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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N: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4월06일 09시5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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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요장의 후진 황제즉위(AD386)

 

장안은 텅 비었다. 사람들은 다 죽거나 도망가고 없었으며 건물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 예전 형양(하남성 형양) 태수였던 조곡이 흉노 4천여 호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왔다. 후진 요장이 안정으로부터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입성했다. 주변의 모든 떼도적들이 요장에게 항복했다. 

요장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대진으로 삼았다. 전진이 세운 나라와이름이 같다. 따라서 역사에서는 요장의 대진을 후진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요장이 축하연을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

 

“ 얼마 전만 해도 우리가 여기서 북면하여 전진을 섬겼는데 

  이제 우리가 홀연히 군주와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좀 부끄럽지 않은가?“

 

조천이라는 자가 말했다.

 

“ 하늘이 폐하를 아들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어찌 신들이 부끄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요장이 흐뭇해하며 크게 웃었다.

 

 

(80) 부비의 전사와 부등 계승(AD386)

 

AD386년 6월 전진황제 부비는 도독중외제군사 왕영을 통해 전국에 격문을 뿌렸다. 모용수의 후연과 후진의 요장을 토벌하는 대군을 일으켜 맹동(섬서성 대현)에 결집하자는 선동이었다. 부비의 토벌격문을 보고 곳곳의 토후들이 수백 혹은 수천의 군사를 모아 호응해왔다. 전진 주군 부비는 멀리 남안(감숙성 농서)에 웅거하고 있는 사촌동생 부등과 연락하면서 연대를 모색했다. 전진의 평량(감숙성 화정)태수 금희와 안정도위 몰혁간이 후진의 요방성 군사를 안정부근에서 격파했다. 화가 난 요장이 손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금희의 군사를 깨부수었다. 

        

산서성 문희에 머물고 있던 서연의 모용영은 전진의 부비에게 동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부비가 거절했다. 모용영이 가고자 하는 곳은 적국 후연 모용수의 땅이다. 만약 모용영을 보내 준다면 모용수의 세력은 더 강해질 뿐이다. 부비는 열어 줄 수가 없었다. 서연 모용영의 군대와 전진 부비의 군대는 양릉(산서성 임분)에서 결전을 벌였다. 불행하게도 전진이 대패했다. 전진 좌승상 왕연과 위장군 구석자가 전사했다. 부비는 수 천 기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갔으나 얼마 못가 섬(하남성 삼문협)에서 동진의 양위장군 풍해에게 패하고 전사했다. 부비의 아들 태자 부녕과 장락왕 부수는 체포되어 건강으로 압송하려 하였으나 건강 조정은 조서를 내려 부씨 유족들을 동진 강주(강서성 구강)에 망명와 있던 부굉과 합류시켰다. 모용영은 부비를 물리친 다음 장자(산서성 장치)를 점거하고 황제를 칭했다. 사로잡힌 부비의 처 양씨를 상부인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양씨 부인은 강하게 거부하면서 모용영을 패도로찔렀다. 모용영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양씨를 죽이고 말았다.(AD386)  

 

 

(81) 부등이 감숙 임하에서 일어남(AD386)

 

전진의 남안왕 부등은 부비의 사촌 동생으로써 남안(감숙성 농서)에 웅거하고 있었다. 장안의 전진이 무너지고 부씨 황실이 곳곳으로 흩어져 패사하거나 동진으로 망명했지만 유일하게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사람은 부등 뿐 이었다. 전진에 호의적 이었던 유민들은 하나 둘씩 농서로 모여들어 3만호 이상의 큰 세력으로 발전했다. 부비는 천수에 주둔하고 있는 후진의 진주자사 요석덕을 습격했는데 후진 황제 요장이 직접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석덕을 격파했으며 요장은 부상까지 입었다. 이 때 죽은 후진군사가 2만을 넘었으니 부등으로써는 보기 드문 대승을 거둔 셈이다.(AD386년 10월)

 

이 때 부비의 어린 아들 발해왕 부의와 제북왕 부창이 상서 구유와 함께 난을 피해 농서 부등에게로 찾아왔다. 부등을 부의를 황제로 세울 생각이었으나 요장과 모용수와 모용영이라는 강적을 맡아 처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본인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386년11월) 부등은 군사 5만을 이끌고 동쪽에 있는 후진을 공격했다. 모든 갑옷과 병기에는 사(死)와 휴(休) 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죽어야 휴식을 취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엄격한 군율과 매우 과학적인 포진법(네모 형태의 방진형 포진)을 구사하여 전투에 임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부등은 요장이 후하게 부견의 시체를 묻어둔 섬서성 빈현의 보루를 확보하고 그곳을 지키는 후진의 서숭과 호공에게 각각 옹주자사와 경조윤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마침내 부등은 다시 장안에 입성했다.     

    

(82) 부견의 환관 광조와 모용수(AD387)

 

전진의 부견에게는 광조라는 충직한 내시가 있었다. 모용수와 부견은 장안에 같이 있을 때 자주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부견에게 광조가 이렇게 물었다.

 

“ 폐하께서는 아직도 모용수를 많이 의심하시는지요?

  그는 아무래도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견은 그 말을 모용수에게 알려줬다. 광조라는 사람조차도 모용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는 호의로 모용수에게 전한 것이다. 한참 뒤 모용수가 독립하고 업을 포위하며 공격할 때 광조는 빠져나와 동진으로 갔고 광조는 동진 조정에서 하북지방 태수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하북지방이 모용수의 영토로 들어오게 되자 광조 또한 모용수에게 사로잡혔다. 모용수는 부견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전진의 관리였던 광조 등을 용서해 주었다.

 

“ 그대들을 모두 용서한다. 

  전진왕(부견)이 나를 깊이 대해줬고

  나 또한 그를 마음깊이 섬겼으나

  두 공(부비와 부휘)가 질투하고 시기하여 내가 튀쳐 나온 것이다.

  전진왕을 생각할 때마다 한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모용수는 광조에게 금과 비단으로 후하게 선물을 내렸으나 광조는 받지 않았다. 모용수가 이렇게 물었다.

 

“경은 아직 나를 의심하는가?”

 

광조가 대답했다.

 

“ 신은 오로지 주군에게 충실해야 함만을 알고 살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지금까지도 부견황제를 마음속에 품고 계신 줄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신은 어찌 감히 죽음에서 도망칠 수가 있겠습니까.“ 

 

모용수가 이렇게 말했다.

 

“ 이것이야말로 경의 충성이요 진실로 내가 요구하는 것이다.

  앞서 의심하느냐고 물은 것은 농담이었다.“

 

모용수는 광조를 더욱 두터이 여겨 중상시라는 자리에 앉혔다. 

 

 

 

(83) 전진의 내분과 부찬의 피살 (AD387)

 

 

부등은 부비의 아들이자 종조카인 부의를 황태제로 삼아 황위계승을 약속했다. 그리고 동해왕 부찬에게 도독중외제군사라, 태사, 영대사마 등 최고위직을 내렸다. 부찬은 부등의 황위등극에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수선한 만큼 일단 수용하기로 했다. 자신의 근거지인 노수(섬서성 황릉, 장안 북쪽 130KM)에서 군사를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주변 이민족이 속속 귀부하여 부찬의 군대는 10만이 넘는 대군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전진의 부등의 세력은 진주(감숙성 천수시 주변), 익주(사천성 성도 주변), 그리고 양주(사천성 낭중 주변)에 걸쳐 있었는데 북쪽으로 후진의 요장과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부등의 익주목 양정과 노수의 부찬이 힘을 합해 후진의 장수 요석덕을 경양(감숙성 평량)에서 대파하였다. 요장이 신속하게 구원군을 보내오자 부찬과 양정은 부육(섬서성 낙천)으로 피하였다.    

 

전진의 풍익태수 난독이 2만 군사를 가지고 부찬에게 함께 장안을 공격하자고 제안해 왔다. 

부찬이 승낙했다. 동생 부사노는 이 기회에 형 부찬에게 황제를 선언하라고 독촉했다. 부찬이 망설이자 부사노가 형을 죽이고 독립했다. 난독은 부사노와의 동맹관계를 거절했다. 서연의 모용영이 공격해오자 난독은 요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요장과 난독의 연합군은 부사노를 대파했다. 부사노는 북쪽 선비족의 땅으로 도망갔고 부찬이 차지했던 노수(섬서성 황릉)땅은 모두 후진의 요장에게 흡수되었다. 요장이 다시 장안을 장악했다.(AD387년9월) 

   

 

(84) 후진 요장의 귀신 : 부견 모습의 목을 보냄(AD389)

 

당시 부등은 조나(영하 팽양 서쪽)에 주둔하고 있었고 요장은 천수 남쪽에 있었다. 서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후진의 군대가 번번이 전진의 부등에게 패하자 요장은 부견의 귀신이 전진군사를 돕는다고 믿었다. 전진에 있을 때 부견이 베푼 환대를 생각하면, 그리고 반란하지 말라는 아버지 요익중의 유언을 생각하면 부견의 목을 졸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에 깊이 시달렸다. 요장은 나무로 부견의 형상을 만든 다음 부견의 목상에다 대고 절을 올리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 형님 요양께서 제게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신평(섬서성 빈현:여기서 부견을 목졸라 죽임)의 재앙이 일어난 것이지

  제가 폐하께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부등은 폐하의 먼 친척(조카)인데도 저렇게도 복수심에 불타 있는데

  하물며 친동생인 저야 어떻겠습니까?

  또 신에게 용양장군으로 대업을 이루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페하를 위해 형상을 세웠으니

  노함을 푸시고 신을 책망하지 마시옵소서.“

 

이런 사과에도 불구하고 전과가 나지 않자 화가 난 요장은 나무형상의 목을 자른 다음 부등에게로 보냈다. 부등은 두충과 양정 등 제장들에게 명하여 후진총공격을 명하고 장안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AD389년10월) 부비의 잔존 세력들을 부등이 모두 규합했다.        

 

 

(85) 부등의 안정공격 패배와 요장의 겸양(AD391)

 

AD391년 12월 전진의 부등이 안정(감숙성 진원 동남)에서 후진을 습격했다. 요장은 직접 음밀(감숙성 영대)로 가서 부등을 막으면서 장안을 지키는 태자 요흥에게 지시했다.

 

“ 구요가 반드시 장안을 엿보고 알현 들어 올 것이니

  기다렸다가 그를 잡아 죽이라.“

 

안정에서 요장은 부등을 격파했다. 부등은 군사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부하들이 요장을 칭찬하자  요장은 죽은 형님 요양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형님보다 못한 것이 네 가지다.

  키가 8척5촌이 형님의 키를 못 따라감이 첫째고,

  10만 대군을 휘몰아치면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을 못 따라감이 둘째요,

  배워서 익힘과 도와 예를 행함과 영재를 거두고 모으는 것에 못 따라감이 셋째요,

  통솔함에 있어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하게 하는 것을 못 따라감이 넷째다.

  모든 것에 부족하기 때문에 늘 많은 인재를 모으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계산하고 책략을 세우는 데 부족함이 없는지

  항상 반성하며 살아 온 것이 오늘의 내가 있게 된 이유이다.“

 

 

(86) 부등의 관중세력회복(AD392)

 

후진 창업자 요장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태자 요흥을 곁으로 불렀다. 정남대장군 요방성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부곡(휘하의 무장세력)을 모두 제거해야 위협이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 말에 따라 태자 요흥이 왕통, 왕광, 부윤, 서성, 모성 등 강력한 부곡을 모두 제거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병상의 요장이 외쳤다.

 

“ 왕통 형제는 고향 사람이다.

  실로 다른 뜻이 없고 

  또 서성과 모성과 부윤도 전진의 유능한 장군인데 

  그들을 죽이면 장차 어떻게 전쟁을 치를 셈이냐!“

 

요장의 와병 소식을 들은 부등은 크게 기뻐했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군사를 모아 지난 번 뺏긴 안정을 향해 진격했다. 요장이 건강에 차도가 있어서 요희융을 파견하고 부등의 공격을 막았다. 부등이 탄식했다.

 

“ 도대체 저 요장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나오면서도 모르게 나오고 느끼지도 못하게 다가오는가.  

  그가 죽었다 하더라도 다시 나타날 것 같으니

  짐은 이 무서운 강족과 같은 하늘에서 산다는 쟁앙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요장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관중 전역으로 번지자 후진에게 복속했던 많은 무리들은 다시 전진의 부등에게로 투항했다. 이로써 부등은 손쉽게 관중 전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87) 전진 두충의 무모한 요구와 부등의 공격(AD393)

 

부견이 사망하고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전진이 부등에 의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해 나갈 때 우승상 두충이 무리한 요구를 해 왔다. 자신을 천수왕으로 책봉해 달라는 것이다. 아직 전진의 강토를 다 회복한 것도 아니고 요장의 후진과 치열하게 각축하는 형편에 사실상 나라를 떼어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요구였다. 부등은 거절했다. 두충은 자신의 세력을 몰아서 부등과 결별하였다. 

 

부등은 곧바로 야인보(섬서성 포성)에 주둔한 두충을 공격했다. 두충은 후진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요장의 측근 윤위는 태자의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요흥을 파병하라고 독촉했다. 요장은 그의 말대로 따랐다. 요흥이 군대를 이끌고 부등의 배후를 공격했다.부등은 두충에 대한 포위를 풀고 요흥에 맞대응하기 위해 돌아섰다. 요장은 요흥에게 즉시 돌아와 장안을 수비하라고 명했다.

 

     

(88) 요장의 유언(AD393년 )

 

병이 다시 심해지자 요장은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태위 요민, 복야 윤위, 요황, 요대목 및 상서 적백지 등 조정 중신을 불러 유조를 남겼다. 그리고 태자 요흥에게 당부했다. 

 

“ 여기 있는 여러 공들을 헐뜯는 사람이 바깥에 있거든

  신중히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말아라.

  너는 은혜로 골육을 어루만지고,

  예의로써 대신들을 존경하며,

  믿음으로써 모든 일을 대하고,

  어짊으로써 백성들을 만나라.

  이 네 가지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걱정거리가 없을 것이다.“

 

복야 요황이 울면서 부등을 깨뜨릴 계책을 묻자 요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 지금 대업은 다음 대에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요흥의 재주와 지혜가 충분한 데 어찌해서 다시 묻는가?“

 

요장이 죽었다. 64세 였다. 요흥은 아버지의 죽을 비밀에 붙이고 숙부 요서에게 안정(감숙성 진안), 요석덕에게 음밀(감숙성 영대), 아우 요숭에게 장안을 지키도록 맡겼다. 어떤 사람이 요석덕에게 권하기를 요흥이 장차 죽일지도 모르니 군대를 이끌고 진주(감숙성 천수)로 피했다가 사태 추이를 살피라고 하자 요석덕이 이렇게 말했다.

 

“ 태자 요흥은 뜻이 밝고 도량이 넓으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또 부등이 살아있는데 서로 다툰다면 스스로 망하는 길일 뿐 입니다.

  죽기로 작정한다고 치더라도 그런 못난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

 

 

(89) 부등의 웃음과 교만한 남진(AD394)

 

부등은 요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날아갈 듯 기뻤다. 

 

“요흥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장차 나뭇가지로 그의 볼기를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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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요흥의 나이는 스물일곱, 부등은 쉰이었다. 부등은 부광에게 수도 옹(섬서성 봉상)을 맡기고 군사를 몰아 동쪽으로 내려왔다.(AD394년1월) 부등의 군사가 폐교(섬서성 흥평)에 도달하자 후진의 요상이 전진군대를 막았다. 요흥은 윤위를 보내 요상을 지원했다. 위수를 두고 전진군대와 후진군대가 크게 전투를 벌였으나 전진이 크게 참패했다. 부등은 홀로 옹(섬서성 봉상)으로 달아났는데 봉상에 있던 태자 부숭 또한 패전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봉상에 아무도 없자 부등은 잔당을 이끌고 북쪽 평량쪽으로 갔다가 영하자치구 고원의 마모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부등은 아들 부종을 하남왕 걸복건귀(나중에 西秦의 2대 제왕)에게 인질로 보내고 구원을 빌었다. 걸복건귀는 걸복익주에게 1만 군사를 주어 부등을 도왔다. 전진과 서진 연합군은 후진 요흥과 안정(감숙성 진원)에서 결전을 펼쳤다. 부등이 이 전투에서 사로잡혀 죽었다.(AD394년7월) 아들 부숭이 황중(청해성 서녕)으로 달아나 황위를 이었지만 석달 뒤 서진의 걸복건귀 군사에게 전사했다. 이로써 전진은 완전히 소멸되었다.(AD394년 10월)

 

 

 

(90) 전진의 멸망원인 : 잠깐의 패착으로 북중국이 무너지다.

 

5호16국 시대 최초의 북중국 패자 전진(前秦,AD351-AD394)은 사실상 비수대전(AD383년11월)의 패배로 끝이 났다. 부견이 후진의 요장에 의해 목졸려 죽은 뒤(AD385) 그 후 약 10년 동안 부견의 아들 부비와 조카 부등에 의해 명목을 유지했지만 그들은 망명정부였지 사실상 주도권을 쥐 과거의 패자 전진이 아니었다. 삼촌 부건이 세운 전진을 AD357년 스물 살 때 이어받은 부견은 질투심이 많으면서도 재능이 뛰어난 인재 왕맹의 도움을 받아 낙양함락(AD370), 전연(AD371), 전량(AD376) 및 대(AD376)를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북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사마광이 평가한 대로 부견은 총명하고 인재영입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부견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관대했다. 반란을 일으킨 형제들을 죽기이기를 극히 꺼려했을 뿐만 아니라 멸망시킨 나라들의 군주조차(모용위나 모용평) 죽이지 않고 등용했다. 사마광은 부견의 관대함을 개인의 장점일 뿐 국가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는 옳은 것이 아니라고 폄하했지만 역사를 통해 부견만큼 살상을 좋아하지 않은 군주를 찾아보기 힘들다. 나중에 후진을 세우는 요장이나 후연을 세운 모용수조차 부견의 이러한 관대함에 대하여 고마워하고 은혜로 생각했을 정도다. 부견은 사냥을 절제하라는 왕락의 충고를 듣고 즉시 사냥습관을 버렸으며 한 번 중책에 신하를 임명하면 절대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이런 부견의 훌륭함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왕맹이 사망(AD375)하고 나서도 실수를 범하지 않으면서 AD376년 북중국을 마침내 통일한 부견의 결정적인 패착은 AD383년 비수대전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의 치명적인 작은 실수였다. 당시 동진 조정은 내부 분쟁이 극에 달하였다. 당연히 전진으로써는 승리를 장담했다. 동진에 사안과 사현이라는 뛰어난 존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전진의 패착은 부견의 판단 착오였다. 군사를 조금만 뒤로 물려주면 강을 건너와 싸움에 임하겠다는 사현의 계략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응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100만에 가까운 대군이 병기와 함께 ‘뒤로 약간 물리는 동안 일어날 어마어마한 혼란‘에 대해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패착이 전진을 멸망시키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수적으로 10 대 1로 형편없이 열세였던 동진군이 노린 것은 그 잠깐의 혼란의 틈이었고 부견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마광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옳다.     

 

  “ 부견이 망한 이유는 많이 승리한 데 따른 교만이 원인이었습니다.

    위문후가 오나라가 망한 이유를 재상 이극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주 싸우고 자주 이겼기 때문입니다. ’

    문후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복일 텐데 어찌 나라가 망하는 길인가?

    이극이 대답했습니다.

    ‘자주 싸우면 백성이 고달프고 자주 이기면 군주가 교만해 집니다.

    교만한 군주가 피곤한 백성을 부리면서 

    아직 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전진왕 부견이 이것을 꼭 빼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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