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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B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0월13일 11시5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7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8) 무능한 황태자 우문빈의 교체논의(AD576)

 

북주 황태자 우문빈은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토욕혼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섰으나 토벌 도중 내내 측근 정역, 왕단등과 어울리면서 군중에서 덕망을 잃거나 군율을 어기는 행동을 자주 저질렀다. 같이 갔던 왕궤가 태자의 군중 잘못을 낱낱이 황제에게 보고했다. 우문옹은 화가 나서 우문빈과 정역을 매질하고 태자가 총애하는 측근들에게 견책을 내렸다. 그러나 우문빈은 개전의 정을 보이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가까이 정역을 끌어 들였다. 정역은 우문빈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전하께서는 언제가 되어야 천하를 점거하실 수가 있습니까?”

 

황제 우문옹은 아들을 가혹하게 훈련시켰다. 과거의 예를 들면서 언제라도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면 폐위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일일이 태자의 언행을 보고하도록 시켰다. 태자측신료들도 걱정하지 낳을 수가 없었다. 우문빈에게 거짓으로 공손한 언행을 보이도록 조심시켰다. 왕궤와 하약필은 그런 황태자의 음흉한 간계를 걱정한 나머지 황제에게 이렇게 말하기로 작정했다.

 

“ 황태자는 반드시 그릇이 안 되는 것 같으니

  무거운 짐을 질수가 없겠습니다.“

    

마침 황제를 만나는 계기가 있자 왕궤가 이렇게도 말했다.

 

“ 황태자가 어질고 효성과 덕이 높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분명히 나랏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약필 장군 또한 같은 생각일 줄 압니다.“

황제가 하약필을 따로 불러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하약필은 이렇게 대답했다.

 

“ 황태자는 춘궁(=동궁)에 살고 있는데

  허물이 있다는 예기를 아직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약필이 물러나자 왕궤가 하약필을 나무랐다.

 

“ 아니 어찌 그럴 수가 있소.

  평생에 나와 약속하고는 어긴 적이 없는데

  오늘 대답한 것이 어찌 앞뒤가 다른 것이요?“

하약필은 이렇게 대꾸했다.

 

“ 이것은 공의 잘못이오. 황태자는 나라의 기둥인데

  어찌 쉽게 말(황태자 폐위)을 꺼내겠소.

  자칫 잘못하면 일족이 멸망하는 일이요.

  나는 공이 은밀하게 황제를 설득할 줄 알았지 

  그렇게 드러내놓고 말할 줄은 몰랐소.“

    

한참동안 말이 없던 왕궤가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오로지 국가만을 생각하였지

  사사로운 것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소.

  지난 번 우리가 말한 것이 실로 잘못된 만남이었소.“

 

그 후 주연에서 왕궤는 황제의 수염을 뽑으며 이렇게 말했다.

 

“ 사랑스럽고 귀여운 늙은이(=황제)이지만

  후사가 약하여 걱정이 많습니다.“

 

주연이 끝나자 황제는 우문효백을 가까이 불렀다. 예전부터 황태자는 잘하고 있으며 부족함이 없다고 강조해 왔던 사람이 우문효백이었다. 황제가 우문효백에게 이렇게 다그쳤다.

 

“ 공은 항상 내게 태자가 잘못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왕궤의 말을 들어보니 공이 거짓말 한 것이요.“

 

우문효백이 꿇어 앉아 절하며 말했다.

 

“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차마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신은 폐하께서 절대로 자애로움을 끊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그렇게 말한 것일 뿐입니다.“

 

황제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 짐이 그것(황태자 교육)을 공에게 맡겼으니

  최선을 다해 가르치도록 노력하시오.“

 

왕궤가 나서며 말했다.

 

“ 황태자는 사직의 주군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그의 장인 양견을 보면 배반의 기미가 얼굴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황제가 불쾌하게 말했다.

 

“ 천명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가 어떻게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양견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앞으로 더욱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황제는 왕궤의 말(황태자의 무능)을 마음깊이 믿었으나 우문옹의 다른 동생들이 우문옹 보다 더 못나거나 너무 어렸으므로 도저히 황태자를 바꿀 수가 없었다.  

 

 

(9) 북제의 멸망(AD577)과 우문옹 사망(AD578)

 

다음해(AD577) 우문옹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북제를 공격하여 북제를 멸망시켰다. 우문옹은 북제의 수도 업에 입성했다. 사마광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절제함과 검소함을 보인 우문옹을 크게 칭찬하였다. 자치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 우문옹은 성격이 검소하고 절제하여 

  평상시에 비단이 아닌 포로 만든 옷을 입었고 

  잘 때에도 면포로 된 침대에서 잤다.

  후궁의 숫자는 십 여인에 불과했고 

  군사들이 행군 할 때 마다 친히 행군에 동참했으며 

  산과 계곡을 건널 때에도 몸소 나섰으니

  군사들이 용기를 내지 않거나 불평할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사들을 항상 고맙게 은혜로 대했고

  과단성 있고 명철하게 결정을 내리고 법을 적용하는 것은 준엄했으니

  이것이 병사들이 위엄과 존경을 느껴 

  죽음을 낙으로 삼으며 전투에 임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다.“

 

북제를 토벌한 우문옹은 다음해 AD578년 5월 23일 돌궐 정벌에 나섰다. 다섯 길로 나누어 북진하던 우문옹은 장안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급히 장안에 있던 우문효백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아무래도 못 고칠 것 같으니

  훗날을 부탁하오.“

 

우문옹은 서들러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AD578년 6월 1일 죽었다. 36세의 나이였다. 다음날 20세 황태자 우문빈이 황제가 되었다. 북주의 선제다. 우문빈은 전혀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기쁜 내색을 보이며 즐거워하였다.

 

 

(10) 혼군 우문빈의 충신 몰살(AD579)

 

아버지 상례가 끝나자 우문빈은 바로 상복을 벗어던졌으며 우문효백에게 작은 삼촌 우문헌을 죽이라고 꼬드겼다. 우문효백은 이렇게 대답했다.

 

“ 저로써는 불충한 일을 하는 것이고,

  황제에게는 불효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정역과 우지를 시켜 우문헌을 모함으로 탄핵하게 한 뒤 황제가 조용히 불러 그의 목을 졸라 죽게 하였다. 이 때 우문헌의 나이는 35세 였다. 우문헌의 측근들이 모두 이때 희생되었다. 왕궤도 당연히 죽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울지운, 우문효백, 우문신거 등 현군 우문옹의 충신들이 모두 우문빈에게 죽어 나갔다. 불과 일 년 전 북제를 멸망시키며 사실상 북중국을 통일하다시피 한 북주가 순식간에 내부적으로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반면에 수도 없는 사면을 단행하여 범죄자를 풀어주었다. 보다 못한 경조군승 악운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너무 사면이 흔하면 법질서가 서지 않게 된다는 경고를 올렸다. 용렬한 우문빈이 들을 리가 없었다. 악운은 관을 옆에 끼고 조당에 올라 황제의 여덟 가지 죄목을 큰 소리로 진술했다. 

 

“ 황제께서는,

  첫째로, 매사 단독으로 결정하시고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셨으며,

  둘째로, 미녀들을 색출하여 궁궐을 채웠으며,

  셋째로, 후궁에 드신 뒤 며칠을 나오지 않으시어 국사를 환관이 전단하게 하셨으며,

  넷째로, 형벌을 느슨하게 한 뒤 반년도 안 되어 다시 엄격하게 고쳤으며, 

  다섯째로, 선제께서는 검소하고 소박하셨으나 황제께서는 사치하시기가 극도로 심하시며,

  여섯째로, 요역을 과중하게 내리시고 배우와 씨름꾼을 곁에 두시며,

  일곱째로, 편지를 잘 못 썼다고 즉시 죄를 다스리시니 편지 올리는 일이 막혔으며,

  여덟째로, 하늘이 경계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여 덕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덟 가지를 고치시지 않으면 

  북주 사당에 희생을 올려 제사 드리는 일이 끊길 것이 신은 두렵습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내고 악운을 죽이려하였으나 아무도 나서서 두둔하고 옹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사중대부가 마침내 나서서 말했다.

 

“ 장홍(후한 말 헌제 때 바른 말로 처형됨)같은 훌륭한 사람과 

  같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텐데 하물며 비간인 경우에야.

  만약 악운이 죽는 다면 나도 즐겁게 같이 따라 죽을 것이다.“

 

마침내 궁궐에 올라가 악운은 명예를 구하려 한 것도 아니고 죽음조차 버릴 각오였으니 황제는 그를 위로하고 큰 도량을 보여야 마땅하다고 주청했다. 황제는 그제야 잘못을 깨닫고 악운을 불러 말했다.

 

“ 짐이 어젯밤 경의 말을 듣고 지금 생각해보니

  진실로 충성스러운 말이었소.“

 

악운이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11) 황위를 양도하고 천원황제가 된 우문빈(AD579)

 

AD579년 2월 우문빈은 황태자 우문천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천원황제가 되었다. 황제 자리만으로는 못 마땅하여 더 높은 자리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면류관 줄을 12개에서 24개로 만들었고 극도의 사치를 부렸다. 황족들에게 나라를 떼어 나누어 주면서 다섯 개 번국왕으로 봉했다. 불안하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한 상황을 곁에서 본 양견이 측근인 우문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 덕도 없고 외모 또한 오래 살 것 같지도 않은 우문빈이

  황실을 저렇게 쪼개어 나누면

  뿌리도 얕아지고 근본도 허물어지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이미 깃털(나라의 봉토)이 잘렸으니

  어찌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겠소. “   

 

이 때 양견은 딸이 천원황태후가 되었으므로 격에 맞게 대전의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어 부임했고 황제 우문천의 첩의 아버지 사마소난은 대후승이 되어 조정의 두 축을 감당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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