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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F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1월09일 17시1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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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8) 충신 대리시 소경 조작(AD597)

 

당시는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강이 몹시 무너졌다. 양견은 당연히 엄중한 법으로 범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법이 엄격했냐 하면 동전 하나를 훔치거나 오이 세 개를 도둑질하면 기시(시체를 시장에 버리는 형벌)되었다.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이렇게 가혹한 법이 어디에 있냐고 상소를 올린 뒤에야 양견은 이 법을 정지시켰다.      

관청에서는 상사와 부하 사이에 분쟁이 매우 잦아서 명이 서지 않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다.

양견은 기강확립의 차원에서 부하들은 상사에게 대들거나 헐뜯는 것을 엄벌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되자 양견의 특별지시를 믿고 부하들을 심하고 거칠게 다루는 것이야말로 기강확립이고 법질서 회복이라는 분위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양견이 어떤 일로 화가 나 사람을 매로 죽이려고 했다. 대리시(형집행기관) 소경 조작이 나서서 말리면서 굳은 간언을 올렸다.

 

“ 늦여름에 속한 달은 온 만물이 성장하고 영그는 계절입니다.

  이때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양견이 대답했다.

 

“ 늦여름은 비록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계절이기는 하지만

  번개나 천둥도 치는 계절 아니냐.

  위가 하늘을 본받아서 시행하면 안 될 일이 무엇이냐.“

 

사형을 집행하고야 말았다. 대리시의 장고라는 직책을 가진 내광은 양견의 이런 태도를 보고 아부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평소 눈엣가시 같은 조작이라는 상사를 모함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양견에게 요즘 대리시 직원들은 너무 부하들에게 관대하여 기강이 해이해 졌으며 특히 대리시 소경 조작은 함부로 죄수를 방면한다고 비판했다. 양견은 그 사실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조작의 조치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화가 난 양견은 내광의 목을 베어버리도록 지시했다. 조작이 또 나서서 죽이면 안 된다고 말리자 양견은 옷을 털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작이 문 앞에서 양견에게 말했다.    

 

“ 신이 내광을 가지고 다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다른 일이 있어서 보고 드리려 합니다.“

 

양견이 들어오라고 하고서 무슨 일이냐 묻자 조작이 대답했다.

 

“ 신에게는 죽을죄가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대리소경이 되어서 장고 내광을 통제하지 못한 죄,

  둘은, 사형 죄가 아닌 죄수(즉 내광)를 죽기를 각오하고 옹호하지 못한 죄,  

  셋은, 다른 일도 없으면서 있다고 거짓말하고 들어 온 죄입니다.“

 

양견은 조작의 강직함에 굳었던 안색을 풀며 알겠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독고황후가 두 개의 금 술잔에 술을 따르라고 하고 그 술잔을 하사했다. 장고 내광은 사형을 면하고 광주로 귀양 갔다.(AD597)  

 

소마가의 아들 소세략이 강남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관례에 따르면 당연히 아버지 소마가가 연루되어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소마가를 문책하지 않았다. 소세략이 어린(20세) 아이에 불과한데다 조정 대신이 소마가가 그렇게 시켰을 리 만무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조작이 불가한 조치라고 굳게 간하면서 버티었다. 양견은 조작에게 퇴청하라고 명령했다. 조작은 꿈쩍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 신이 상주한 옥사가 아직 결정이 되지 않았으니 

  물러날 수가 없겠습니다.“

 

양견이 황제를 들먹이며 명령했다.

 

“ 대리는 짐을 위해 소마가를 사면하라.”

 

양견은 시종들에게 조작을 들어서 내 보내게 하면서 소마가를 풀어 주었다. 

 

형부시랑 신단은 붉은 색 잠뱅이(緋褌, 짧은 속옷)를 늘 입고 다녔다. 그것을 입으면 관운이 좋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견은 비곤에 남을 무고하는 뜻이 숨어있다는 말을 들었다. 신단을 잡아들여서 죽일 참이었다. 조작이 반대하며 대 들었다.

 

“ 법으로 사형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신은 황제의 조칙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양견이 말했다.

 

“ 경은 신단은 아끼면서 

  자신을 아끼지는 않는구나.“

 

조작마저 끌어내 죽이라고 명령했다. 조작이 이렇게 항변했다.

   

“ 폐하께서는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신단은 절대 죽이면 안 됩니다.“

 

조작이 끌려 나가 참수하려는 찰나 양견이 사람을 보내 다시 조작에게 물었다.

 

“ 이제 생각이 바뀌었느냐?”

 

조작의 대답이 이렇다.

 

“ 한 마음으로 법을 지켰으므로 

  감히 죽음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執法一心 不敢惜死)“

 

양견은 조작의 죽음 앞에서의 의연함에 감탄했다. 다음날 조작에게 깊이 사과하고 위로했으며 비단 300필을 하사하였다.(AD597)

 

어떤 사람이 가짜 동전을 가지고 진짜로 바꾸려다가 잡혀 죽게 되었다. 조작은 장형에 처할 뿐인 죄를 가지고 죽이는 것은 법에 맞지 않다고 강변했다. 양견은 조작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간여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조작이 대어 들었다.

 

“ 폐하께서 저를 법집행기관에 두셨는데

  망령되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어찌 신의 직책과 무관하다고 하십니까?“  

 

양견이 말했다.

 

“ 큰 나무(황제를 의미)를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으면

  당연히 그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조작이 답했다.

“ 신은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어찌 나무를 운운하십니까?“

양견이 말했다. 

 

“ 국을 마시는 사람이 뜨거우면 당연히 그릇을 놓게 마련 아닌가.

  그대는 어찌 천자의 위엄을 흔들려고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작은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가 꾸짖자 더 가까이 곁으로 다가갔다. 어이가 없는 황제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치서시어사 유욱이 나서서 조작의 옳음을 깊이 설득하고 나서야 양견은 생각을 고쳐 사면을 내렸다. 

 

양견은 조작이야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안으로 끌어들여 잘잘못을 예기하게 하였으며 훌륭한 말을 할 때에는 꼭 하사금을 내렸다. 내린 하사금이 만전을 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양견은 시기심이 많고 화를 잘 내었고 성격이 매우 변덕스럽고 가혹하여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이런 결점을 그런대로 잘 보완한 것은 조작 같은 훌륭한 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료들이 사소한 과오로 양견에게 목이 날아갔다.  

 

 

(29) 양견의 제1차 고구려 정벌 실패(AD598)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이 수에게 멸망당하자 고구려 제25대 평원왕(고탕,재위AD559-AD590)은 긴장이 되었다. 수나라의 다음 목표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AD300년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된 이후 지난 한 200년 동안 고구려는 비교적 독립되고 안정된 국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이 통일되고 나서는 종전과 같은 소극적인 조공 태도로는 수나라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았다. 국경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평원왕은 군사를 정비하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면서 곡식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양견은 이런 고구려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평원왕에게 충성과 절개를 다 하지 않는다는 견책의 새서(칙서)를 보냈다. 그러면서 요하가 넓으면 장강보다 넓겠으며 고구려가 땅이나 넓고 많으면 강남 진나라 만하겠냐고 겁박했다. 겁에 질린 평원왕은 긴 편지를 써서 사죄하려했으나 곧 죽었다. 그 아들 영양왕(고원)은 양견에게 편지를 써 은혜에 감사하고 왕위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양견도 흔쾌히 승인했다.(AD598년 겨울)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족 1만 여 명과 함께 요서지역을 경략했다. 양견이 크게 화가 났다.AD598년 추운 2월 양견은 막내아들 한왕 양량과 왕세적을 행군원수로 삼아 30만 육군수군으로 고구려를 내침하게 했다. 고경은 양량의 행군장사(제2인자)로 삼았고 주라후를 수군총관에 임명했다. 그 해 6월 수나라 고구려 정벌군은 임유관(하북 무녕, 진황도 남서쪽)을 나갔는데 우기라 물이 불어나고 도로가 진창이 되어 식량공급이 매우 어려워졌으며 더위로 인해 역질까지 돌았다. 평양성을 향하던 주라후의 주력함대 수군도 바람을 만나 표류하거나 침몰되고 말았다. 양견은 9월 철군을 명령하였다. 죽은 사람이 열에 아홉이라고 기록되었다. 영양왕은 양견에게 자신을 낮추고 사죄의 편지를 썼다. 백제왕 부여창이 사신을 보내 수나라 군대의 향도가 되겠다고 자청했으나 이미 고구려가 반성했으므로 출병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고구려는 매우 화가 나서 백제 영토를 끊임없이 침략했다.   

 

 

(30) 고경의 실각(AD599)

 

독고황후는 질투가 심한 편이었다. 양견의 후궁과 첩들은 독고황후가 무서워 얼씬하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양견의 후궁은 딱 두 명 밖에 기록되어있지 않다. 양광 후궁은 열 명이 넘는다. 반란으로 죽은 울지형의 손녀가 궁궐에 잡혀 와 있었는데 그 미모가 아름다워서 양견의 눈에 띄게 되자 독고황후가 사람을 시켜 죽여 버릴 정도였다. 양견이 너무 화가 나서 궁을 뛰쳐나가자 고경과 양소가 따라 나가 말리며 말했다.

 

“ 한 아녀자의 투기 때문에 사직을 가벼이 하실 참이십니까?”

 

한참 만에 돌아왔고 독고황후도 사죄했지만 고경의 그 말 한 마디는 고경의 일생을 뒤집어엎는 말이 되고 말았다. 자신을 ‘한 아녀자’로 폄하한 것을 독고황후가 알고 분개한 것이다. 고경의 아버지 고빈은 옛날 자신의 아버지 독고신의 가신이었으므로 서로 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런 그가 독고황후의 형편을 무시하고 ‘일개 여인의 투기’로 낮춘 것이 분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황태자 양용은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아 독고황후는 폐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독고황후는 고경에게 양용의 폐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뜻을 물어 보았다. 고경은 장유유서의 질서를 길이 존중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독고황후는 고경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독고황후는 고경을 옭아맬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 첫 번 째가 동궁의 군사를 줄여 황제의 군사로 보충하자는 생각이었다. 당시 황태자 양용의 딸은 고경의 며느리였으므로 고경이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황제는 분명히 찬성할 것이었다. 동궁군사 축소문제는 고경과 황제를 갈라놓는데 가장 좋은 계책이었다. 과연 고경은 “동궁의 호위력이 약해질 것이므로 반대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황제는 발끈했다.

 

“ 나야말로 자주 드나드니 강한 군대가 필요하오.

  태자는 동궁에서 덕과 학문만 열중하면 될 것을

  어찌 건장한 무사들이 필요하단 말이요.“

 

두 번째 계략은 고경의 재가 문제였다. 독고황후는 고경의 부인이 오래 전에 죽어서 이미 애첩을 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독고황후는 양견에게 고경의 재가를 재촉했다.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독고황후가 재가를 독촉한다고 양견이 고경에게 말하자 고경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 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장차 조정에서 물러나면 서재에서 불경을 읽을 뿐

  신이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 고경이 애첩을 통해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 겸손을 떠는 모습이 가증스럽다고 느낀 독고황후가 양견에게 이렇게 쏘아붙였다.

 

“ 폐하는 아직도 고경의 말을 믿으십니까?

  애첩을 끼고 있으면서도 서재, 불경 운운 하는 것은   

  페하를 마주하고서 기망한 것입니다.“ 

 

양견도 그러고 보니 가증스럽긴 했다. 이때부터 양견은 고경을 소원하게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세 번째 계략은 요동(고구려)정벌 건이었다. 고경은 줄기차게 요동정벌을 반대했었다. 결국 요동 정벌이 실패하자 독고황후는 그것을 고경의 탓으로 돌리며 말했다.

 

“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으니

  억지로 출병한 그 사람이 공을 세우지 못 할 것은 처음부터 분명했습니다.“

 

사실 고경을 양량의 행군장사로 보낸 것은 양량이 어렸으므로(당시 23세) 그를 잘 보필하라는 뜻이었다. 고경은 양량의 말을 대부분 듣지 않았으므로 앙심을 품은 양량은 돌아와서 양견과 어머니 독고황후에게 고경 때문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모함했다. 그 말을 듣고 양견은 더욱 고경을 멀리하게 된다.  

 

돌궐이 자주 내침하므로 AD599년 다시 양량을 원수로 삼아 고경은 삭주도, 양소는 영주도, 연영은 유주도로 나누어 북벌을 단행했는데 이 대 군영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고경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그 근거는 좀 전에 모함을 받아 역모혐의로 죽은 왕세적(양주, 지금의 감숙성 총관)의 사람들이 고경과 내통한다는 것이었다. 하약필, 우문필, 설주, 고률효경, 유술 등 당시 거의 모든 대신과 막료들이 고경의 무죄를 상주했지만 양견은 듣지 않고 수사시켰다. 결국 고경은 유지로 판결이 나고 상주국 좌복야에서 파면되어 집으로 돌아갔다.(AD599년 8월10일)

 

아들 양준의 연회가 있었을 때 양견은 고경을 불렀다. 양견과 독고황후가 모두 옛 감회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 양견이 말했다.

 

“ 내가 공을 버린 것이 아니고 

  공이 스스로 등진 것을 잊지 마시오.

  주군에게 신하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자신이 스스로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요.“  

  

이 때 까지만 해도 나쁘지는 않았다. 고경의 아들이 고경을 위로하며 한 말이 문제가 되었다.

 

“ 사마중달(사마의)은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전국을 통일하여 서진의 고조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이런 상황에 처하신 것은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사마의와 서진을 빗대어 말한 것이 반역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가 있었다.양견은 즉시 고경을 내사성에 가두고 국문했다. 마침 스님들이 조만간 큰 국상이있을 조짐이 보인다고 보고했다. 유사는 서둘러 고경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양견은 차마 고경을 죽일 수 없었다. 지난 해 우경칙을 반란혐의로 억울하게 죽였고 또 왕세적도 죽였다. 다시 고경마저 죽인다면 무엇이라고 나무라겠는가? 결국 폐서인하는 것으로 그쳤다. 고경의 어머니가 고경이 좌복야 되었을 때 이렇게 경계했었다.

 

“ 너의 부귀는 이미 극에 달하였으므로 

  언제 머리를 단 한 번 찍히는 일(즉, 참수)이 있을지 모른다.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을 떠올린 고경은 죽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폐서인이 되었음에도 원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다.(AD599) 8년 뒤(AD607) 양광에게 억울하게 죽을 때까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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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11월09일 17시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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