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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I :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3월01일 17시0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1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3) 부견과 왕맹과 고태(AD372)

 

양평공 부융은 부견의 막내 동생으로 기주(하북성 기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아직 어렸기 때문에 정치가 서툴렀지만 신소라는 훌륭한 막료 때문에 그런대로 꾸려 나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신소가 지방관으로 나간 후 부융의 실수가 잦아졌다. 부융은 규정을 어기고 멋대로 학사를 지어 규탄을 받게 되었다. 학사를 마음대로 짓지 못하게 한 까닭은 그곳에서 파당을 형성하면서 자주 조정에 반대되는 비판세력들이 양성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부융을 탄핵하는 조서가 올라오자 부융은 주부 이찬을 장안에 보내 규명하려고 했으나 이찬은 장안으로 가는 도중에 객사하고 말았다. 부융은 궁리 끝에 신소를 불러 대책을 물었다. 신소는 이찬 죽은 이찬 대신에 고태라는 사람을 장안 사신으로 보내자고 했다. 사실 고태는 지혜와 담력도 있고 말솜씨도 뛰어나 여러 차례 왕맹과 부융이 벽소(지방조정 출사를 부탁)했었던 사람이었지만 나오지 않았었다. 다급한 부융이 고태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 군자는 다른 사람의 위태로움은 구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했는데

  경은 또 다시 사양만 하고 있을 겁니까?“ 

 

고태가 그 말을 듣고 일어나 장안 사신으로 나섰다. 왕맹이 고태를 보고 반가이 맞으며 물었다.

 

“ 고자백(고태)이 이제야 마침내 나오시니 어찌 그렇게도 늦었소?”  

  

고태가 말했다.

 

“ 죄인이 와서 형벌을 받고자 함인데 어찌 늦고 이름을 묻소?“ 

  

의아한 왕맹이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고태가 대답했다.

 

“ 옛날 춘추시대 노나라 희공이 반궁(학교) 때문에 칭찬을 받았고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도 직하(稷下, 76인 현자의 공부모임)로 명성을 떨쳤는데

  지금 양평공(부융)께서 학사를 세워 노나라와 제나라를 추종하려고 하는 데에도

  상을 내리고 칭찬하기는커녕 도리어 번거롭게 탄핵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밝으신 공께서는 조정의 아형(아형, 재상)이신데

  징계나 권고하는 것이 이 정도라면 

  아래에 있는 관리들은 어느 곳으로 그 죄에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왕맹이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탄식했다.

 

“ 저렇게 훌륭한 고자백이 어찌 부융의 관리가 되어야 하는가?”

 

왕맹은 곧바로 고태를 부견에게 추천했다. 고태를 접견한 부견이 기뻐하며 고태에게 나라 다스림의 근본을 물었다. 고태는 이렇게 답변했다.

 

“ 다스림의 근본은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治本在得人)

  사람을 얻는 것이란 살펴서 뽑는 것에 있습니다.(得人在审举)

  살펴 뽑는 것이란 핵심에 진실함에 있는 것이니(审举在核真) 

  관직에 그에 적당한 사람을 뽑지 못한다면(未有官得其人) 

   국가는 잘 다스려 질수가 없습니다.(而国家不治者也)“

 

부견이 말했다.

 

“ 참으로 말은 간단한데 이치는 정말로 넓다고 할 수가 있겠소(可谓辞简而理博矣)”

 

고태를 상서랑에 임명했으나 계속해서 고사하고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허락하였다.

 

 

(54) 부견의 남정 : 양주(梁州) 익주(益州) 점령(AD373년11월)

 

동쪽 전연이 전진에 함락되자 부견은 남서쪽 익주(사천성)와 량주(섬서성 남서부 한중)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이 땅은 모두 동진의 영토였지만 동진 조정에서는 간문제가 사망하고(AD372) 막강한 실력자 환온이 정권을 휘두르면서 조정 내분이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부견은 왕통과 주융에게 2만 군사를 주어 양주로 보냈고 모당과 서성에게 3만 군대를 주어 사천성 검각 방면으로 보냈다. 동진의 양주자사 양량이 1만 군사로 대항했지만 청곡(선서성 양현)에서 대패하였다. 한중과 검각이 쉽게 함락되자 전진 조정은 양안을 익주목으로 성도(사천성 성도)에 진수시키고 모당은 양주자사로 한중에 진수시켰다. 이로써 전진의 영토는 지금의 사천성 북부 일대와 섬서성 남부까지 확장된 셈이다.

 

동진의 재동(사천성 재동현)태수 주효는 부성(사천성 산태현)을 끝까지 사수하고 있었다. 양안이 수천명의 군대로 부성을 공격하자 주효는 어머니와 가족을 호송하여 강릉으로 호송한 뒤 죽음으로 항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족이 강릉으로 도망가던 도중에 전진군대에게 사로잡혀 주효는 할 수 없이 양안에게 항복한 것이다. 전진 부견이 주효를 상서랑으로 삼고자 하자 주효가 사양하며 말했다.

 

“ 동진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죽음으로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모친께서 사로잡히셔서 절개를 잃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이 온전하게 된 것 만해도 전진의 은혜입니다. 

  공후 작위를 받아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낭관가지고서야 어찌 고맙다고 덥썩 받겠습니까?“

 

새해 연회를 열고서 부견이 전진의 신년하례가 동진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로 화려한가를 묻자 주효가 욕을 하며 이렇게 대꾸했다.

 

“ 개와 양떼(전진을 비하한 말)를 모아 놓고서 

  어디 천조(동진 조정)와 비교한단 말이요.”   

 

주효는 전진에 대해 매우 무례하게 행동했으므로 전진 관료들이 번번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부견은 살려두었다. 

 

 

(55) 태사령 장맹과 부융의 경고(AD373)

 

전진의 태사령 장맹이 어두운 별자리 움직임을 보고 부견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금 혜성이 미자리와 기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정으로 들어왔습니다.

  미자리와 기자리는 연나라이고 동정은 우리나라이니

  앞으로 10년 이내에 연나라가 우리나라를 친고

  20년뒤에는 대가 연나라를 칠 징조입니다.

  아직도 연의 잔당들이 살아남아 있으니

  이 기회에 뿌리를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견은 듣지 않았다. 동생 양평공 부융도 상소문을 올렸다.

 

“ 동호(선비족. 즉 연나라) 들이 여섯 주에 웅거하면서

  참람하게 황제를 일컫다가 형님에게 축출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형님께 복속하는 모양을 보이는 것은 진심이 아닙니다.

  형님께서 그들을 너무 총애하시고 가까이 하시니  

  원래 전진의 공신들조차 기울어질 정도라고 봐야 합니다. 

  신은 어리석지만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저들과는 

  절대 끝까지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통촉하셔야 합니다.“

 

부견이 이렇게 답변하였다.

 

“ 짐은 바야흐로 6주를 통합하여

  한 집안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경계하는 마음을 품지 말거라.

  오직 덕을 쌓는 것만이 재앙을 물리치는 길이니

  진실로 이것을 자기에게서 찾는 다면

  어찌 바깥의 환난을 걱정하겠느냐?“ 

 

부견의 심중을 잘 반영하는 말이다. 부견은 진심으로 잔인한 살생대신 덕치를 몸소 행해 보이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명광전이라는 궁궐에서 큰 소리로 외쳐댔다.

 

“ 갑신 을유날 고기와 양(魚와 羊, 즉 선비족인 연나라를 의미)이

  사람을 잡아먹는구나.

  아 슬프다,

  남는 것이 없겠구나!“ 

 

소리지른 사람을 찾지 못했다. 환관 조정이 부견에게 연나라 출신들을 모두 잡아 죽이자고 했으나 부견은 듣지 않았다.(AD374)

 

 

(56) 왕맹의 죽음(AD375년 )

 

AD375년 6월 전진의 승상 왕맹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부견은 친히 남북교와 종묘에 나아가 제사를 올렸으며 황하와 화산 등 여러 명산에 특사를 보내 왕맹의 쾌유를 비는 산신제를 올리게 했다. 왕매의 병에 다소 차도가 보이자 사형 이하 모든 죄수를 사면해 주었다. 왕맹이 상소문을 올렸다.

 

“ 폐하께서 제 몸을 위하여

  죄인을 사면하시는 천지 덕을 훼손하시니 

  개벽이래로 없던 일입니다.

  덕에 보답하는 길은 

  모든 것을 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했으니

  삼가 죽을 목숨을 내려서 감히 유언의 말씀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위엄과 맹렬하심이 8황에 떨치셨고

  울리는 가르침은 6합에 빛났으며

  9주 백개 군에서 열의 일곱은 전연을 평정하고 촉을 토벌한 것이어서

  마치 얻은 검불 같은 것입니다.    

  무릇 잘 만든 사람이 잘 이루는 것은 아니며

  잘 시작하는 사람이 잘 마무리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옛 제왕들은 공업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고 여겨

  전전긍긍 마치 깊은 골짜기를 건너 듯 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앞서 간 성왕들의 발자취를 

  잘 뒤쫓으신다면 아주 다행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견은 통곡으로 흐르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왕맹의집으로 찾아간 부견이 후사를 묻자 왕맹이 이렇게 대답했다.

 

“ 동진은 장강 이남 외딴 곳에 있기는 하지만

  정통성을 가진 나라인데다가 위아래가 화평하나 

  섣불리 도모하시려고 하지 마십시오.

  선비족(연)과 강족(토번 등)은 우리의 원수가 되는 적들이니      

  차츰 그들을 제거하셔서 사직을 편하게 하셔야 합니다.“

 

말을 마치자 왕맹이 숨을 거두었다. 나이 50이었다. 부견은 염을 하기 까지 세 번이나 그를 찾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는 계획을 하늘이 앗아 간 것이라고 생각하여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전한 곽광(?-BC68)의 예에 따라 장사를 치렀다.

 

왕맹이 죽은 뒤 부견은 청송관을 설치했다. 백성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기관으로 5일에 한 번 씩 직접 나아가 백성들의 생각을 들었다. 도교나 노장 사상을 금지하고 이를 범하면 목을 베었다. 도참서를 읽은 상서랑 왕패를 죽였으며 전통 유가 경전의 학습을 중시 여기며 인재선발이 공정하도록 특별히 유념했다.(AD375)

 

 

(57) 부견의 전량 멸망(AD376) 

 

전량의 장천석은 전진에 대해 칭번을 했다가 뒤집었다가 하면서 변덕이 심했다. 전진이 위태롭다고 생각되면 독립을 선언했다가 전진이 강해지면 머리를 숙이고 칭번한다고 번복했다. 게다가 장천석은 아버지 장준이 죽고 형 장중화가 집권하면서 조정이 내분에 빠졌을 때 장옹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으면서(AD363) 공을 세운 유숙과 양경을 양자로 삼고 모든 권력을 맡기고 주색에 빠져 살았다. 세자 장대회를 폐립하고 첩 소생 장대예를 세웠다.(AD376) 부견은 황음무도한 장천석에게 장안으로 직접 오라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만약 거부한다면 즉각 토벌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AD376년6월) 

 

부견은 13만의 대군을 서쪽으로 보냈다. 사지절 무위장군 구장과 좌장군 모성, 중서령 양희그리고 보병교위 요장이 군사를 거느렸다. 그 뒤를 진주자사 구지, 하주자사 이변, 그리고 양주자사 왕통이 받혀주었다. 상서랑 양수와 염부는 장천석 소환장을 갖고 고장(감숙성 무위)에 도착했다.(AD376년7월) 

 

장천석은 측근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숙의했다. 부르는 대로 가면 죽을 것이요 안가면 전쟁이었다. 석륵이라는 측근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큰 뇌물을 주어 사죄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관속들은 동진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자고 하면서 험난한 지형의 이점을 잘 활용하면서 서쪽으로 서역인을 동원하고 북으로 흉노를 끌어 들이면서 남쪽으로 동진의 지원군이 온다면 못 막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솔깃해진 장천석은 이렇게 외쳤다.

 

“ 짐의 계책은 이제 결정되었다.

  항복을 운운하는 자는 즉시 목을 벨 것이다.“

 

생모 엄씨가 울면서 말렸지만 장천석은 전진의 사신 염부와 양수를 활의 과녁으로 삼고 화살로 쏘아 죽였다. 구장의 13만 보병과 기병은 청석진(감숙성 난주 북쪽)에서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장천석이 마건에게 2만 군사로 최전선을 방어했지만 쉽게 뚫려 항복하고 말았다. 구장의 군대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전량의 자사들은 모두 항복해 버리고 만 것이다. 화가 난 장천석이 정동장군 장거에게 3만 군사를 주어 홍지(난주 북쪽)를 방어하게하고 자신은 5만 군사로 금창성(홍지 북쪽)을 방어했다. 장천석 장군들은 승리 가망이 없다고 보고 서둘러 항복하자고 졸랐다. 전쟁이 될 리가 없었다. 요장의 3천 갑사들이 선봉에 서서 번개처럼 장천석 진영을 찢고 들어왔다. 전량의 군사들은 모두 혼비백산 도망치고 없었다. 장거는 패전하여 전사했다. 장천석은 수천의 패잔기병을 이끌고 서둘러 수도 무위로 돌아갔고 전진의 추격대는 순식간에 쫓아왔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 선 장천석은 8월 27일 흰 수레에 면박여친(손을 등 뒤로 묶은 채 관을 수레에 싣고 나옴. 군주의 전형적 항복표시)하고 군영의 문에서 항복했다. 구장은 면박을 풀어주고 관을 불 태웠으며 장천석을 장안으로 압송했다. 전량의 모든 군현이 항복했다.(ADD376년8월27일) 부견은 장천석을 죽이지 않고 북부상서 귀의후라는 작위를 내렸다. 그리고 장천석의 관리들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배치했다. 팽화정은 황문시랑이 되었고 소음과 장열은 상서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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