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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D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0월26일 17시1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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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7) 수나라 태평성세(開皇之治)와 고경과 소위(AD581)

 

소위는 전에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 먼저 돌아가신 신의 아버님이 늘 

  ‘오직 효경 한 권만 읽으면 몸을 세우고 나라를 닦는데 충분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황제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위의 절친 고경은 높은 권세를 피할 생각으로 자진하여 은퇴하고 그 자리를 소위에게 물려주기를 바랐다. 황제는 고경의 아름다운 생각을 지켜줄 생각으로 좌복야직을 해직시켰다. 그런 다음에 며칠 뒤 이렇게 고경에게 말했다.

 

“ 이 나라가 이렇게 잘 다스려지는 것은 소위의 공이 크고

  소위를 나에게 추천한 것은 경이니, 경의 공 또한 작지 않소.   

  현명한 인재를 추천한 사람은 상을 받는다 했거늘 

  어찌 경을 은퇴시킬 수가 있겠소.“

 

바로 좌복야 직에 복직시켰다. 고경과 소위는 한 마음으로 양견을 도왔고 크고 작은 정사와 형벌을 모두 황제와 함께 상의하며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자치통감의 사마광은 수나라 건국 초기에 천하가 태평한 것(개황의 치,AD581-AD600)은 고경과 소위의 덕분으로 평가하였다.    

 

(18) 유방 5인방의 고경 소위 축출음모와 공신축출(AD581)

 

고경과 소위가 양견의 신임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래된 좌명공신 노분과 유방 등은 소외감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고경이나 소위는 비교적 최근에 부상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은 오래전부터 양견의 측근으로써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임에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만이 가득 찬 것이다. 당시 태자(양용) 좌서자였던 노분은 원해, 이순 그리고 장빈을 꼬드겨 양견의 아들 양광에게 접근했다. 

 

“ 참으로 여러 번 전하를 뵙고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폐하께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원하옵기는 제 말 못하는 속내를 잘 잘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고경과 소위를 제거해야 양광도 앞날이 더 잘된다는 뜻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결국 고경소위제거 음모는 밀고로 들키게 되었다. 유방은 주모가자 노분과 장빈이라고 발뺌했다. 양견은 관련자 모두 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살려줬다. 자신에게 황제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도와준 사람들이었으므로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유방과 함께 정역 또한 양견에게는 소중한 공신이었다. 그러나 유방과 같이 새 나라를 함께 다스리기에는 역량과 비전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양견은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정역이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역은 무당을 집으로 불러 굿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잃어버린 복을 되찾고 싶었다. 정역의 하녀가 그 사실을 몰래 고발하였다. 반역을 꾀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 같다고 무고한 것이다. 아마도 집에서 푸대접을 받아 앙심을 품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모친을 직접 모시지 않는다는 세간의 비판이 쏟아지던 정역이었다. 양견은 그에게 조서를 내려서 명했다.

 

“ 정역이 살아남는다면 도리에 어긋난 불효와 반역의 신하가 되는 것이고

  그를 죽여 지하에 들어가도 불효막심한 귀신이 되어

  밝은 세상과 어두운 지하에 모두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효경을 내리니 이를 숙독하여 반성하는 마음으로 깨우치도록 하라.“

 

그러나 두 달 뒤 정역의 관직은 회복된다. 

 

 

(19) 화를 잘 낸 양견의 사과(AD581)

 

양견이 낭관에게 화가 나 궁전에서 직접 채찍을 때렸다. 간의대부 유행본이 말씀을 올렸다.

 

“ 이 사람은 평소 청렴하고 또 그 허물이 크지 않으니

  조금 너그럽게 보셔서 용서해 주십시오.“

 

양견은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채찍을 가했다, 유행본이 황제 앞으로 다가가 정면으로 맞서 말했다.

 

“ 폐하께서는 신을 불초하지 않다고 여겨 곁에 두시고 간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신의 간청이 옳다면 들으셔야 하고,

  만약 옳지 않다면 신을 내치고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어찌 가벼운 신하를 옆에 두시고서 제 말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

 

유행본은 들고 있던 홀을 대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물러났다. 황제가 깜짝 놀라 옷매무새를 고치고(斂容) 유행본을 불러 진지하게 사과하고 낭관을 용서했다.

 

 

(20) 정치에 간여하지 않은 독고가라

 

독고신의 장녀로 양견의 황비가 된 명경황후 독고가라는 대대로 훌륭한 선비족 가문에서 나기도 하였지만 겸손하고 학문을 사랑하였으며 침착하고 공손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말하는 것과 판단이 항상 옳으므로 양견도 부인의 뜻을 경청하고 존중하여 때로는 두려운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양견과 독고황후를 가리켜 ‘두 성인‘이라고 불렀다.  

 

유사가 <주례>에 입각하여 모든 관료의 처는 황후가 임명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독고황후가 단번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 부인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조금씩 스며들게 되는 것이므로

  아예 근원을 잘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대도독 최장인이 참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독고황후의 외사촌 형제였음으로 양견이 감형해 줄 생각이 있었다. 독고황후가 나서서 반대했다.

  

“ 국가의 일인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돌아보십니까?”

 

황후는 검소하고 절약했다. 황제의 약이나 옷감도 절대 과도하게 준비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므로 때때로 황궁 안에서 상비약이나 물자가 부족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양견은 북주의 외척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고 또 황후의 도움과 지지를 받았으므로 황후의 친인척들에게 높은 권한이나 직책을 주지 않았을 수 있었다.   

 

 

(21) 수나라의 훌륭한 지방관 양언광(AD581)

 

양견이 기주(岐州, 섬서 봉상. 장안 서쪽 140KM)에 행차했다. 기주자사 양언광이 매우 훌륭한 정치를 해서 민심을 크게 얻고 있었다. 양견은 양언광에게 많은 상을 내려 높이 칭찬하고 격려했다. 원래 기주의 풍속이 조용하고 질박하고 보수적이어서 양언광은 기풍에 맞게 침착하게 행정을 벌였으므로 항상 전국에서 최고의 고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한참 뒤 양견은 업적이 뛰어난 양언광을 문제가 많은 상주(相州,하북 업)자사로 옮기게 하였다. 업은 원래 북제 수도였으나 나라가 망한 뒤 관료들이나 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오로지 장사치들과 공인 혹은 악공들만이 살고 있어서 분위기가 경박하고 간사하고 싸움과 소송이 그치지를 않았다. 양견은 국내에서 통치하기 가장 골치 아픈 상주로 양언광을 보낸 것이다.

 

양언광은 부임하자마자 기주에서 하던 대로 조용하고 과묵한 행정을 펼쳤다. 있어도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명령을 내려도 내렸는지 모를 정도로 차분히 행정을 해 나갔다. 상주 사람들은 말도 과묵하고 나서기를 꺼려하는 양언광을 비웃고 깔보기 시작했다. 못나고 무능한 사람이 틀림없다고 낄낄거리면서 ‘착모당(着帽餳, 모자를 덮어 쓴 물 엿 이라는 뜻)’이라고 불러댔다. 그런 소문을 듣자 양견은 즉시 양언광을 조주(趙州, 하북 융요. 형태 서북)자사로 옮겨 버렸다. 양언광은 양견에게 다시 상주로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양견이 승낙했다. 상주로 되돌아온 양언광은 행정 스타일을 확 바꾸었다. 행정명령을 크게 밝히면서 간사한 무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숙청하기 시작했다. 상주 토호들과 권세가들이 처음에는 양언광을 무시하고 경멸했으나 강력하고 신속한 행정을 펼치면서 경박하고 간사한 상주 분위기를 확 다잡아가자 주민들의 칭송이 점차 높아졌다. 야언광은 학교를 설치하여 명유를 초치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시험문제를 직접 출제하면서까지 지방공무원 채용을 독려했다. 인재를 추천하게 하여 등용하고 주민들에게 예절과 유학을 가르쳐나가자 상주는 전국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행정이 이루어지는 주가 되어 건국초기 수나라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22) 북주의 복수를 노리는 천금공주(AD581)

 

천금공주는 우문초의 딸로 우문태의 손녀다. 돌궐이 끈질기게 혼인을 요청하므로 할 수없이 돌궐의 타발가한에게 혼인을 약속했고(AD579) 다음해에 돌궐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타발가한이 병으로 죽자 돌궐은 타발가한의 아들 아사나암라와 조카 아사나대라편 사이에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종친 어른 아사나섭도가 지지한 아사나암라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사라대라가 순순히 따르지 않고 반발하자 아사나암라는 결국 아사나섭도에게 양위를 하고 말았다. 이 사람이 사발략가한(돌궐 5대 가한)이다. 천금공주는 수나라가 들어서며 한 편으로는 북주를 멸망시켰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돌궐을 홀대하는 것에 분개한 나머지 사발략가한에게 수나라를 공격하자고 졸랐다. 사발략가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고보령이라는 옛 북주 장군과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략했다. 

 

천금공주가 돌궐로 들어 올 당시 북주 장손성이라는 장수가 공주를 호송해 들어 와서는 돌궐인들에게 활 쏘는 법과 병법을 가르치면서 눌러앉았다. 이 때 사발략가한의 친동생이면서 백성의 신망이 높아 형 사발략가한에게 경계를 당하던 아사나처라후(=돌리설)과 서로 친하게 되었다. 사발략이 수나라 정벌에 나서자 장손성은 몰래 수나라에 편지를 보내어 이쪽 사정을 알려주면서 원교근공책을 쓸 것을 권고하였다. 

 

 

(23) 아사나섭라(사발략가한)의 수나라 남침과 반격(AD582)

 

양견은 직접 장손성을 불러서 여러 가지를 물었다. 양견은 장손성이 그곳 돌궐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하게 꿰뚫고 있음에 놀랐다. 장손성을 거기장군에 책봉하고 그의 권고대로 먼 곳과는 사신을 보내 통교를 강화하고 안으로는 뇌물을 써서 돌궐 조정의 내분을 조장하는 전법을 쓰게 하였다. AD582년 5월 돌궐의 40만 대군이 삭주지역 장성을 넘어 쳐들어왔고 고보녕도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하북성 노룡부근에서 남침했다. 장안에서도 흉흉한 일이 많이 발생하고 또 고경 소위 유계재 등 대신들의 요구가 끈질기자 양견은 돌궐의 공격을 피하려고 수도를 장안 남서쪽 용수산(대흥성)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전방위적으로 남하하던 돌궐의 사발략 주력군대는 함양(장안)부근까지 들어왔다. 여기 저기서 일진일퇴하며 각축하던 돌궐군사들은 배후에서 철륵이 공격한다는 거짓정보를 흘린 장손성의 계략에 빠져 서둘러 퇴각하고 말았다. 돌궐과 수나라의 싸움은 다음해(AD583)에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수나라가 먼저 북진했다. 위왕 양상이 행군원수를 맡고 이충이 중군, 음수가 동군, 두영정이 서군을 맡아 각각 길을 나누어 북진해 나갔다. 전쟁은 지금은 내몽고 지역 전역에서 벌어졌다. 장손성의 반간 계략도 효과가 있었지만 돌궐 조정 내부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은데다가 달두가한이 지배하는 서돌궐이 돌궐에 대해 공격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돌궐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AD584년 사발략가한은 수나라에 화친을 요청하고 양견도 사신 서평화를 보내 화답했다. 천금공주는 양견의 수양 딸로 삼아 우문씨가 아닌 양씨로 바꾸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돌궐이 응답하자 양견은 그를 천금공주에서 대의공주로 바꾸어 책봉했다. 북주의 천금공주는 수나라 대의공주가 된 것이다.

 

 

(24) 양견의 질투와 양사언의 반란(AD586)

 

양사언과 우문흔은 울지형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위(11)참조) 비록 전쟁 초기에 그들이 우물거리고 진군하지 않아 교체를 생각하긴 했지만 이덕림의 말을 좇아 고경을 보내어 큰 승리를 거두어 수나라 건국에 이바지 한 사람이다. 그러나 양사언이 울지형 대신 맡은 상주에서 훌륭한 정치를 하여 민심을 얻게 되자 양견은 이를 질투하여 장안으로 소환해 버렸다.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던 공신 우문흔 또한 군대 내에서 평판이 좋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것을 시기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로써 건국 초기부터 양견을 도왔던 서공 유방, 기공 우문흔, 성공 양사언은 모두 한가한 백수가 되고 말았다. 원망이 없을 수 없었다. 서로 오가며 양견을 몰아 낼 생각을 품은 것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문흔은 포주에 있는 양사언이 군사를 일으키면 자신은 안에서 호응하겠다고 계획을 짰다. 그런데 양사언의 생질 배통이 이를 양견에게 밀고해 버렸다. 양견은 적발한 것을 숨기고 양사언에게 진주자사 직을 제수하였다. 비밀이 새어 나간 것을 모르는 양사언은 사람을 유방에게 보내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기쁜 소식을 전했다. 양사언은 양견에게 설마아를 진주자사로 삼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양견이 그렇게 허락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하는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 알현하도록 했다. 

 

양사언 등이 부임 인사차 조정에 들어왔을 때 양견은 양사언, 우문흔, 유방을 모두 잡아들이고 문초했다. 처음에는 모두 잡아떼었으나 설마아가 모든 것을 불고 말았다. 당연히 모두 주살되었다.(AD586년 윤8월23일) 양사언 나이는 72세, 우문흔은 64세였다. 유방은 나이가 분명하지 않으나 60세 정도를 넘어섰음에는 틀림없다. 양견은 45세 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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