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도의 날’과 1997년 환란(換亂)의 진실 (8.끝) > News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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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환란’의 복기(復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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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1월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일시적 외화 유동성 부족 현상이 중순 이후 외환위기로 환란으로 전환되고 급기야 국가 부도 위기로까지 발달하여 한반도를 강타한 환란의 진행 과정을 돌이켜 보면 흡사 태풍이나 산불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태평양 상공에서 발달한 태풍의 눈이 처음 생겨날 때는 소형이었으나 차츰 대형으로, 초대형으로 세력을 키워 한반도를 강타하며 관통하는 태풍의 진행 과정이 환란과 닮아서다. 자연적으로 또는 실화(失火)로 생겨난 자그마한 불씨가 초기 진화 실패로 들불로 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온 산을 집어삼키며 태우는 대형 산불로 번지는 모습도 환란과 매우 흡사하다. 

 

   1997년 환란의 역사적 전개는 대체로 외화 유동성 부족이 발생하는 국내외 정치경제, 사회환경이 조성되는 환란 전조(前兆)기(1997.1.23.-10.22), 홍콩사태 이후 유동성 부족 심화로 외환위기가 발생하여(起) 환란으로(承), 국가 부도로까지 발전했다가(轉) IMF와 미국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국가 부도와 환란의 위기에서 벗어나는(結)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환란기(1997.10.23.-12.24), 그리고 마지막 IMF 협약이행을 위한 경제개혁과 구조조정, 차입금 상환의 고난의 환란 극복(克服)기(1997.12.25.-2001.8.23.) 3단계로 구성되어있다. 나는 이번 글에서는 전조기와 극복기에 대한 부분은 제외하고 환란기의 전개 과정 전체만을 객관적으로 복기해보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국가 부도의 날 (이하 ‘국부날’이라 부름)의 역사적 사실 왜곡과 무책임한 관객(국민)선동이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어 역사의 객관적 실체를 밝혀보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글을 시작하다 보니 준비가 덜 되어있었다. 극복기는 김대중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일들이 대부분이란 점에서 새롭게 자료수집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전조기 부분은 ‘왜 1997년 외화 유동성 부족 현상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외환위기로 발전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과 연계된 1997년 외환위기의 발생 원인과 성격을 규정하는 한국 경제의 구조, 제도, 정책 등과 관련된 되어있어 김영삼 정부 5년과 그 이전의 경제 정책과 외환·​금융정책 전반에 대한 심층 분석이 필요하다. 특히 1988년 IMF 8조국 졸업, 1989년 GATT BOP 졸업,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무역협상 타결과 1995년 WTO 체제 출범, 1996년 OECD 가입 등에 이르는 글로벌 개방화·세계화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경제개혁정책 전체와 연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많은 자료 검토를 위한 시간이 필요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가용 외화보유고의 증감 동향으로 본 1997년 환란의 기승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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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마지막 정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뜻밖에 김인호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의 전화를 받았다. 김 이사장은 그동안 연재된 7편의 글 모두 읽었다면서 그러나 두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내가 사용한 환란 초기의 가용 외화보유고 통계 숫자가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았으면 좋겠다는 지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역시 환란 초기의 ‘IMF 늦장대응론’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 이사장은 한국은행이 작성한 환란기의 ‘가용 외화보유고의 일별 통계자료 (1997.11.1.-1998.1.8.)’를 보내주었다. 부족한 글을 읽고 통계의 잘못 이용에 대한 지적과 함께 귀한 자료까지 보내주어 바로잡을 수 있게 해주신 김 이사장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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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이사장은 나의 글(기고문 4)에 “11월 7일 기준 285억 달러에서 3일 만에 130억 달러가 빠져나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 주었다. 김 이사장이 보내준 통계자료 에 따르면 11월 7일의 가용 외화보유고는 203.6억 달러이고 3일후(11.10)의 보유고는 195.4억 달러로 8.2억 달러가 감소한 것으로 이 부분은 통계이용에 착각이 있었던 같다. 대단히 잘못된 통계 숫자를 근거로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의 당시 행보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하고 명예를 훼손한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리고 특히 ‘IMF 늦장 대응론’과 관련 김 이사장은 “IMF 긴급자금요청문제가 처음 공식화된 시점인 11월 7일 이후 7일만인 11월 14일 정부 차원에서 IMF행을 결정하고, 10일 후인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와 협상이 이루어진 것을 두고 늦장 대응으로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라고 했다. 이 문제는 다음에서 다시 논의한다. 

 

  <위 표>는 1997년 환란기의 기승전결 4기에 따라 가용 외화보유고 일일 증감을 나누어 재정리한 것이다. 일일 통계를 기승전결에 따라 구분해서 재정리해 놓고 보니 가용 외화보유고가 기승전결에 따라 요동치는 모습이 그대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그동안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주요한 사건들 전후로 숫자들이 큰 폭으로 변동하는 것이었다. 그 숫자들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 당시 정부와 정책관계자들의 정책 결정과 집행, 정치인들의 발언 등과 이에 대응하는 시장에서의 국내외 기업과 은행, 종금사, 해외투자자들의 의사결정과 행동 등 심리적 상호작용의 총체적 결과를 반영하는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승전결에 따라 변하는 숫자들을 따라가면 언제 외환위기가 환란으로, 국가 부도 위기로까지 확대 심화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란기 기승전결의 전개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들을 가용 외화보유고의 증감과 대비 4개 기간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 10월 23-11.18) ▶1997년 10월 23일 홍콩 위기 발생 이후 달러 10월 말(223억 달러) 이후 가시화된 해외투자자들의 만기환수와 11월 5일 자(210억 달러) 블룸버그 보도, ▶11월 7일 청와대 대책회의 이후 11월 14일(174억 달러) IMF 자금요청 결정 ▶11월 16일(17일 170억 달러? 18일 158.6억 달러) 강경식 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 간의 비밀협상을 통한 IMF 구제금융요청 등 유동성 부족이 국가적 외환위기수준으로 부상 (▶10월 말-11.18일간 64.4억 달러 감소, 10월말-11.7 19.4억 달러, 11.7-18일간 45.0억 달러 감소) *전일 대비 10억 달러 이상 감소한 날: 11.12(12.3), 17일(10.4억 달러 감소). 

 

(승, 11.19-12.5) ▶11월 19일(131.9억 달러)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로 발령받은 임창렬 부총리의 IMF 구체금융신청 거부와 11월 22일(127.9억 달러) 재신청으로 일어난 정책 혼란과 불신으로 인한 11월 18일(158.6억 달러)이후 가용 외화보유고의 격감으로 외환위기가 국가적 환란으로 전환, ▶12월 3일(57억 달러) 협상 타결 후 ▶100억 달러 IMF 자금지원으로 12월 5일(110억 달러) 보유고 회복 (▶11.18-12.3일간 101.6억 달러 감소, 11.19-28일간 85.3억 달러 감소) *전일 대비 10억 달러 이상 감소한 날: 11.19(16.5), 20(10.2), 25(12.1), 27(12.8), 28일(20.9억 달러 감소) 

 

(전, 12.5-12.18)▶12월 5일(110억 달러)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론 제기 이후 가용 외화보유고의 지속적 감소로 12월 18일(39억 달러) 선거일 가용 외화보유고가 국가 부도 직전으로까지 발전 (▶12.5-12.5일간 71.0억 달러 감소) *전일 대비 10억 달러 이상 감소한 날: 12.12 (10.1), 15(21.4), 17일(12.4억 달러 감소)

 

(결, 12.19-12.24)▶11월 19일(67억 달러) 김대중 후보 대통령 당선으로 일시 증가했다가 다시 감소세로 전환, 12월 22일(59억 달러) 김 당선자의 IMF 협상 준수 서약과 12월 23일 IMF+(플러스) 협상 타결로 ▶12월 24일(88억 달러) 해외 채권자들의 만기회수 중단과 IMF 추가자금확보 및 긴급지원 20억 달러 등으로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마침내 1998년 1월 8일(100억 달러) 유동성 부족에서 완전히 벗어남

 

  이상의 환란기 기승전결의 전개 과정을 보면 위기의 질적 전환이 일어나는, 일종의 ‘게임전환(game change)’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997년 10월 23일 홍콩사태 이후 나타난 일시적인 외화 유동성 부족이 11월 16일의 강경식 부총리가 캉드쉬의 IMF 총재에게 긴급구제금융지원을 요청하면서 국가적 외환위기로 전환되고,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의 임창렬 부총리 임명과 IMF 자금지원 요청 거부 이후 국가적 환란으로, 12월 3일 IMF 협상 타결과 IMF 100억 달러 자금지원으로 안정을 되찾았다가 12월 5일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론 제기 이후 오히려 보유고가 다시 급감하면서 국가 부도 위기 직전까지 발전했다. 12월 19일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12월 22일 김 당선자가 IMF 협약 준수 서약을 한 후 환란기에서 벗어나 고난의 극복기로 들어가는 게임전환이 일어났다. 

 

1997년 환란의 진실 

 

  1997년 환란의 게임전환과정에서 정책결정자들의 정책 결정과 정치인들의 정치적 발언 등에 따라 외화보유고가 변하는 과정을 보면 언제,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환란이 발생하고 심화 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진정한 환란유발자인지, 환란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 임창렬 부총리, 강만수 차관, 김영섭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재, 홍재형 장관, 윤진식 경제비서관,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이회창 대통령 후보들의 역할과 책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가용 외화보유고의 요동치는 모습을 보면 기(起) 단계에서보다는 오히려 승(承), 전(轉) 단계에서 더 큰 폭으로 보유고가 감소하면서 나라가 국가 부도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환란의 책임자로 비판받아 온 기 단계의 김영삼-강경식-김인호보다 승·전 단계의 김영삼-임창렬-김대중(이회창)의 역할과 책임이 더 크고 무겁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숫자의 흐름을 보면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이 IMF에 자금요청을 늦게 해 환란을 키웠다며 ‘IMF 늦장 대응론’을 제기하고 환란유발자로 특정하고 책임을 물은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이는 환란기 기승전결의 전체 과정에서 판단할 문제이며 환란기의 시작인 기 단계만을 놓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환란기 전체 흐름에서 보면 임창렬 부총리의 IMF 행 거부 발언으로 지연이 일어난 것에 비한다면 강경식-김인호의 IMF행 결정을 환란의 진로를 바꿀 만큼 늦은 것이었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는 없다. 만일 역사가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가 경질되지 않았고,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와 협상한 데로 IMF 협상이 이루어졌더라면 외환위기는 수습되고 환란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외화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력을 가지고 협상을 하면서 IMF의 가혹한 협상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마저 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1997년 환란의 기 단계에서 단순한 유동성 부족을 수습하지 못하고 외환위기로 키웠다는 책임을 물을 수는 있으나 그들만을 환란유발자로 특정하고 이미 현직을 떠난 이후에 일어난 승·전 단계의 일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그들을 1997년 환란에 대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만드는 과도한 문책이고 책임 전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인 환란의 전개 과정을 보면 외환위기가 환란으로 게임전환이 일어난 것은 11월 19일에 발생한 김영삼 대통령의 강경식 부총리를 임창렬로 바꾸는 인사와 뒤이어 일어난 임창렬 부총리의 IMF 거부 발언 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만일 그날 그 인사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설사 인사가 있었더라도 임창렬 부총리의 거부 발언이 없었더라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국가적 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임창렬은 외환위기를 환란의 국면으로 변환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임창렬의 역사적 책임은 막중하며, 결과적으로 그 시기에 그러한 인사를 했다는 점에서 김영삼 대통령까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미국과 IMF가 한국에 대한 금융지원은 IMF를 통해서만 한다는 원칙을 세워놓았는데도 IMF와 협상이 진행 중인 12월 27-28일 일본을 방문 대장성 장관을 만나 별도의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등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임창렬의 의문스러운 행동은 지금도 ‘역사적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 무렵 외화보유고가 더욱 큰 폭으로 감소했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IMF와 미국 측의 불신을 더욱 키우고 우리의 협상력을 상실하게 하여 결국 우리가 IMF가 요구하는 가혹한 협상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환경을 만든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재협상론은 모처럼 이루어진 IMF 자금지원으로 유동성 부족이 해소되려는 상황에서 우리의 IMF 협상 이행 여부 자체를 대내외적으로 불투명하게 만들고 IMF와 미국, 해외투자자들에게 채권 회수를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선거 후까지 기다려 볼 것인가를 결정하게 하는 불안정한 상황을 조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해외 투자자들이 만기회수를 선택하면서 IMF 지원 후에 오히려 만기회수가 빨라지게 되었고 나라는 국가 부도 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12월 15일에는 전일 대비 하루 사이에 21.4억 달러가 감소했다. 김대중 후보를 임창렬과 더불어 진정한 환란유발자였다고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후보 시절 주장했던 재협상론도 과연 자신의 경제철학이고 소신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대선 전략이었는지 역사적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것이 그의 소신이고 철학이었다면 그는 당선 이후 그렇게 쉽사리 자신의 재협상론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다. 그가 국가 부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진정으로 한 주장이었다면 그는 당선 후에도 IMF와 특히 미국과 재협상에 나섰거나 적어도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당선 3일 후인 12월 22일 미국 립튼 재무부 차관에게 굴욕적인 IMF 협약 준수이행 서약을 감수한다. 더욱이 그가 대통령 당선 직후 캉드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IMF 개혁 프로그램은 자신의 경제철학이라고 했다는 캉드쉬의 증언을 보면 김 후보의 IMF 재협상론은 국가 부도가 걸린 중차대한 문제를 오로지 자신의 대선 전략으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투기업자인 조지 소로스를 끌어들여 벌인 정치 쇼는 나라를 책임지는 최고지도자가 되겠다는 그의 자질마저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아무리 선거라지만 국가가 이렇듯 위중한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며 수석들과 같이 의분(義憤)을 터트렸던 일이 생각난다. 

 

  돌이켜 보면 김영삼 대통령의 악수(惡手)가 된 인사와 그로 인해 발생한 임창렬 부총리의 거부 발언, 그리고 김대중 후보의 재협상론의 3대 사건은 환란기의 외환위기를 환란으로, 국가 부도 위기로까지 증폭시키는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환란에 대한 기록들에서 임창렬-김대중의 역할과 책임론이 많이 축소되거나 아예 거론도 되지 않고, 오히려 김영삼-강경식-김인호 책임론만 크게 부각 된 것은 1997년 환란을 왜곡하는,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은 잘못된 역사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김영삼-김인호-강만수와 캉드쉬(IMF)와 립튼(미국) 만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 국부날은 그 대표적인 왜곡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임창렬-김대중의 발언과 행동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이는 환란에 대한 바른 평가라 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한 바른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1997 환란의 객관적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1997년 환란의 진실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승자가 아닌 패자의 항변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승자가 기록한 역사가 패자에 대한 바른 기록과 승자의 잘못에 관한 기록을 모두 삭제하고 승자의 업적만 돋보이게 하는 기록들로만 채워져 있어 이에 대해 패자가 비판하고 저항하는 말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승자의 기록은 패자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한 유효하다. 만일 승자의 기록이 왜곡되고 거짓이란 것을 증언하는 패자의 기록들이 있고 그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승자의 기록은 수정되어야 하고 승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러한 경우가 바로 1997년 환란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많은 자료와 최근의 영화 국부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들을 보면서 1997년 환란의 역사적 전개의 전 과정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취사 선택되고 편집되고 자신들의 일방적인 주장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특히 영화 국부날을 보고 1997년 환란이란 엄중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의 왜곡과 편견이 도를 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한 사람으로서 김 대통령과 정부가 국가 부도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동안 김대중, 이회창 후보가 김영삼 대통령을 북쪽 사람들 표현처럼 ‘가열차게’ 비판하며 IMF 협상을 정략적으로 선거에 이용하는 것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 왜곡에 침묵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왜곡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김대중과 이회창은 1997년 1월 한보 사태 와 7월 기아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기보다는 대선만을 생각하고 표만 의식하며 정치화하여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고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이나 금융개혁을 무력화시키면서 1997년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1997년 환란의 전 과정에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환란의 진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한 사람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다른 사람은 낙선되어 면죄되었고 모든 책임은 김영삼 대통령에게로 전가되었다. 

 

 더욱이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 비판을 자신의 대선 전략으로 삼고 김영삼 대통령을 매도했다. 그는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킨 김영삼 대통령을 당에서 축출하고 자신의 정치적 뿌리인 신한국당을 한나라당으로 간판을 바꾸고 김영삼 대통령과 정부의 무능과 직무 태만 때문에 환란이 일어났다고 비판하며 이를 대선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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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1998년 2월 정권교체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에 이어 다시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지난 20년간 ‘1997년 환란은 김영삼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의 무지와 무능 때문에 발생했다’라는 말은 정설이 되었고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국민의 일반 상식이 되어버렸다. 지난 20년간 사실상 여야가 힘을 합쳐 1997년 환란의 모든 책임을 김영삼 대통령과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 그리고 강만수 차관에게 전가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과 정부의 경제 관료들은 승자의 역사에서 철저하게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혀왔다.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과도하다고 변호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국부날과 같은 왜곡된 영화가 만들어져 20년 전을 알 길 없는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다시 왜곡된 역사를 심어주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1997 환란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가 승자의 기록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패자의 기록들도 많이 있다. 1997년 환란에 대한 많은 승자와 패자들의 개인 회고록들과 인터뷰 기사들, 신문 칼럼들, 그리고 출판물과 연구 자료들, 보고서들, TV 탐사보도, 심지어 최근의 영화 국부날에 이르기까지 동시대를 경험하고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상호 비교검증을 하다 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객관화가 가능해진다. 다만 지금까지 그런 시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면 환란 관계자들의 회고록을 비교하고 무엇이 기록되고 안되었는가, 어는 대목에서 생각과 기술이 서로 엇갈리는 지등을 따져보면 우리는 보다 환란의 실체적 진실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다. 

 

  더욱이 1997년 환란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고립된 상태가 아닌 세계적인 개방경제체제 속에서 일어난 국제적 사건이다. 그 때문에 우리 환란은 IMF를 비롯하여 미국, 일본, 영국 등 유럽 국가들과 외환위기를 겪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연관되어있다. 따라서 그쪽에 남아있는 자료들이나 관계자들의 증언까지도 모두 검색하고 비교해 보아야 비로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1997년 환란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은 아직도 입문단계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글을 통해 1997년 환란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객관적으로 복기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료 조사검색과 시간의 제약 등으로 여전히 주마간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1997 환란의 역사적 실체를 찾고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고 승자의 잘못에 대한 기록과 패자의 정당한 기록을 함께 반영하는 올바른 역사 기록을 향한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97년 환란은 20년여가 지난 지금 개인적으로도 지을 수 없는 아픈 상처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김영삼 대통령을 모시고 4년간 청와대에서 국정운영의 직분을 수행하면서, 그 역사적 환란의 순간에서, 나라와 국민과 역사에,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자괴감 때문이다. 20년 전 환란으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신 모든 분에게 사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끝으로 1998년 2월 24일 오후 청와대를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국민에게 드린 김영삼 대통령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어쨌든 문민정부 5년의 결과에 대해서는 대통령인 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되고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부덕과 불찰의 결과입니다...지금 외환·금융위기 상황이 국민 여러분에게 주는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을 짓누르는 책임감 때문에 한순간도 마음이 편할 때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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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21 17:05:00 최종수정 2019-02-20 10: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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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빨님의 댓글

공룡이빨 작성일

글 내용을 보면 글쓰신 분이나 김영삼 정부의 잘못은 하나도 없고 다 남탓만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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