태자였던 장자 영양왕 유의부는 소인배와 가까이 하면서 놀이와 주색에만 탐닉할 뿐이었다. 걱정을 거듭하던 영군장군 사회가 유유에게 조용히 건의를 올렸다.

 

  “ 폐하의 춘추가 높으셔서 

    만세를 보존하실 생각을 굳건히 하셔야 할텐데

    신기(神器, 사직을 말함)는 매우 중요함으로 

    재주없는 사람에게 짊어지게 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황상도 공감하고 있던 차라 이렇게 물었다.

 

  “ 여릉왕(유의진)은 어떤가?”

 

사회가 말을 거의 가로막다시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제가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가 여릉왕에게 가자 여릉왕은 의욕적으로 정치와 병무를 이야기하려 했지만 사회는 묵묵히 대꾸도 않고 응대하지 않고서 돌아와 보고했다.  

 

  “ 품덕이 가벼우니 군주의 재질이 아닙니다.”

 

유유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유의진을 도독남예,예,옹,사,진,병육주제군사로 삼아 밖으로 내보냈다. 잠깐 유유의 병이 나아지는 듯 했으나 두 달도 안되어 유유는 깊은 병으로 눕게 되었다. 태자 유의부를 침전으로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 단도제 보다는 형 단소가 뛰어나다.

    서선지와 부량은 충신이라서 결코 반역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여러 정벌을 성공시킨 사람이어서 임기응변에 능하고

    또 정세판단이 뛰어나다.

    만약 일을 일으킨다면 이 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후세에 만약 어린 군주가 있게 되거든

    원숙한 재상에게 일을 맡길지언정 

    모후가 정치에 나서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라.“  

 

그런 뒤 사공 서선지, 중서령 부량, 영군장군 사회, 진북장군 단도제가 고명을 받게 하고 유유가 세상을 떠났다. 재위 2년 만 59세였다. 태자 유의부가 17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자치통감 기록에 유유는 청렴하고 간결했으며 욕심이 적었다고 했다. 엄정하며 법도가 있었고 검소하여 잔치를 여는 일이 거의 없었고 또 비빈에게 가까이 가는 일도 없다고 했다. 영남지역에서 거미 실로 짠 정교한 포 1단 8장을 보내오자 되돌려 보내면서 다시는 그런 포를 만들지 말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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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8월23일 17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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